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61화 (61/257)

61화.

“내가 뭘 하면 되는 거지?”

“로아메나 대륙 곳곳에 이미 창궐한 마수를 전부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이 클라인에 모인 마수들을 외부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거야. 로아메나 대륙에 나타난 마수의 대부분은 이곳에 모여 있는데 이놈들이 외부로 나가면 앞으로 지속적인 피해를 줄 거야. 부식된 땅이 다른 지역으로까지 번지는 것도 문제고. 그러니까 이 지역의 마수들을 봉인한다. 클라인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이 이외의 다른 방도가 없어. 그리고 생각보다 방법은 간단해.”

남자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설명을 듣고 있는 아리스에게 한번 웃어 준 다음 설명을 이었다.

“마수는 다른 생명의 영소를 활동의 원천으로 삼지. 다른 인간이나 생물과 달리 거대한 영소 덩어리인 우리 같은 데르카이드는 마수들의 좋은 먹잇감이야. 아마 지금쯤이면 우리를 먹고 싶어서 안달이 났을 거야. 하지만 데르카이드 못지않은 영소 덩어리인 건 마검도 마찬가지야.”

― 그렇지! 내 마력이 어마어마한 만큼 영소의 양도 아리스 못지않지!

남자는 듣지도 못 하는데 페니드란이 추임새를 넣었다.

“마검이 내뿜는 마력과 영소는 마수들에게 거절할 수 없는 유혹이 될 거다. 마검과 우리의 마력을 미끼 삼으면 이 주변의 마수들을 전부 끌어모을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마수들의 가장 큰 목표가 마검이 되게 하는 거야. 고육지책이지만 마수들은 생각보다 행동 방식이 간단하니까 마검이 마력을 내뿜는 동안은 그 주변을 배회할 거야.”

“하지만 그렇게 되면 페니드란을 여기에 묶어 두라는 소리나 다름없잖아.”

그랬다. 페니드란을 미끼 삼아 마수들을 이 땅에 묶어 두자는 소리는 페니드란을 클라인 밖으로 가지고 나갈 수 없다는 뜻이었다. 아리스는 저도 모르게 페니드란을 손으로 꽉 쥐었다.

“내 검을 이 땅에 버리란 소리야?”

페니드란은 아리스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잡은 검이었다. 그만큼 애착도 강했고 페니드란에 사념이 깃든 이후에는 동생이 생긴 것처럼 애정을 쏟았다. 그런 검을 두고 떠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어. 이미 많은 사람이 죽었어, 루데키아스. 이 이상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그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고 치르는 대가가 작지.”

“하지만 페니드란은……!”

― 아리스. 저 사람 말은 일리가 있어. 내가 미끼가 되어 마수들을 이 땅에 가두는 게 지금 상황에서는 가장 좋아 보여.

페니드란이 아리스를 달랬다.

“하지만!”

― 네가 걱정하는 게 뭔지는 나도 알아. 하지만 난 인간이 아닌걸. 이 땅에서 홀로 몇 십 년, 길게는 몇 백 년도 버티고 있을 수 있어. 물론 조금 쓸쓸하긴 하겠지만…… 그건 참으면 되니까! 참을 수 있어!

페니드란의 말에 아리스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 그렇게 고민하지 마, 아리스. 부디 내가 이 상황을 수습하게 해 줘. 네가 지금은 화가 많이 난 상태지만 어느 정도 진정이 되고 나면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이 대륙이 부식되어 죽음의 땅이 되면 너는 또 너 자신을 탓할 거란 걸 난 알아.

페니드란은 아리스가 피의 숙청을 할 당시 수많은 이의 피를 머금었다. 그래서 잘 알았다.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해도 그에 대한 죄책감은 아리스의 마음 한구석에 깊은 상처가 되어 남아 있었다.

종종 그에 대한 악몽에 시달리다 깨어나면 페니드란을 끌어안고 잠드는 날이 많았다. 페니드란은 사실은 누구보다 더 상냥한 자신의 주인이, 상냥한 만큼 잔혹해질 수 있었던 친우가, 고통 받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 네가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을 보느니 혼자 마수들의 미끼가 되는 쪽을 선택하겠어.

“페니드란…….”

이런 상황에서도 너는 다정하구나, 나의 친우. 너의 용감한 선택에 찬사를 보내마.

― 나는 다정하고 용감한 사람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다정하고 용감한 검이지.

아니, 이런 상황은 청출어람이라고 하는 거야. 아리스가 희미하게 웃자 페니드란이 헤헤거리며 웃음소리를 흘렸다.

남자는 아리스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황이 급박하다 해도 그는 초조해하지 않았다. 마치 원하는 대답을 할 것이라 믿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 말대로 아리스가 아무리 고민하고 부정한다 해도 여기서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좋아요. 그렇게 해요.”

남자는 아리스의 등을 손바닥으로 툭 쳤다.

“그럼 빨리 시작할까?”

아리스는 페니드란을 검집에서 뽑자 새하얀 검날이 드러났다. 남자에게는 마검으로 클라인을 봉인하자는 짧은 설명만 들었지만 아리스는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것 같았다. 어디까지나 본능에 가까운 행동에 근거는 없었다.

아리스는 페니드란을 쥐고 팔을 하늘 높이 들었다. 그의 등 뒤에서 커다란 검은 날개가 솟아났다.

― 좋아, 좋아! 내게 맡겨!

페니드란의 검신에 푸른 스파크가 일었다. 그러더니 땅에서 하늘로 번개가 내리치듯 번쩍거리는 빛이 구름을 뚫고 솟아났다. 그 빛에 마수들의 이목이 쏠렸다. 마수들은 점점 불어나 아리스와 남자를 에워싸고 빙글빙글 돌았다.

― 와! 마수들 좀 봐! 내가 했지만 대단하다!

“생각보다 효과가 좋은걸. 충분히 기다려.”

남자가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이렇게 많은 수의 마수들이 몰려들었지만 그들은 아리스와 남자를 공격하지 않고 굶주린 들짐승처럼 주변을 배회할 뿐이었다. 아리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마수들이 자신들을 공격하지 않는 이유는 남자에게 구태여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리스의 등 뒤에서 느껴지는 남자의 존재감이 어마어마했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에 짓눌릴 것 같았다. 함부로 접근하면 잡아먹힐 것 같은 공포감마저 엄습해 왔다. 다른 상황이었으면 분명 자신도 도망쳤을 것이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이였기 때문에 신뢰도가 금방 생기지는 않았다 해도 저 남자는 아리스를 믿었다. 그렇다면 자신도 그를 믿는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적이 아니다. 그런 믿음을 품었기 때문에 도망치지 않을 수 있었다. 겪으면 겪을수록 그의 정체가 궁금했다. 자신도 이러한데 하물며 마수는 어떻겠는가. 아리스의 손에 땀이 축축하게 배어들었다.

“머릿속으로 이미지를 그려. 마수들을 가두는 범위를 정해. 구체적으로 어떡할지 정하고 실행하고자 하는 의지를 품어. 마수를 불러온 너라면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그 말을 들은 아리스에게도 강한 확신이 들었다. 정신이 맑았다. 이 대륙 곳곳에 있는 마수들의 위치까지 알 것 같았다.

그래, 와라. 너희가 찾는 최고의 먹이가 여기 있다. 그리고 나의 의지대로 움직여라. 세계의 법칙이라는 통제권 일부를 내게 넘겨!

아리스의 집중력은 최고조에 달했다. 흘러넘치는 그의 마력은 대지와 공기를 타고 쭉쭉 뻗어 나가 일정한 범위 안에서 결계를 생성했다. 아리스의 전신에 튀고 있는 스파크는 주변의 모든 것을 태워 버릴 것처럼 형형한 기세였다.

아리스는 충분히 기다렸다. 마수들이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마수들의 관심사가 완전히 자신에게로 몰렸을 때. 그는 페니드란을 있는 힘껏 땅에 꽂았다.

페니드란이 땅에 박히자 지축이 울렸다. 아리스의 마력이 뻗어 나간 지역 전체에서 마력과 자연계 영소들이 마찰하며 푸른 스파크가 튀었다. 마치 밤하늘의 별이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구경꾼이 정체불명의 남자 하나만 있는 것이 아쉬울 정도의 장관이었다.

마수들의 비명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마력의 소모가 컸기 때문에 아리스는 저도 모르게 비틀거렸다. 등에 솟아났던 날개는 형체를 잃고 깃털과 함께 부스스 흩어졌다. 남자가 아리스를 부축해 주었다. 그는 새하얗게 시야를 가리고 있는 마수들을 보며 말했다.

“네 식솔을 탈출시킨 경로가 있지?”

영지에 있는 식솔들과 어머니는 이미 설치해 두었던 장거리 워프 게이트 마법으로 안전한 곳으로 이동했다. 원래는 추적을 막기 위해 편도행 일회용으로 설계되었지만, 아리스라면 술식을 복원해서 한 번 더 쓸 수 있었다.

“네, 아직 사용할 수 있어요.”

“여기는 내게 맡기고 넌 그 경로로 탈출해.”

그 말에 아리스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네 마법은 훌륭하지만, 충분히 완성되지 않았어. 더 장기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선 보완해야 해.”

“그것도 제가 할 수 있어요.”

“너 마력 고갈로 죽고 싶어?”

남자가 손가락으로 아리스의 이마를 꾹 눌렀다. 그의 말대로 아리스의 몸에는 최소한의 생명 유지만 가능할 정도의 마력만 남은 상태였다.

“네가 기틀을 잡아 놓았으니까 조금만 손보면 돼.”

“하지만 그렇다면 당신은 어떡할 건데요?”

남자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하하 웃었다.

“내 걱정은 말고 무사히 빠져나갈 준비나 해. 내가 시간을 조금 벌어 줄게.”

“제게 왜 이렇게까지 해 주세요?”

남자는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고 내게 네 또래의 자식들이 있는데 말이지…… 너희 세대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아직은 세상이 멸망하면 안 되지 않겠어?”

“하지만 저는…….”

“알아. 네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어. 여신의 예언 말하려 그랬지? 하지만 말했잖아. 네 또래의 자식이 있다고. 내 자식들에게 앞으로 아직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듯 너 역시 그렇다고 믿거든. 너는 데르카이드야. 네가 이루고자 하는 일이 있으면 이루어질 거야. 그러니 세계에 종말을 가져오겠다는 생각은 앞으로 하지 마.”

아리스의 눈이 커졌다. 남자의 등 뒤로 마수들이 서로 뒤엉켜 있는 것이 보였다.

“교훈은 이것으로 충분하잖아.”

그러면서 아리스의 등을 떠밀었다.

“자, 빨리 가.”

― 아리스!

아리스가 걸음을 떼기 전에 페니드란이 그를 불렀다. 다리를 멈칫하자 페니드란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 다시 만나!

자신의 마검이 다음을 기약하고 있었다.

“기다려. 반드시 너를 다시 찾으러 올 테니까.”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울고만 있을 시간이 없었다. 맨몸으로 마수들을 뚫고 가야 했다. 보라색 스파크가 직선으로 쭉 뻗으며 지나갔다. 남자가 엄지손가락을 척 올렸다.

“길을 만들어 주었으니 어서 달려.”

남자의 말에 아리스는 달렸다. 그러다 뒤를 돌아봤을 때는 이미 마수에게 가려 마검도, 남자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아리스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클라인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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