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60화 (60/257)

60화.

― 네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뭐야?

누군가가 그렇게 물어 왔다.

내가 원하는 것. 그것은 세계의 종말.

그저 이 세상이 미웠다. 싫었다. 친형제처럼 가깝게 지내던 사촌 형제를 앗아간 것을 시작으로 결국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자신과 가까웠다는 이유 하나로 소중한 사람들을 하나둘씩 잃었다.

황제는 자신의 쌍둥이 동생을 배신했고 그는 아들의 발목을 잡지 않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모든 상황이 자신을 절망에 빠트리기 위해 돌아가는 것 같았다. 자신이 왜 이런 시련을 겪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도 인간이다. 붉은 피와 따듯한 몸을 가지고 스스로 생각하고 희로애락을 느끼는 인간이다. 의심의 눈을 한 자들에게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했다. 하지만 지쳤다. 노력했지만 돌아온 것은 배반이었다. 그렇다면 자신 역시 의리를 지킬 명분은 없지 않은가.

증오스러운 이 세계를, 루아드 제국 황실을, 전부 불태우고 싶었다. 그러면 속이 좀 풀릴 것 같았다. 그래, 전부 깨끗하게 없애 버리자. 이 땅에 종말을 가져오자.

나를 증오하는, 내가 증오하는 이 세계는 자신과 세계 둘 중 하나가 소멸해야 끊을 수 있는 감정의 골이었다. 내가 세상의 종말을 가져올 것이라고? 그렇다면 너희가 기대했던 대로 정말 종말을 가져오겠다.

종말.

간단하다. 깊게 생각할 것 없었다. 몸과 마력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하지만 자신이 틀렸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자신을 괴롭힌 세계에 대항하는 것은 정당한 행위였다. 지금까지 이 세계가 내게 기대한 것은 종말이었다. 그러니 이번만큼은 기대에 부응해 주겠다.

이 세계의 종말을 가져와 주마.

“정말 그렇게 생각해?”

얼굴에 격통이 일었다.

“젠장, 의지에 완전히 먹히기 전에 빨리 제정신 차리란 말이다, 애송아! 내 마력은 불안정해서 오래 못 버티니까! 이봐, 루데키아스!”

입가에서 비릿한 것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리스는 손을 들어 그것을 훔쳤다. 눈을 뜨니 시야가 온통 붉었다. 붉은색을 띤 것이 무엇인지 초점이 흔들려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마지막 기억도 자신의 시야를 뒤덮던 붉은 피의 향연이었다. 아리스는 화들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그래, 정신 들었어?”

“뭐야…….”

“뭐긴 뭐야. 지금은 좀 바쁘니까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자. 네 마검이 필요해.”

“으…….”

아리스는 얼얼한 한쪽 뺨을 어루만졌다. 입 안쪽이 제대로 터진 모양이었다.

“아파…….”

“서두르지 않으면 반대쪽 뺨도 똑같은 꼴을 당할 테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

“누구……?”

아리스의 물음에 상대방은 대답하는 대신 그의 몸을 반대편으로 돌려세웠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 덕분에 아리스는 흐릿했던 의식이 또렷하게 돌아왔다.

“뭐야, 이게.”

수천, 수만 마리의 흰 마수들이 땅과 하늘을 메우고 있었다. 새하얗다. 하늘도, 땅도. 세상이 눈이라도 온 것처럼 하얗다. 아리스는 하늘을 하얗게 메운 마수의 무리를 보고 아연했다. 태양 빛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아리스가 경악에 가득 차 자신의 눈을 의심하고 있는데 뒤에서 아리스의 얼굴을 후려쳤던 사람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대충 이래. 자, 아직 늦지 않았어. 네가 저지른 짓을 수습해 보자. 내가 도와줄게.”

“당신은 누구?”

아리스가 뒤를 돌아보자 붉은 머리를 한 남자가 아리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겉으로는 제법 젊어 보였지만 얼굴에서는 짙은 관록이 흘러나왔다. 이 혼돈의 대지 위에서 자수정 같은 그의 보라색 눈동자는 더없이 깨끗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아리스는 그의 모습을 보고 주춤거렸다.

“데르…… 카이드…….”

정신이 들었을 때 자신의 눈에 들어왔던 것은 그의 등 뒤에 돋아난 붉은색의 날개였다. 당시의 아리스는 자신 이외의 데르카이드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남자의 날개에 퍽 놀랐다.

“그렇게 불리기엔 조금 모자란 데다 간신히 날개를 꺼낼 만큼의 마력만 있지만, 일단 그렇다 치자.”

그는 아리스의 어깨를 꽉 잡았다. 아리스가 통증 때문에 얼굴을 찌푸렸어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 하는 얼굴이군. 저 마수들을 어떻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물론 이 로아메나 대륙 전체가 위험해.”

“어떻게 된 거지?”

“네가 불러온 거야.”

“말도 안 돼! 나는 그런 짓 하지 않았어!”

아리스의 부정에 남자는 고개를 저으며 냉정하게 말했다.

“했어. 의지에 먹힌 사이 네 무의식이 이런 것을 바랐던 것이지.”

그 말에 아리스는 순간 흠칫했다. 누군가의 질문으로 끝난 마지막 기억. 그 물음에 어떻게 대답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기억나지 않아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는 이 세상에 분노했고, 분노를 풀 곳이 필요했다. 그래도 이런 방식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한 짓이 아니어야 했다.

아리스는 거세게 외쳤다.

“아니야!”

“상황을 회피하려 하지 마라, 애송아.”

아리스는 고개를 거칠게 내저었다. 하지만 상황을 부정하며 머리를 흔들면 흔들수록 정신을 잃기 직전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자신을 에워싼 황실 친위대 기사들, 차가운 눈으로 직접 루데키아스의 처형을 명하는 황제, 청명한 하늘을 배경으로 흩뿌려지는 선홍색의 피.

“맞아…… 내가 했어…….”

아리스는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기억을 되짚고는 사방을 살피는 눈동자가 덜덜 떨렸다.

“내가, 원했어…… 전부 필요 없게 느껴졌어…….”

그의 손이 맥없이 떨어졌다.

“그래, 이제 알겠어?”

“…….”

“알았으면 나를 좀 도와주는 게 어때?”

“도와?”

아리스가 조소했다.

“내가 왜?”

남자가 한쪽 눈썹을 위로 올리며 대답했다.

“지금 왜라고 물었어?”

“그래. 내가 왜?”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싸늘한 남자의 목소리에 아리스가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하지만 이딴 세계, 어떻게 되든 내가 무슨 상관이야!”

그 말에 조금 전 경고했던 대로 남자는 아리스의 반대쪽 뺨에 주먹을 휘둘렀고 아리스는 땅바닥에 나가떨어졌다. 아리스는 방금 맞은 뺨을 부여잡고 남자에게 사납게 눈을 치켜떴다. 남자는 지지 않고 눈을 부라리며 아리스에게 말했다.

“제발 좀 머리 식혀라, 애송아. 너는 이 세계가 어찌 되든 상관없겠지만 나는 아니거든. 이 일로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어. 고향을 잃는 사람들도 있어.”

“내가 알 게 뭐야. 나를 최악의 데르카이드 흑익이라 부르며 혐오하던 사람들에게 내가 왜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데.”

“오늘 남편을 잃은 대공비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마저 잃게 만들지 마.”

남자가 어머니를 언급하자 아리스는 동요했다. 아리스는 지금까지 잃은 것이 많았지만 아직 전부를 잃은 것은 아니었다. 그마저도 자신의 손으로 망쳐 버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하는 그 모습에 남자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화내지만 말고 들어. 말했듯 시간이 없으니까 일단 여기서 살아나간 다음에 화를 내는 게 어때? 그땐 내가 다 들어 줄게.”

아리스는 그 기세에 눌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신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 하고 허둥지둥하며 일어나기 바빠 남자가 지나가듯 중얼거리는 말을 듣지 못했다.

“뭐, 내가 살아서 나갈 수 있다면 말이지만…….”

그는 아리스의 입가에 흐르는 피를 자신의 소매로 문질러 닦아 주었다.

“지금 마수들이 공격하지 않는 것은 내가 마법으로 우리 기척을 숨겼기 때문이야. 지속력이 형편없으니까 내가 하는 말 잘 듣고 실수 없이 해야 해.”

“무, 무슨…….”

“네 마검 페니드란 말이다.”

남자는 아리스가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을 손으로 가리켰다.

“내가 봤을 때 그 마검에는 마력이 제법 응축되어 있는데, 정확하게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을까?”

아리스는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내, 내가 걸음마를 시작했을 무렵부터 만진 검이야. 지금까지 내 마력을 계속 흡수하면서 성장했는데 마력의 양 자체는 측정해 본 적이 없어서…….”

“그렇다면 사념이 깃들 정도는 되겠지.”

지금까지 아리스에게 그런 식으로 물은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이 페니드란을 마검이라 부르는 이유는 검에 서린 마력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검의 진가는 다른 것에 있었다. 사용자의 손을 많이 탄 검에는 사념이 깃든다. 사념이 깃든 검이 마력을 얻으면 유사 영소를 형성한다. 일종의 영혼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 말인즉슨, 마검 페니드란은 자아를 가진 검이라는 소리다.

― 들켰네.

“페니드란…….”

아리스가 오른손으로 검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 저 데르카이드의 정체를 모르니 지금까지 잠자코 있었는데 다 알고 온 모양새야. 그나저나 아리스, 너 정말 큰일 날 뻔했다고? 내가 불러도 정신 못 차리더니 양 볼이 터진 거로 끝난 게 천만다행이야. 저 사람에게 감사하도록 해.

어째 지금까지 조용하다 싶었더니 페니드란은 쾌활한 목소리로 재잘거렸다. 페니드란의 목소리는 마력이 연결된 아리스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엄밀히 따지자면 목소리로 말을 거는 것이 아니고 의식을 전달하는 개념에 가까웠다. 그래서 남자는 페니드란이 뭐라고 떠들든 대화 내용을 알 수 없었다.

― 그래서, 그래서. 내 힘이 왜 궁금한데?

“페니드란의 힘은 아마 상상하는 그 이상의 것일 거야.”

“잘됐군.”

남자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잘 들어. 지금 로아메나 대륙 전반에 마수들이 들끓고 있어. 네 염원을 듣고 몰려온 것들이지. 의지에 먹혔던 상황은 어쩔 수 없었다 해도 네게 일정 부분 책임이 없지는 않다고 생각해. 그러니 네 힘으로 해결하자.”

남자의 말에 아리스는 움츠러들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었다. 책임과 의무 따위 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런데 남자가 굳은 얼굴로 그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이 일을 해결할 사람은 너밖에 없어. 도와줘. 네 마검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야.”

원망을 한바탕 들을 줄 알았는데 예상 밖의 태도에 아리스가 주춤하고 있는 사이 페니드란이 재촉했다.

―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는 거야? 나 아니면 안 된다고? 그것 참 끝내주네! 그게 뭔지 저 사람한테 빨리 물어봐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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