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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따라 종말까지-59화 (59/257)

59화.

다들 눈을 휘둥그레 뜨기 바빠 말은 안 했지만 불과 며칠 전에 이 비슷한 상황을 겪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것은 용이었다. 마침내 전신을 드러낸 용은 형체가 불안정해 보였다. 용은 물리적인 육신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 정신 사념의 집합체가 부풀어 올라 형체를 만들었기 때문에 불안정한 부분은 몸이 반투명하게 비쳐 보였다. 그것은 마석의 잔류 사념이 약해 용주의 원래 주인의 모습이 제대로 복원되지 못한 탓이었다.

“세상에…….”

미레아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라우노의 몸 위에 겹쳐 있던 용은 그가 손짓하자 하늘로 날아올랐다. 정확하게는 용의 사념체가 새로운 육신을 얻어 날아올랐다. 라우노 역시 그것을 따라 하얀 날개를 움직여 공중에 몸을 띄웠고, 네 사람은 넋을 놓고 땅 위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용이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시오가 얼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진짜 용이 아니야. 티몬에서 본 것처럼 용의 잔류 사념으로 생존 모습을 복원한 것 같은데…… 그냥은 할 수 없지. 라우노 저자가 마석과 공명해서 자신의 신체 정보를 제공했나 봐. 지금 저 용은 라우노의 꼭두각시 같은 상태야.”

아리스 역시 얼빠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미친 짓이야. 미친 게 분명해. 저런 짓을 하면 마석이 지닌 의지에 휩쓸려 자기 자신이 누군지도 잊을 수 있단 말이야. 마석에게 역으로 정신을 잠식당할 수도 있다고.”

아리스는 일전에 마석과 공명했을 때 머릿속에 시끄럽게 울리던 목소리를 떠올리며 진절머리 쳤다.

“자기 의지에 먹혀도 위험한데 타인의 의지에 휩쓸리면 끝이야. 티몬에서 본 용처럼 폭주할 수 있어.”

“하지만 라우노 씨가 자기는 괜찮다 그랬잖아.”

“그걸 어떻게 믿어.”

“그러면 어떡해?”

넷이 또 아옹다옹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라우노가 만들어 낸 용의 형태는 유유히 날갯짓하며 괴물들에게 날아갔다. 어느 반경 안에 용이 들어가자 괴물들이 목을 빼 들고 용을 주목했다. 그러더니 발을 쿵쿵 구르며 그를 쫓으려 그랬다.

용의 몸에서 화려한 전격이 방출되었다. 그것은 괴물들을 꿰뚫고 지나가며 감전시켰다. 엄청난 힘이었다. 라케드가 평상시에 쓰는 전격과 비슷했다. 미레아는 번쩍거리는 빛에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공격에도 괴물들은 죽거나 하지 않았다. 애초에 죽음이란 게 없는 존재들이었다. 다만 감전시키는 것만으로도 행동의 제약을 만들 수는 있었다. 괴물들이 멈칫하자 미레아가 얼른 지프의 문을 열며 말했다.

“라우노가 말한 기회가 지금이 아닐까 싶은데.”

일행들은 다른 것은 몰라도 미레아의 말에는 동의했다. 지프에 짐을 실은 시오가 이번만큼은 아리스에게 운전대를 넘기지 않겠다며 먼저 운전석에 올라탔다. 시동이 걸리자 서둘러 지프에 탄 일행들은 저택 대문 밖을 나와 달렸다. 운전하는 시오를 제외한 일행들은 차체 밖으로 상반신을 쭉 빼고 라우노와 그가 만들어 낸 용이 괴물들을 몰아가는 것을 구경했다.

아리스는 멀리서 라우노의 마력을 읽었다. 다른 영소가 없으니 거리가 멀어도 마력의 흐름을 포착하기가 쉬웠다. 라우노의 마력과 마석의 잔류 사념은 서로 공명하고 있었지만 섞이지는 않았다. 라우노의 의식은 또렷하단 소리였다.

반대편에서 다른 괴물의 무리가 몰려왔다. 시오가 기겁을 하며 방향을 틀었는데 괴물들은 그들에게 별 관심이 없는지 라우노가 있는 쪽으로 달려들었다. 괴물의 이목을 끌 수 있다더니 그들이 괴물들과 마주치더라도 부식 지역을 빠져나가기 수월하도록 이곳의 모든 괴물을 불러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엄청난 마력이다…….”

아리스가 질린 것 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무런 준비 없이 저런 식으로 마력을 운용하면 아무리 나라고 해도 마력 고갈이 일어나는데 마석이 있으니 확실히 다르군. 저렇게 하면 본인은 큰 힘을 쓰지 않고도 확실하게 눈을 끄는 것이 가능하긴 한데…….”

그래도 미친 짓이었다. 데르카이드가 의지에 먹혀 폭주한다면 단순히 마력의 제어 불가능한 상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한 번 의지에 먹혀 본 경험이 있는 아리스는 폭주 상태에서 다시 자아를 되찾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 있다. 게다가 이곳은 부식 지역의 안쪽.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몰랐다. 아리스는 팔뚝에 돋은 소름을 벅벅 긁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몰라. 마석을 준 건 람이니까 난 저 사람에 대해 깊게 생각 안 할래. 죽든 말든 신경 안 쓴다고.”

미레아와 일행들이 차 안에서 라우노와 용의 모습을 멀거니 보는 동안 지프는 괴물들에게서 점점 멀어졌다. 마침내 그것들이 점처럼 작게 보일 만큼 멀어지자 시오를 제외한 일행들은 멍한 얼굴로 시트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순간 미레아는 라우노의 웃는 얼굴에서 느낀 기시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라우노의 미소는 미레아의 아버지인 케이드가 웃는 모습과 비슷했다. 케이드와 라우노가 외형적으로 닮은 구석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눈이 휘어지는 모양이, 한쪽 입꼬리가 반대쪽보다 더 올라가는 것이, 볼이 도드라지는 방식이, 그 밖에 자잘한 부분이 케이드를 연상케 했다.

아버지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기 때문에 전혀 상관없는 사람에게서 그러한 흔적들을 찾는 것이었을까. 지금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다만 라우노가 말했던 자신의 죽은 형제가 붉은 머리였다는 것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설마.’

미레아의 아버지인 케이드는 형제가 없었다. 적어도 미레아가 아는 한 그랬다. 불쾌한 냄새가 맴돌던 갑갑한 공기가 어느 순간 시원하게 변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새 부식 지역 밖이었다. 뒷좌석에서 지도를 살펴보던 미레아가 이마를 치며 외쳤다.

“뜨악! 완전 빙 돌아가는 코스로 나와 버렸잖아?”

그녀는 앞자리 쪽으로 몸을 뻗어 운전 중인 시오에게 지도를 보여 주었다. 시오의 표정 역시 썩 좋지는 않았다.

“마을까지 얼마나 걸릴 것 같아?”

“한 시간.”

시오의 대답에 미레아는 애써 웃어 보았다.

“괘, 괜찮아. 아직 상정 범위 안이야.”

“해가 지고 있어.”

“그, 그것도 괜찮을 거야. 지도만 잘 따라가면 돼.”

하지만 시오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운전하기 시작했다. 아리스는 아직도 골치 아픈지 손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그런 아리스에게 시오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그…… 아까부터 묻고 싶었는데 네가 말한 ‘먹힌다’는 표현은 뭘 뜻하는 거야?”

조수석에 앉아 있던 아리스는 피곤한 표정으로 마른세수를 하였다.

“마법은 의지의 발현. 마법의 실현 정도는 의지의 크기. 곧 마법은 마법 시전자의 염(念)을 마력이란 힘으로 실체화한 것인 건 다들 상식적으로 알고 있지. 혹시 그런 적 없어? 뭐에 홀린 것처럼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혀서 주변이 보이지 않은 경험 말이야.”

시오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호응했다.

“그런 식으로 데르카이드가 강한 염에 사로잡혀 주변이 보이지 않게 되어 버리는 걸 의지에 먹혔다고 표현해. 주변은커녕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어버리지. 오로지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일념하에서 움직이게 돼. 일반적인 인간들에게는 나타나지 않는 증상이지. 마력량이 많은 데르카이드이기 때문에 생기는 증상이야.”

“그게 문제야?”

시오의 말에 아리스가 역으로 되물었다.

“많은 양의 마력을 가진 데르카이드가 한 가지 염을 강하게 품게 되면 어떻게 될까.”

그 질문에는 대답 못 하고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아리스가 자조적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네 눈앞에 좋은 예가 있잖아. 루아드 제국이 망해 버렸으면 좋겠다는 염에 사로잡혀 그 방대한 마력으로 로아메나 대륙 전역의 마수를 끌고 온 사람이.”

그 말에 차 안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아리스의 말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미레아는 아까부터 대화에 전혀 참여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관심 없다는 듯 창틀을 팔꿈치로 짚고 손에 턱을 괴고 바깥 경치를 보고 있었다.

아리스는 뒷자리에 앉은 미레아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 미레아는 그 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였다. 아리스는 사건의 자초지종을 들은 미레아가 자신을 어떤 얼굴로 바라볼지 알고 싶지 않았다.

앞자리에 앉은 아리스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는 건 미레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미레아는 마수 사건의 장본인이 어떤 얼굴로 말하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불운하게도 둘은 서로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미레아는 가까운 미래에 이때 조금 더 일찍 서로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면 각자 지고 있던 짐을 덜 수 있었을 텐데 하며 아쉬워하는 날이 다가온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나는 그런 식으로 마력을 쓰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야. 변명하자면 의지에 먹히면 그 의지대로 마력의 발현되는데 문제는 어떤 식으로 발현될지 방향까지는 조절 못 해. 말 그대로 통제에서 벗어난 거야. 나는 막연하게 이 세상이 미웠고 루아드 황궁이 불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식으로 불탈 줄 몰랐거든. 뭐, 데르카이드가 의지에 먹힌다는 것 자체도 문제인데 그냥 둔다 해도 대부분의 마력 폭주는 몸을 구성하고 있는 마력의 고갈 이어져 결국 죽게 돼.”

“그러고 보니 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는데, 아리스.”

침묵을 지키고 있던 미레아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너 그때 도대체 어떻게 살아 나왔어?”

아리스가 뒷자리를 힐끔 돌아보며 말하자 미레아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시선을 맞췄다.

“아…… 그 부분에 대한 정확한 사정은 아무도 모르긴 하지.”

그는 볼을 살살 긁으며 대답했다.

“마력 고갈이 일어나기 전에 누가 내 얼굴에 주먹을 날려서 정신이 돌아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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