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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따라 종말까지-58화 (58/257)

58화.

아리스와 미레아의 일행 중에는 마석을 몇 개씩이나 가지고 있는 쿤둘렌이나 마도 공학자이기 때문에 마석을 여럿 운용하는 라일라도 있었다. 시오와 리비엘로는 물론 하물며 파울로도 보조용으로 한두 개씩은 아무렇지 않게 마석을 갖고 있지만 사실 마석은 무척 귀하고 값비싼 물건이었다. 채굴량이 매우 적고 채굴한 마석도 각자 국가에서 관리해서 사고파는 것까지 까다로웠다. 돈이 있어도 마석을 구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라우노의 요구는 돈이 아니었다.

원래 용의 신체 기관인 용주였던 마석은 용의 잔류 의식이 남아 있어 데르카이드처럼 방대한 마력을 운용할 때 의지의 간섭 현상이 일어난다. 얼마 전에 아리스가 경험한 것처럼 말이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마법을 쓸 때 마석이 증폭기 역할을 해 주지만 아리스가 봤을 때 데르카이드는 아니었다. 용의 잔류 의식은 오히려 마법을 쓸 때 방해가 되었다. 그것을 라우노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라우노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첫째로, 데르카이드는 마법을 쓸 때 마석이 필요 없는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데르카이드에게 있어 마석의 쓰임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마석이란 물건은 편리해서 마법이 쓰이는 여러 곳에서 응용할 수 있지요. 하지만 불행하게도 저는 마석을 구하기 어려워 가진 것이 없거든요. 그러니 탐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라우노의 말은 여전히 모호했다. 라우노에게 넙죽 마석을 넘겼다가 어디에 오용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라우노는 손가락을 두 개 펴 보였다.

“둘째로, 마석은 여러분들이 이 땅을 빠져나가는 데 필요합니다. 물론, 마석 없이도 가능합니다만 그러면 여러모로 귀찮거든요. 쉬운 방법이 있으니 굳이 번거로운 방법을 택할 필요는 없지요.”

라우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밖에서 괴물이 포효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을 뒤덮고 있던 얼음이 완전히 녹으면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어이쿠.”

라우노가 얼굴을 찡그렸다. 괴물들은 호수를 따라 배회하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사념은 스스로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저 과거의 영광이 있는 이 땅을 하염없이 배회할 뿐이었다.

지금까지 라우노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시오가 양해를 구하더니 일행들을 응접실 한구석으로 끌고 가 머리를 맞대게 했다.

“어떻게 생각해?”

“난 반대. 나 혼자 길을 뚫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에게 마석을 넘기는 건 경솔한 짓인 것 같아. 차라리 마석을 살 돈을 주면 모를까.”

아리스가 낸 의견에 미레아가 난색을 보였다.

“하지만 네가 데르카이드란 것을 알면 네가 누구인지까지 아는 것쯤은 쉽단 말이야. 데르카이드 중에 네가 제일 유명할걸? 일반인도 아닌데 라우노 씨가 너를 못 알아볼 리 없어.”

“입막음하면 되지 않을까.”

아리스의 말에 시오가 자신의 목을 횡으로 그으며 대답했다.

“네가 말한 그 입막음이라는 방법이 이거면 입 다물고 있어.”

“…….”

아리스가 정말로 입을 다물자 나머지 셋이 조용히 그를 쏘아보았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도와준다는 사람에게…….”

“리비엘로, 네 예지 능력이란 걸로 어떻게 안 될까?”

시오가 조금 기대하며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썩 시원치 않았다.

“예지는 만능이 아니야. 쓰고 싶다고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미레아는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아까부터 선배가 말하는 예지가 도대체 뭔데?”

“돌아가서 천천히 설명해 줄게.”

어쨌든 예지 능력으로도 무언가를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결론에 시오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그 옆에서 생각에 잠겼던 리비엘로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 내 마석을 넘기자. 내가 가진 것은 그나마 하급이거든. 그리고 넉넉한 건 아니어도 어쨌든 예비 마석도 있으니 일에 지장이 있지는 않을 거야.”

시오가 끙 하는 소리를 내었다. 아리스가 의심을 사는 상황과 마석을 수상한 사람에게 넘기는 상황 중 어느 쪽이 더 나쁜가 저울질했을 때 전자인 상황이 더 골치 아팠다.

일행들은 제자리로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 라우노가 생글거리는 얼굴로 물었다.

“결정하셨나요?”

“좋아요, 마석을 하나 드릴게요.”

리비엘로는 자신의 가방에서 금색으로 반짝거리는 마석을 꺼내 망설임 없이 라우노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라우노는 그것을 바라보기만 할 뿐 고개를 저었다.

“잠깐, 아니지요. 당신들은 마석을 더 갖고 있잖아요?”

그 말에 일행들은 당황하여 얼굴을 굳혔다.

“뭐라고요?”

“제가 하나만 달라는 소리는 안 했잖아요.”

“……몇 개나 원하시는데요.”

시오의 물음에 라우노는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저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요. 기왕이면 당신들이 가진 것 전부 주셔도 괜찮고요.”

그 대답에 일행들은 절로 표정이 구겨졌다. 하지만 라우노는 그 모습을 보고는 이내 너털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라고 말하면, 경계심만 품고 하나도 주지 않으시겠지요? 욕심 부리지 않을 테니 주실 수 있는 만큼 주세요.”

리비엘로가 석연치 않다는 얼굴로 원래 넘기기로 했던 자신의 마석 하나만 다시 내밀었다. 라우노가 씨익 웃으며 그것을 받으려는데 리비엘로가 손을 위로 올리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저희는 이것 하나밖에 드릴 수 없어요. 대신, 저희가 보기에 석연치 않다 싶은 행동을 한다면 바로 압수예요.”

라우노가 한쪽 눈썹을 씰룩 올렸다. 어떤 식으로 압수할 건지 궁금해하는 얼굴이었다.

“아리스, 할 수 있지?”

비스듬하게 기대 있던 아리스가 하, 하고 짧게 웃었다.

“물론.”

그는 자신만만한 태도를 넘어 거만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라우노와 아리스가 짧게 눈싸움을 했다.

“알겠습니다…….”

리비엘로는 그제야 라우노에게 마석을 넘겨주었다. 라우노는 손안에서 마석을 만지작거리더니 갑자기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그의 몸 주변으로 붉은 스파크가 일었다.

본래라면 마력을 운용할 때 인간의 마력과 자연 상태의 영소가 반발하며 스파크가 이는 데 반해 이 안에서는 자연 상태의 영소가 고갈된 상태였다. 지금 라우노의 마력과 반발하며 스파크를 일게 만든 것은 마석의 영소였다. 금방 마력을 거둔 라우노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이 마석은 참 귀여운 녀석이네요. 어린 친구였나 봐요.”

마치 마석이 용주의 화석화가 진행되어 만들어진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당연하였다. 라우노가 마석을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면 이 부식 지역을 나가는 것을 돕는 데 마석을 사용하겠다는 소리는 안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용의 사념을 들어 본 적이 있는 게 당연했다. 마석과 동조했을 때 남아 있던 용의 사념 때문에 정신이 없었던 아리스에 반해 라우노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아리스가 개운하지 못한 얼굴로 라우노를 뚫어지라 바라보자 그가 어색하게 웃으며 설명했다.

“아, 제 말뜻은 이 마석이 원래 용의…….”

“용주였죠. 그래서 용의 잔류 사념을 읽을 수 있지요.”

자신의 말을 끊고 설명한 아리스의 말에 라우노가 조금 놀란 얼굴로 눈을 깜박거렸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생각했는데요.”

아리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제멋대로 말을 끊은 것처럼 또 제멋대로 입을 다물었다.

“아시는 게 많아 보이는걸요.”

“그쪽도요.”

“하긴, 여기까지 들어온 것만 해도 당신들이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말이니…… 거기에 비밀도 많으신 분들인 것 같고요.”

그렇게 말하며 라우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아리스가 따라 일어나며 대답했다.

“피차 비슷한 처지인 것 같으니 서로 꼬치꼬치 캐묻지 맙시다.”

다소 직설적이고 무례한 언사였지만 다른 일행들도 그 말에 동의하며 각자 짐을 챙기며 일어났다.

“거래가 성립됐으면 저희는 이만 떠나겠습니다.”

시오가 라우노에게 말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앞장서서 응접실을 나섰다.

“차는 잘 마셨습니다.”

사실 라우노가 준 차를 한 모금도 먹지 않았지만, 미레아는 시늉으로나마 인사치레했다. 라우노는 그런 미레아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원에 지프를 세워 둔 곳으로 나간 일행은 밖에서 쿵쿵거리는 발소리를 내며 돌아다니고 있는 괴물들의 행동을 긴장한 상태로 바라보았다. 다만 라우노는 긴장감 없이 터덜터덜 걸어 나와 기지개를 쭉 켰다.

“제가 드린 지도는 잘 갖고 있나요?”

미레아가 품속에서 지도를 꺼내 들었다.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것은 이 땅을 진정시키고 저 괴물들의 이목을 끄는 것뿐입니다. 여러분들은 지도를 따라 부식 지역을 빠져나가면 됩니다. 제가 있는 한 부식 지역 특유의 돌발적인 이상 현상은 없을 거예요. 그러니 제가 지도에 표시해 드린 경로대로 따라가세요.”

“무슨 방법으로 괴물들이 쫓아오지 않게 이목을 끌 건가요?”

미레아의 질문에 라우노가 마석을 가볍게 위로 던졌다 받았다.

“지금부터 보시면 압니다.”

라우노는 사람들을 조금 물러나게 해서 공간을 만들었다.

“작별 인사는 지금 미리 하겠습니다. 한번 시작하면 인사할 정신이 없을 것 같거든요. 출발 준비를 마치시면 여러분들은 저는 신경 쓰지 말고 적당히 틈을 봐서 움직이세요.”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렸어도 라우노는 그 이상의 설명 없이 마석에 마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까 전과 같은 붉은 스파크가 일었다. 라우노는 순식간에 붉은 기운에 둘러싸여 모습을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갑자기 두 눈을 크게 뜬 아리스가 저도 모르게 한 발 앞으로 다가가며 외쳤다.

“이런 미친!”

아리스의 얼굴에 경악한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 당신이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이해는 하는 거야?!”

미레아와 시오가 아리스의 어깨를 잡고 뒤로 끌어당겼다. 하지만 아리스는 여전히 라우노에게 화가 난 듯 말했다.

“마석의 의지에 먹히면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고! 이봐, 라우노 듀랜트! 내가 당신을 죽여야 하는 일이 생긴다면 한동안 내 꿈자리가 사나울 테니 그만둬!”

그 말에 아리스와 라우노를 제외한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시오가 다급하게 아리스를 돌려세웠다.

“야, 방금 그게 무슨 뜻이야?”

“저 미치광이가 마석과 자신의 정신을 공유하려나 봐.”

시오가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려는데 붉은 스파크 안쪽에서 라우노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 당신이 제 걱정을 해 주실지 몰랐습니다. 사실 저를 싫어하는 줄 알았거든요.”

그는 웃음기가 다분한 목소리로 태연하게 말했다.

“하지만 저는 괜찮습니다. 말씀드렸잖아요.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적당히 기회를 봐서 탈출하면 된다고요.”

붉은 스파크 안쪽에서 커다란 꼬리가 튀어나왔다. 녹색으로 반짝거리는 비늘을 가진 꼬리에 이어 커다란 앞다리 그리고 피막으로 된 날개, 마지막으로 기다란 목이 알을 깨고 나오듯 몸을 부르르 떨며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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