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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따라 종말까지-57화 (57/257)

57화.

그 말에 아리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미레아를 바라보았다. 미레아가 말한 데르카이드 친구가 누구인지 구태여 묻지 않아도 뻔했다. 아리스의 반응에 미레아는 지레 찔린 기분이 들어 시선을 피했다. 아리스는 최대한 말을 아꼈다. 자신의 얼굴이 그대로 노출되었기 때문에 쓸데없는 정보를 흘려 괜한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상당히 꺼림칙한 기분까지 들었다. 아까 마수는 아니지만, 영소의 고갈을 일으키는 무언가의 존재를 깨달았는데 그게 자신의 눈앞에 있는 라우노란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수상한 데르카이드의 앞에서 쉽게 경계를 풀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앞에서 대놓고 날을 세우고 있는 모습을 보일 수도 없었기에 아리스는 자신의 경계심을 숨겼다.

라우노는 자신의 정원에 들이닥친 새 손님들에게 다정히 말했다.

“이 저택 안에서는 저 괴물들의 눈을 피할 수 있으니 긴장 풀어요.”

“일단 감사합니다.”

시오가 일행을 대표해 꾸벅거리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덕분에 한시름 놓았습니다. 다들 미레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거든요. 저희를 도와주신 것도 감사드립니다. 신세를 졌습니다.”

라우노는 허리께에 손을 짚고 사람들을 훑었다. 그는 크게 불쾌해하는 기색은 없었지만 아까와는 달리 묘하게 선을 긋는 분위기가 풍겼다. 라우노는 미레아에게 했던 것과는 반대로 새 손님들에게는 큰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음…… 저는 크게 신경 쓰지는 않습니다만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건가요?”

라우노의 질문에 시오가 일행들의 눈치를 살폈다. 아까부터 상황을 관조하던 리비엘로가 턱 짓을 하자 시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 이상 폐를 끼치지 않고 바로 떠나겠습니다.”

“그것도 저는 상관없습니다만 지금은 저 괴물들이 활동하는 시간이에요.”

“언제쯤이면 없어질까요?”

“내일 새벽이요.”

비명만 지르지 않았을 뿐 세 사람이 보인 반응은 미레아가 했던 반응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그, 그렇게 오래 있을 순 없어요.”

“당장 돌아가야 한단 말입니다.”

라우노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현관문 옆으로 비켜섰다.

“지금은 어쩔 수 없으니 당신들도 안으로 들어와서 머리 좀 식히고 있으세요. 당신들을 대접도 하지 않고 내쫓을 생각이었으면 구해 주지도 않았을 테니 부담 갖지 마시고요.”

“그래, 안에 들어가서 대책 회의라도 하자. 응?”

미레아가 아리스와 시오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 걷게 했다. 미적거리며 걷는 둘의 뒤를 리비엘로가 조용히 따랐다. 미레아는 그런 리비엘로에게 넌지시 언질을 주었다.

“저 사람, 데르카이드라서 서리 여신은…….”

“알아. 조심할게.”

리비엘로는 미레아가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겠다며 최대한 존재감을 감췄다. 라우노는 미레아에게 했던 것처럼 그들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응접실을 들어갈 때 훼손된 성화를 보고 리비엘로가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들이 앉자 라우노는 손님들을 대접할 차가 부족하다며 자리를 비웠다. 일행들은 각자 지친 몸을 응접실 소파에 기대고는 제각각 여러 의미가 담긴 긴 한숨을 토해냈다. 미레아는 대역죄를 지은 죄인의 심정으로 조마조마하게 말했다.

“파울로가 화 많이 났어?”

“…….”

“…….”

“…….”

일행들은 대답 없이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결국, 아리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니, 아직은…….”

“‘아직은’이라니? 화가 났다는 거야, 안 났다는 거야?”

“이 상황을 알고 있어야 화를 낼 수 있는 거 아니겠어?”

미레아는 설마설마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혹시 파울로한테 말도 없이 나를 찾겠답시고 이곳에 셋이서만 들어온 건 아니겠지?”

일행들은 다시 침묵했다. 미레아는 띵하게 울리는 뒷골을 붙잡았다.

“나한테 잔소리할 처지가 아니었잖아!”

“그럼 어떡하냐! 네가 행방불명이었는데! 먼저 마을로 간 파울로한테 연락할 시간이 없었단 말이야!”

아리스의 변명에 시오가 옆에서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난 말렸다.”

“그럼 밖에 있는 일행들은 우리 상황을 전혀 모르는 거네?”

“아마도. 그러니 우리 외에 외부에서 지원이 오는 걸 기대했다면 꿈 깨.”

“큰일 났다. 우리는 파울로한테 죽었다.”

“라케드가 없어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리비엘로가 한 지나가는 말에 라케드였다면 죽는 것보다 더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을 거라며 미레아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시오는 팔짱을 끼고 미레아를 위협적으로 내려다보았다.

“다 네 탓이잖아.”

“죄송합니다. 반성 중입니다.”

미레아는 구질구질한 변명 따위는 하지 않고 다시 사과했다.

“사냥개라 불리던 미레아 제인스터도 한물갔구나. 고작 원숭이 하나 잡지 못하고.”

“아악! 짜증 나! 그 원숭이 다음에 보면 복수할 거야! 나를 우롱한 죗값은 외상으로 달아 두마!”

시오의 빈정거림에 미레아가 이를 벅벅 갈았다.

“그래도 쉴 마을을 찾았다니 그건 다행이야. 어서 돌아가야 하는데…….”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사실 그 마을이 좀 이상해.”

미레아와 리비엘로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아리스가 화제를 돌렸다.

“그 얘기는 여기를 빠져나간 다음에 해. 지금은 우리 코가 석 자야. 저 사람 진짜 수상해. 대체 뭐 하는 사람이지? 이런 곳에서 혼자 사는 게 말이나 되냐고. 이름이 뭐라 그랬지?”

“라우노 듀랜트.”

“루아드식 이름과 성씨가 아니야.”

타국 출신인 다른 사람들은 루데키아스나 라우노나 그게 그거라 생각했지만 아리스는 위화감이 들었다.

“루아드 출신이 아닌 것 같은데 여기는 어떤 연유로 왔는지 들은 거 있어?”

미레아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라우노 씨 말로는 여기저기 떠돌다 6년 전쯤에 이곳에 정착했는데 부식 지역 안쪽은 데르카이드에게 가장 안전한 장소래. 아리스, 너야말로 뭐 아는 거 없어?”

“그게 무슨 소리지? 난 처음 듣는데…….”

미레아는 라우노가 설명해 주었던 내용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했다. 정작 아리스는 무슨 헛소리냐는 표정으로 듣고 있는데 리비엘로가 손 위에 턱을 괴며 말했다.

“일리 있는 말이긴 해. 자신을 신이라고 표현한 건 오만하긴 하지만. 보비네는 몇 천 년 전에 잠들었기 때문에 영향력이 미비하지, 부식지역 안쪽의 서리 여신의 영소와 다른 자연계 영소들은 고갈되었지. 그렇다면 부식 지역 안쪽에서 가장 영소가 많은 것이 데르카이드라면 규모는 작아도 여신과 비슷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

아직도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셋에게 리비엘로가 손을 저었다.

“어디까지나 이론상이고 실제로 적용할 수 있는지는 나도 모르지만 말이야.”

때맞춰 라우노가 시원하게 얼음을 띄워 냉침한 차를 우린 찻주전자와 찻잔을 받친 쟁반을 들고 돌아왔다. 나누고 있던 대화 주제가 주제였던 지라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하실지 계획은 세우셨나요?”

조금 전까지 시답지 않은 말다툼에 정보 공유하기 바빴기 때문에 미레아의 일행들은 고개를 저었다. 라우노는 빈 의자에 앉아 일행들에게 찻물이 담긴 찻잔을 돌렸다. 하지만 미레아가 그랬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 역시 바로 차를 마시지 않고 라우노에게 궁금하던 것들을 묻기 시작했다.

“저 괴물들은 내일 새벽이면 없어지는 게 확실한가요?”

그들은 응접실 창밖으로 보이는 호수를 바라보았다. 얼어붙었던 호수와 괴물들이 조금씩 녹으며 괴물의 몸에서 얼음덩어리가 조각나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괴물들이 다시 움직이는 것은 시간문제였고 시야에 들어오는 괴물들 말고도 다른 곳을 돌아다니고 있는 괴물들도 문제였다.

“지금까지 제 경험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시간이 되면 다들 호수로 돌아가 다시 며칠 정도 잠들어요.”

라우노의 말에 시오가 고개를 저었다.

“누누이 말하지만 저희는 그렇게 시간이 많지 않아요. 밖에 남은 일행들과 빨리 합류해야 하거든요.”

“저는 잠시 도와드렸을 뿐, 여러분이 떠나신다고 하면 그 의견을 꺾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그래도 말리고 싶군요.”

사실 라우노가 마법으로 괴물들을 얼린 것을 본 아리스는 자신도 그렇게 할 자신이 있었다. 리비엘로의 설명대로라면 이 안에서 마법을 쓰는 것은 외부에서 쓰는 것보다 더 쉬웠다. 거기에 리비엘로의 신성력이 더해지면 괴물 밭이라 해도 그럭저럭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 앞에서 사실 자신이 라우노처럼 데르카이드고 저쪽의 여자는 신녀라는 사실을 밝힐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적당한 핑곗거리가 필요했다.

“듀랜트 씨께서 도와주실 수 있나요?”

아리스의 뻔뻔한 요구에 미레아가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남들이 양심에 찔려서 하지 못한 요구를 당당하게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 바로 아리스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지금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저분밖에 없는 걸.”

아리스는 자신의 정강이를 쓰다듬으며 투덜거렸다. 라우노는 그들을 재미있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아마 제 도움으로 부식 지역을 어렵지 않게 빠져나갈 수는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에 따른 보상은 섭섭지 않게 해 드리겠습니다. 안 될까요?”

아리스의 말에 시오는 귀에서 돈 나가는 소리가 짤랑짤랑 들리는 것 같았다. 아까 마을에서도 저런 말을 했었지 말이다. 세피로스가 아낌없는 지원을 약속하긴 했지만 이렇게 돈을 뿌리고 다니란 뜻은 아니지 않나. 애초에 아리스는 협력 관계이지 라슈발렌 소속이 아니라 지금처럼 무언가를 결정할 권한이 있지도 않고 말이다.

라우노는 조금 고민하는 듯하다 말했다.

“저는 금전적인 보상은 필요 없습니다.”

미레아와 일행들은 긴장했다. 현금처럼 깔끔하게 거래를 끝낼 수 있는 수단은 몇 없었다. 그들은 최대한 은밀하게 흔적을 남기지 않으며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처지였다. 현금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 거래 수단이었고 대체로 깔끔하게 끝날 수 있으니 그들이 선호하는 수단은 당연히 현금 거래였다. 어처구니없는 제안을 한다면 차라리 거액을 요구하는 쪽이 더 부담 없을 수도 있으므로 금전적인 보상 대신이라는 말은 오히려 그들에게 달갑지 않은 말이었다.

“마석이 있다면 제게 주실 수 있나요?”

라우노의 말에 리비엘로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가방에 눈길을 주었다. 리비엘로에게는 추론기의 동력으로 쓰던 마석이 있었다. 거기에 시오 역시 마탄을 사용할 때 보조로 쓰는 마석이 있었다.

라우노는 아주 찰나였지만 그 둘의 눈동자가 움직이는 것을 포착했다. 아리스는 리비엘로와 시오가 마석을 갖고 있다는 것을 라우노가 알아챘다는 것을 눈치채고 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죄송하지만 한 가지 여쭤 봐도 될까요? 데르카이드가 마석이 필요한 이유가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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