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55화 (55/257)

55화.

라우노는 저택의 응접실로 미레아를 안내했다. 지도를 찾는 동안 쉬고 있으라며 라우노가 내준 냉차를 미레아는 혼자 수상쩍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에 대지 않기로 결정하고 대신 자신의 수통에 있던 물을 홀짝이며 미레아는 응접실을 어색하게 두리번거렸다.

응접실은 지저분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세심한 손길을 받진 못했던 듯 여기저기 보수가 필요해 보였다. 혼자 산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미레아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선함과 호의를 믿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는 건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다. 라우노가 마냥 좋은 사람이면 좋겠지만 그래도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이다. 목숨을 구해 줬다고 덥석 경계를 푸는 것은 아직 일렀다.

미레아가 별다른 이유 없이 라우노와 동행한 것은 어디까지나 차선책이 없었기 때문이었지 라우노에 대한 경계가 전혀 없기 때문이 아니었다. 라우노가 암만 수상하다 해도 혼자 부식 지역 안을 헤매는 것보다 라우노의 옆에 있는 게 더 위험할 것 같지는 않았다.

응접실에서는 저택 옆의 호수가 한눈에 들어왔는데 위험하단 설명을 들었어도 미레아의 눈에는 평범한 호수처럼 보였다. 물은 사람의 마음을 잡아끄는 힘이 있었다. 바닷가 도시에서 사는 미레아는 그것을 잘 알았다.

미레아는 멍하니 호수를 바라보았다. 호수는 지나치게 고요했다. 물고기나 다른 수생동물이 살지 않아 더 그렇게 보이는 것이었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격정적인 바다에 익숙한 미레아는 그것이 제법 신기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한참이나 호수를 바라보았다.

미레아는 응접실 정 중앙에 걸려 있는 커다란 액자 앞에 섰다. 원래는 인물화가 그려져 있었던 것 같은데 그림 속 인물의 얼굴 부분의 캔버스가 거칠게 찢어져 있었다. 남아 있는 부분은 일부분이었지만 등 뒤로 흐르는 흑갈색의 머리카락, 그리고 인물의 손에 들고 있는 기다란 석장(錫杖)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석장은 갖가지 보석들로 꾸민 화려한 장식이 올려져 있었다. 부드럽게 주름이 잡힌 치마 아래로 드러난 하얀 발은 맨발이었다. 미레아는 캔버스를 훑어보고 다시 인물의 얼굴이 있던 자리를 응시했다.

저것은 분명 서리 여신이었다. 미레아는 손상된 성화(聖畫)를 보며 입맛을 쩝 다셨다. 치우지 않고 굳이 이런 식으로 방치한 행위는 신성모독의 의도가 다분했다. 하지만 미레아는 라우노를 비난하고 싶지 않았다. 아리스와 비슷한 이유로 싫어하는 것일까.

얼추 구경을 마친 미레아가 응접실 소파에 앉자 때맞춰 라우노가 지도를 가지고 돌아왔다. 라우노는 미레아의 앞에 있는 탁자에 지도를 펼쳤다.

“아, 제가 마지막으로 있었던 곳이 여기예요.”

미레아가 손가락으로 짚어 내자 라우노는 현재 위치를 지도에 표시해 주었다.

“지도상으로는 가깝지만 실제로 그곳까지 가는 건 상당히 어려울 거예요. 아까 미레아 씨가 떨어진 절벽이 그랬듯, 이 지역 안에서는 지형이 변하거나 눈에 보이는 정보가 전부가 아닌 경우가 많으니까요. 다시 길을 잃을 가능성이 커요.”

미레아는 손 위에 턱을 올리고 생각에 잠겼다.

“골치 아프네요.”

“무슨 고민을 그렇게 하세요?”

“어떻게 해야 한시라도 빨리 빠져나갈 수 있을까요?”

미레아가 라우노를 바라보자 그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그야 미레아 씨 혼자서는 무리죠.”

“그런가요? 그럼 대체 어떻게 해야…….”

미레아의 말에 라우노가 의아하단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미레아 씨, 아까 제가 말했잖아요. 부식 지역 안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그는 미레아가 입도 대지 않은 찻잔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까지 말했는데 이 지역을 제 도움 없이 빠져나갈 생각이었어요? 불가능할 텐데. 제가 도와드릴게요.”

“앗, 정말요?”

“네, 저는 이 땅의 신입니다. 그러니 미레아 씨의 편의를 봐 주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지요.”

도와주겠단 말에 반색하며 라우노를 바라본 순간 미레아의 육감이 그녀에게 경고를 내렸다. 아까와 같은 얼굴, 같은 태도, 같은 어조인데도 불구하고 라우노의 기색이 뭔가 이상했다.

친절한 목소리에 걱정 가득한 얼굴. 라우노의 말대로 데르카이드의 도움이 있다면 부식 지역 정도는 금방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라우노의 호의를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문제는 그가 왜 호의를 보이냐 하는 것에 있었다.

라우노는 사람을 싫어했다.

이 세계를 부정했다.

서리 여신을 모욕했다.

그런데 만난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은 자신에게 왜 저런 호의를 보이는 것일까. 미레아는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알 수 없기에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미레아는 최대한 감정을 내비치지 않고 말했다.

“저는 극한 상황에서도 생존 훈련을 받은 정예 요원이에요. 걱정은 감사합니다만, 무조건 라우노 씨에게 의지할 생각은 없어요. 어떻게 해야 저 혼자서도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을지 최대한 궁리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라우노가 이 땅의 신이란 것을 자처한다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미레아를 움직이는 것쯤은 일도 아닐 것이다. 자존심 상하지만 미레아는 최대한 라우노의 비취를 맞추는 수밖에 없었다.

“음…… 제가 싫다 해도 혼자 떠날 건가요?”

“…….”

라우노가 거리낄 것이 없다는 듯 직설적으로 말하는 통에 이번에는 표정 관리가 잘 안 됐다. 그것을 자각하여 속으로 혀를 차는 미레아에게 라우노가 눈썹을 늘어트리며 손을 내저었다.

“하하, 방금 말은 농담이에요.”

미레아는 라우노를 따라 웃으며 물었다.

“하지만 걱정스러워서 혼자 보내 드리기 걱정스러운 건 맞아요.”

“라우노 씨는 사람을 싫어하시지 않았나요? 그런 것치고는 저에게 너무 잘해 주시네요.”

“네, 싫어요. 하지만 당신은 싫지 않아요. 싫었다면 처음부터 구해 주지 않았을 거예요.”

“저를 좋게 봐 주시는 이유가 뭔가요?”

라우노는 미레아의 머리카락을 가리키며 싱글거렸다.

“제 죽은 형제도 빨간 머리였어요.”

그 말에 난처해진 미레아는 볼을 긁적거렸다. 라우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당신을 처음 봤을 때 제 형제가 생각났거든요. 제 호의를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마세요.”

“하지만…….”

여전히 망설이는 미레아에게 라우노는 응접실 한구석에 세워 둔 낡은 괘종시계를 확인하더니 창밖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제가 걱정스럽다고 말한 이유가 마침 나타날 때가 됐네요.”

그 말에 미레아가 창 너머의 호수를 보니 잔잔하던 호수 표면에서 작은 파문이 일고 있었다. 파문은 이내 태풍이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 있는 것 같은 거친 파도로 변했다. 그리고 호수 안에서 거대한 검은 형체가 느리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어마어마하게 큰 짐승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는데 목이 길고, 뾰족한 주둥이에 등줄기를 따라 기괴한 모양의 돌기들이 돋아 있었다. 몸은 검은색과 주홍색의 털이 나 있는데 몸 전체에 고르게 돋지 않고 드문드문 붙어 있어서 마치 누더기 카펫을 덮은 것 같았다.

미레아는 그 괴물의 두 눈이 있어야 할 자리가 뻥 뚫려 있고 앞다리 근육이 반쯤 없어서 뼈가 보이는 것을 보고 기겁했다. 심지어 한 마리가 아니었다. 처음 모습을 내보인 괴물을 따라 그보다 작지만 비슷하게 생긴 것들이 줄지어 나오기 시작했다. 저도 모르게 창가에서 한 발짝 물러난 미레아는 라우노에게 물었다.

“마수가 살지는 않는다고 하셨잖아요! 저건 대체 뭐죠?”

“옛날에 이 땅에 살던 고대의 신수예요.”

“신수요? 그런 건 전설로만 있는 게 아니었나요? 저런 게 있다는 말은 듣도 보도 못 했어요!”

“처음 보는 게 당연하죠. 지금은 잊힌 존재들이니까요. 그리고 저것들은 지금 살아 있는 게 아니에요. 영혼은 흩어지고 이 땅에 잔류 된 의지에만 반응해 움직이는 것이거든요.”

“말도 안 돼…….”

“뭐, 이곳이 부식된 땅이라 가능한 일이에요. 저 신수들은 한때 위대한 보비네의 자식들이었죠. 지금은 서리 여신의 영소가 주가 되는 땅을 맴돌던 정신계 물질이 고갈되니 지금까지 억눌려 있던 고대 존재들의 오래된 영소가 깨어난 거예요. 그것들은 지금은 땅속에서 잠에 빠진 보비네가 주관하는 영소니까요.”

라우노가 고대의 신수라고 설명한 그 괴물은 호숫가 쪽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괴물의 움직임에 따라 물이 출렁거리고 공기가 울렸다. 괴물들은 마른 땅을 밟고는 쿵쿵거리며 호숫가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저게 나온 이상 집 밖으로 나가면 위험해요. 이 집은 제가 보호하고 있어서 괜찮지만, 밖은 아니거든요. 만약 미레아 씨가 제 도움 없이 혼자 돌아다녔다면 저것에게 해를 당했을 거예요.”

“밖으로 나가면 어떻게 되는데요?”

“밟혀 죽지 않을까요?”

대수롭지 않다는 목소리로 대꾸하는 라우노에 반해 미레아는 얼굴이 굳었다.

“보비네가 잠에 빠지고, 서리 여신의 제약도 받지 않는다면 지금 보비네의 영소를 통제할 방법이 없어요. 서리 여신의 영소를 지닌 인간들은 저들에게 있어서 이질적이죠. 아마 적으로 간주하지 않을까 싶네요.”

“데르카이드의 영소도 인간이랑 똑같은데 이 집은 어떻게 무사한 건가요?”

“말했잖아요. 이 공간 안에서 제 권한은 무궁무진하답니다. 저런 시체들의 눈을 피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에요.”

“그럼 저는 어떻게 돌아가죠?”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 마세요. 저것들은 이 주변을 맴돌다 시간이 되면 다시 호수 속으로 들어가 잠들거든요.”

미레아는 안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언제쯤인가요?”

“아마 내일 새벽 해가 뜨기 전이요.”

“안 돼요!”

미레아가 꽥 소리 질렀다.

“이미 일행과 떨어진 지 제법 시간이 흘러서 당장 돌아가야 하는데 내일 새벽까지 발이 묶여 있을 수만은 없어요!”

“하지만 어쩔 수 없는걸요.”

“이 지역 안에서 라우노 씨의 힘은 무궁무진하다면서요. 저것들 눈에 띄지 않고 저를 밖으로 내보내는 건 불가능한가요?”

“불가능하진 않아요.”

그 말에 화색이 돈 미레아가 다른 요구를 하기 전에 라우노가 선수 쳤다.

“상당히 귀찮을 뿐이죠.”

그런 얘기까지 들었는데 뻔뻔스럽게 기왕 도와주는 거 끝까지 도와 달라 우길 수 없었다. 아연한 표정으로 시들거리는 미레아와는 반대로 라우노는 오랜만에 본 손님이라며 신이 난 듯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저녁이라도 함께하시겠어요?”

저녁으로는 돼지고기와 생선 요리 중 어느 쪽이 좋은지 물어보던 라우노가 잠시 멈칫했다.

“이런. 다른 손님들이 또 있나 보네요.”

라우노는 미레아를 손님이라 말할 때는 밝은 얼굴을 했으면서 이번 손님은 그다지 탐탁지 않은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미레아가 무슨 뜻인지 물으려던 순간 밖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쿵 하는 소리와 총소리가 번갈아 가면서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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