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54화 (54/257)

54화.

“우와, 이런 곳에 호수가 다 있네요.”

“아아, 호수 가까이 가지는 마세요. 마수가 산다거나 하진 않는데 깨끗한 물이 아니다 보니 몸에 닿았을 때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모르거든요. 저는 데르카이드라 저 물을 정화해서 식수로 써도 될 정도로 괜찮지만 보통 인간은 다르잖아요.”

그 말에 신이 나서 호수에 달려가려던 미레아는 방향을 바꿔 라우노의 뒤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큰 집을 혼자서 관리하기 힘들다 보니 좀 지저분해서 숙녀분을 들이기 쑥스럽네요.”

“아뇨, 괜찮아요. 우리 집도 관리를 안 해서 정말 지저분했거든요. 그거에 비하면 이 정도는 지저분한 축에도 못 끼죠.”

미레아는 얼른 손을 휘휘 내저었다. 라우노의 저택은 적어도 정원이 정글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풀 한 포기 나지 않은 빈 곳만 있을 뿐이었다. 부식이 진행된 땅에는 아무것도 자랄 수 없으니 당연하였다.

“그럼 들어오시겠어요?”

정원을 가로질러 손수 삐걱거리는 현관을 열어 주며 라우노가 싱긋 웃었다. 미레아는 별다른 말 없이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 * *

“너무 늦네.”

아리스는 지프 주변을 서성거리며 중얼거렸다. 시오는 손목시계를 확인하더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직 해가 지려면 시간이 좀 남았지만 그래도 마냥 넋 놓고 있기엔 미레아가 자리를 비운 시간이 한 시간을 넘어가고 있었다.

“역시 무슨 일이 생겼다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여태 감감무소식인 게 말이 돼?”

“찾으러 갈까?”

아리스의 말에 차체에 턱을 괴고 있던 리비엘로가 상체를 바로 했다.

“그러다 서로 길이라도 엇갈리면 어떡해?”

“그렇다고 여기서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잖아. 미레아는 한 시간이나 아무 연락 없이 자리를 비울 애가 아니야.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해.”

“그럼 내가 발자국을 추적해 볼게. 미레아가 돌아올 때를 대비해서 너희는 여기서 기다려.”

호신술이나 겨우 흉내 낼 수 있는 리비엘로를 홀로 남겨 둘 수 없었기 때문에 셋 중에 시오가 홀로 나섰다. 미레아의 발자국은 비포장도로 위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에 추적이 어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숲으로 이어지자 조금 애를 먹었다. 발자국은 벼랑에서 끊겨 있었다. 그 벼랑은 부식된 땅과 경계부에 있었기 때문에 시오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시오가 무전으로 상황을 알리자 아리스가 바로 그가 있는 위치에 지프를 몰고 도착했다.

“너희는 내가 기다리고 있으랬잖아!”

시오가 타박하자 아리스도 짜증을 냈다.

“미레아가 만약 돌아와서 엇갈린다 쳐도 걔가 바보가 아니면 우리 흔적을 쫓아오겠지! 그나저나 설마 여기서 추락한 거야?”

셋은 벼랑 끝에서 까마득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미레아!”

있는 힘껏 아래쪽을 향해 미레아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아리스가 자신의 재킷을 벗고 날개를 꺼내며 말했다.

“내가 내려가 볼게.”

“그만둬. 우리끼리 부식 지역 안으로 들어갈 순 없잖아.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그러는 미레아는? 저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내버려 둬?!”

검은 날개를 펼친 아리스의 목소리에서 초조함이 묻어 나왔다. 리비엘로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아리스를 진정시켰다.

“내게 방법이 있어.”

그 말에 반신반의하며 숲의 경계에 세워 둔 지프로 돌아온 셋은 리비엘로가 자신의 짐 가방에서 기계장치를 꺼내는 것을 구경했다. 그것은 꼭 타자기처럼 생겼는데 타자기의 자판보다 세배 정도는 더 많은 버튼이 있었다.

“어쩔 수 없네.”

리비엘로가 지프의 보닛 위에 그것을 올려놓고 팔을 걷어붙이자 처음 보는 기구에 시오와 아리스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양옆에 섰다.

“그게 뭐야?”

“일종의 계산을 도와주는 마도 기구야.”

리비엘로가 마도 기구의 옆에 튀어나온 태엽을 감자 찰칵찰칵하는 마찰음이 나더니 빈 슬롯이 튀어나왔다. 리비엘로는 다른 주머니에서 손톱만 한 마석을 꺼내 그곳에 끼워 넣었다.

“서리 여신의 신녀가 그런 거 써도 돼?”

아리스의 물음에 리비엘로는 피식 웃었다.

“나니까 쓰는 거야.”

“그런데 계산이라니 어떤 걸 말하는 거야?”

시오도 처음 보는 물건인 듯 리비엘로에게 꼬치꼬치 물었다.

“지금부터 약 한 시간 전 과거에 있었던 일을 역산하여 풀어 볼 거야. 이 마도 기구의 정식 명칭은 ‘다발성 의지 유속 통합 추론기’야. 원래는 예지의 용도로 쓰는 기계지.”

“……무슨 용도라고?”

아리스가 눈을 껌벅거리며 다시 물었다. 시오의 반응도 별다른 바 없었다.

“뭐? 예지하는 기계?”

“그래.”

“그게 가능해?”

“상당히 복잡한 계산을 해야 하고 그마저도 정확도가 많이 떨어지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가능해.”

“하지만 서리 여신이 내려 주는 예언이 있잖아. 여신의 예언이 있는데 굳이 기계까지 써 가면서 예지를 왜 해야 해?”

시오의 질문 공세에 리비엘로는 잠시 손을 멈추었다.

“예언과 예지는 아주 달라.”

그러더니 아리스와 시선을 맞추었다.

“아리스, 사실 이건 너와도 관련이 있는 이야기라 언젠가는 짚고 넘어가야 했어. 하지만 지금은 미레아를 찾는 게 더 중요하니 이것과 관련된 설명은 조금 뒤로 미룰게. 미안해.”

아리스는 영문을 알 수 없단 얼굴로 리비엘로를 한동안 지그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 기계는 미래를 예지하는 기계지. 작동 원리는 생각보다 간단해. 이 세상의 의지가 흐르고 있는 방향을 계산하면 되거든. 세계의 의지가 흐르는 대로 사건 사고가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야.”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나중에 더 자세히 설명해 줄게. 하지만 그렇게 어려운 개념은 아니야. 생각해 봐. 미래의 일을 계산할 수 있다면, 그걸 역산하면 과거의 일도 알 수 있지 않겠어?”

“그러네.”

“그걸로 정말 알 수 있겠어? 아까 정확도가 많이 떨어진다 그랬잖아.”

“그렇긴 한데 딱 한 시간 전, 미레아 한 사람의 일만 추적하는 거야. 그러면 정확도가 조금 올라가지. 하지만 원래 개인의 과거를 역산하려면 그 사람의 의지가 닿았던 마석이 있어야 해.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주변 환경의 마력으로 이 일대에 있었던 일을 추측하는 수밖에…… 쉬운 일은 아니야.”

리비엘로는 밀봉된 봉지를 뜯어 얇은 필름지처럼 생긴 것을 꺼냈다. 그리고 신성력을 불어넣자 필름지 위에 문양이 나타났다. 필름지를 기계에 삽입하고 리비엘로의 긴 손가락이 자판 위를 바삐 움직였다.

부품끼리 맞물리며 내는 찰칵거리는 금속음이 두다다 이어졌다. 마도 기구 주변으로 마석이 일으킨 스파크가 통통 튀었다. 리비엘로는 긴 머리카락이 가슴 앞쪽으로 흘러내리는 것을 손으로 빗어 넘기며 작업에 열중하였다.

타자를 칠수록 긴 종이가 줄줄 뽑혀 나왔다. 종이 위에는 수식과 도형이 인쇄돼 있었는데 아리스와 시오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도 못 했다. 리비엘로가 타자를 멈추고 어느새 길이가 제법 길어진 종이를 끊어서 속삭였다.

“들려주지 않으련?”

시오에게는 들리지 않았지만, 아리스에게는 온갖 소리가 뒤섞인 잡음이 귀에 울렸다. 무심코 귀를 틀어막자 리비엘로가 물었다.

“혹시 들렸어?”

“이상한 노이즈라면 이명처럼 울리는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

“무슨 소리?”

시오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원래는 시오처럼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게 정상이야. 아리스는 마력에 예민하게 반응해서 역산한 결과가 들린 것이지만 판독하는 법을 훈련받지 않아서 잡음으로만 들리는 거고.”

“그래서, 알아냈어?”

“여기서 떨어진 것은 맞지만 무사한 것 같아. 누군가 도와준 사람이 있네. 그런데 그 사람이…….”

리비엘로는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데르카이드야.”

그 말에 시오와 아리스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시오는 반신반의하는 얼굴이었다.

“데르카이드라니…… 확실해?”

“아니. 솔직히 정확도가 많이 떨어지는지라 지금 단계에선 확신할 수 없어도 정황상 데르카이드인 것 같아.”

리비엘로의 대답에 아리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보다 데르카이드면 이 위로 올라오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텐데 왜 아래로 갔지?”

아리스가 여러 가지 가설을 생각하고 있는데 시오가 그의 상념을 깨트렸다.

“그래서? 그다음은 어떻게 됐어?”

“미레아는 도와준 사람이랑 함께 움직였나 봐. 어디로 갔는지도 얼추 알았어. 너희가 발견한 마을이 있는 방향은 아니긴 해도 미레아의 상태는 괜찮아 보여.”

그 말에 아리스의 얼굴이 활짝 폈다.

“어쨌든 무사하긴 한 거지? 그럼 아래로 내려가자.”

“하지만 우리끼리 괜찮겠어?”

“미레아와 그 데르카이드가 괜찮다면 우리가 안 괜찮을 건 뭔데?”

“파울로 대장이 허락해 주지 않을 거야.”

“파울로 대장이? 미레아가 없어졌는데? 말이 되는 소리를 해. 파울로 대장이 미레아를 얼마나 싸고도는데 허락하지 않을 리 없어. 오히려 더 난리 난다 쪽에 500펠 건다.”

“그럼 최소한 허가라도 받아야…….”

“너희들 잊고 있는 모양인데, 파울로 대장이랑 무전 가능한 범위에서 벗어난 지 오래야. 연락하려면 아까 있던 자리로 돌아가야 해.”

리비엘로의 지적에 아리스가 다시 닦달하기 시작했다.

“그럴 시간이 없다니까? 그리고 대장에게 허락을 받나 안 받나 결과는 똑같을 것 같은데 그런 번거로운 짓을 왜 해.”

“너 자꾸 막무가내처럼 굴래? 지금까지 네가 어떤 식으로 행동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도 우리의 체계가 있고 방식이 있단 말이야.”

“체계와 방식이 있다 해도 항상 예외란 것이 있기 마련이야. 그리고 내가 봤을 땐 지금이 그 예외적인 상황 같거든.”

시오와 아리스가 입씨름하는 것을 잠자코 듣고 있던 리비엘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스 말대로 괜찮을 것 같아. 대책 없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우리 쪽에도 데르카이드가 있으니 뒤바뀐 법칙에도 대응할 수 있을 거야. 무엇보다 미레아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랑 같이 있는 것도 신경 쓰이고…….”

리비엘로의 지원에 아리스가 들었냐는 표정으로 시오를 바라보자 그는 난처함에 자신의 머리를 헝클었다. 리비엘로는 절벽의 높이를 가늠하며 말했다.

“아리스, 마법으로 우리를 내려 줄 수 있겠어?”

“그건 일도 아니지. 그런데 맨몸으로 움직일 수 없으니 일단 차로 돌아가지 않을래?”

“차? 차도 내리려고?”

“당연하지. 걷는 건 한계가 있잖아.”

아리스는 의아하게 묻는 둘을 지프에 태우고 자신은 운전대를 잡고 앉았다. 뒤늦게 불길한 기운을 느낀 시오가 뒷좌석에서 아리스의 어깨를 잡았다.

“야, 잠깐. 뭐 하려는 거야?”

“둘 다 안전벨트 맸지? 꽉 잡아.”

아리스는 기어를 넣고 액셀을 힘껏 밟았다. 난폭하게 출발한 지프는 그대로 절벽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렸다. 리비엘로와 시오는 아리스가 하려는 짓을 깨닫고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외쳤다.

“야, 이 미친 자식아!”

지프가 절벽 위에서 멋진 포물선을 그리며 날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