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그러면 저는 여기서 어떻게 나가야 하죠?”
“여기가 어디인 줄은 알고 있나요?”
“아니요. 일행이 있던 위치는 지도를 봐 둬서 아는데 제가 여기까지 앞뒤 생각하지 않고 달려오다 보니 지금 위치가 어디인지는 잘…….”
낙담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는 미레아에게 라우노가 말했다.
“뭐, 지도를 봐도 실제로 지도대로 나갈 수 있는 길이 있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니 일단 이 지역을 벗어나는 게 좋을 거예요. 부식 지역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지형이 어떻게 변할지는 저도 예측할 수 없어요. 제가 이 지역 안에서는 신이라 해도 예지 능력이 있는 건 아니라 대응은 할 수 있어도 미리 알고 움직이는 건 불가능하거든요. 그보다 바로 돌아갈 생각인가요?”
“네, 제 동료가 저를 찾고 있을 거예요.”
“그렇군요. 그렇다면 혹시 다른 연락 수단이 없나요?”
“사실 통신기가 있었는데…… 잃어버렸어요.”
“어차피 무선으로 작동하는 통신기가 있다 해도 이 안쪽에서는 전파가 교란될 거예요. 무용지물이란 소리죠. 부식 지역 안쪽에서는 외부와 소통하기 힘들어요.”
“네? 그럼 저는 어떡하죠?”
사색이 된 미레아에게 라우노는 뜻밖의 제안을 했다.
“우리 집으로 가시는 건 어떤가요? 지금 상당히 지쳐 보이는데 조금 쉬고 체력이 돌아오면 지도를 빌려 드리지요. 일행들이 있던 장소는 알고 있다 하니 부식 지역을 빠져나가 지도를 보면 금방 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정말요?”
미레아는 황송해 죽을 것 같았다. 미레아는 앞서 라우노를 미친놈 취급한 것을 잠시 철회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하늘에서 내린 사자쯤 되는 게 아닐까 싶어 라우노를 우러러보았다.
“네, 그리고 혼자 돌아다니다 큰일 날 수 있으니 일단 안전한 곳으로 가시죠.”
“그럼 부탁드립니다.”
미레아가 사양하지 않고 냉큼 고개를 꾸벅이자 라우노는 웃으면서 몸을 돌렸다.
“저를 따라오세요.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잘 쫓아오셔야 합니다.”
미레아는 속으로 안도하며 앞서 걷기 시작한 라우노를 쫓아가며 물었다.
“라우노 씨가 사는 곳은 마을인가요? 그렇지 않아도 쉴 만한 마을을 찾고 있었거든요. 일행 중에 몸이 좋지 않은 사람이 하나 있어서…….”
“저는 이 안에서 혼자 살아요. 여기서 가장 가까운 다른 인가까지는 부식 지역을 나가서도 제법 가야 하고요. 걸어서 갈 수 있는 지름길이 있긴 한데 차가 지날 수 없고 험준해서 혼가 가기는 힘들 거예요.”
그 말에 미레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 이런 곳에서 혼자 사신다고요?”
“그렇게 대단할 것도 없어요. 계속 말하지만, 이 공간은 저에게 있어서 더없이 안전한 곳이거든요. 그러니까 그렇게 경계하고 불안해하지 말아요. 자꾸 했던 말을 강조하게 되잖아요.”
“아뇨, 아뇨! 경계했다기보다 어쩌다 이런 곳에서 혼자 사시게 되었나 싶어서요.”
정말 수상하네! 괜히 따라가겠다 한 게 아닐까 싶어 미레아는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미레아는 라우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원래 여기가 고향이신가요?”
라우노가 잠시 걸음을 늦추며 대답했다.
“저는 고향이라고 할 만한 곳이 없어요. 떠돌이 고아였거든요.”
“어…… 죄송해요.”
“아니에요. 아주 오래전 일이라 이젠 기억도 잘 안 나요.”
라우노는 빙그레 웃었다. 미레아는 그 웃음을 꼭 어디서 본 것 같았다. 생각이 날 듯 말 듯하여 열심히 기억을 곱씹고 있는데 라우노의 말이 이어졌다.
“저는 원래 형제도 하나 있었고 그 밖에 친구도 많았는데 어쩌다 보니 지금은 혼자가 되었어요. 몇 년 전까지 여기저기 떠돌다 이곳에 정착했고요.”
“여기서 지낸 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어디 보자…… 벌써 6년 정도 되었네요.”
5년 전에 클라인 참사가 일어났으니 이곳에 온 지 1년 만에 고초를 겪었다는 뜻이 되었다.
“미레아 씨는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을 소중히 하세요. 저는 제 곁에 있던 사람들에게 더 잘할 걸 조금 후회 중이거든요.”
“라우노 씨도 아직 늦지 않았어요. 다시 만났을 때 잘해 주면 되죠.”
“제 형제는 죽었어요. 적어도 이번 생에서 다시 만날 일은 없답니다.”
라우노가 쓴웃음을 짓는 것을 본 미레아는 자신의 주둥이를 때리고 싶어졌다.
“그리고 다른 친구는 저를 엄청나게 싫어하게 돼서 만나도 이야기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래도 잘 풀리길 바라요.”
“고마워요.”
“그런데 왜 이곳을 떠나지 않고 있어요? 클라인 바로 옆이라 마수가 많을 텐데 위험하지 않나요?”
“저는 사람이 많은 건 좋아하지 않아서…….”
라우노는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대꾸했다.
“여기는 제가 데르카이드라고 싫어하는 사람이 없거든요. 게다가 부식된 곳에는 누구도 얼씬거리지 않으니 혼자 지내기 적당하죠.”
“그래도 이런 삭막한 곳에서 혼자 살면 힘들 것 같아요.”
그 말에 라우노는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미레아 씨는 누군가에게 이유 없는 악의를 받아 보신 적이 있나요?”
맥락 없는 질문에 미레아는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라우노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당신은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을 것 같아요. 아마 좋은 부모님과 가족들에게도 사랑받으며 자랐겠지요. 친구도 많고, 인간관계도 좋고.”
미레아는 라우노의 의도를 알 수 없어 대답을 보류하자 라우노가 피식 웃었다.
“칭찬이에요. 미레아 씨의 다정하고 밝은 성격은 천성만으로 완성될 수 없거든요. 그래서 멋대로 추론해 봤어요. 미안해요. 불쾌했나요?”
“아니요. 불쾌한 정도까진 아니라…….”
“제가 왜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사람을 피한 환경에서 사는지, 미레아 씨는 아마 이해하기 어려우실 거예요.”
라우노의 말에 미레아는 한참을 말이 없다가 별안간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왜 사과를 하죠?”
미레아는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제 마음대로 라우노 씨를 제 친구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친구?”
“제 데르카이드 친구는 뭔가 대화를 많이 하기는 하는데 자기 속 내용을 얘기하는 녀석이 아니거든요. 분명히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전혀 그렇지 않고. 그렇다고 내 쪽에서 먼저 물을 수도 없고 이 이상 거리가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아서 답답해요. 그래도 나름대로 이해해 보겠다고 그 녀석 속을 멋대로 추측하고 대했는데…… 라우노 씨 역시 같은 데르카이드고 비슷한 경험이 있다면 친구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고…….”
미레아는 시무룩하게 땅을 바라보며 걸었다.
“저는 제 친구도 라우노 씨도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으면서 제 마음대로 생각하고 있었나 봐요. 방금 그걸 깨달았어요. 네, 라우노 씨 말대로 저는 당신을 이해하기 어려워요. 그래서 죄송해요.”
“역시 당신은 좋은 환경에서 자랐군요. 아, 다시 말하지만 칭찬이에요.”
라우노가 쾌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해하지 않아도 제가 사람을 싫어한다는 것을 존중해 주려고 하시니 기분이 상하거나 하지 않았어요. 부식 지역에서 혼자 지내는 게 힘들지는 않답니다. 이 안에서는 무엇이든지 제 의지대로 할 수 있죠. 멋지지 않아요? 그래서 저는 흑익 그 사람에게 감사하고 있어요. 이렇게 멋진 공간을 만들어 주었잖아요. 대단한 사람이에요.”
그 말에 미레아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것은 아리스가 가끔 내비치는 종류의 위화감이었다. 남들에게서는 느끼지 못하고 오직 아리스에게서만 느낀 그 느낌. 미레아가 그 위화감의 정체를 정의 내린 것은 상당히 최근의 일이었다.
염세주의를 넘어선 세상에 대한 증오. 라우노는 바깥 세계를 부정하고 있었다. 이것은 데르카이드들의 공통된 특성일까? 미레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에 잠겨 있다가 라우노의 경쾌한 목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저는 미레아 씨의 데르카이드 친구 이야기도 궁금하네요. 아시겠지만 데르카이드가 많지 않잖아요. 저 이외의 다른 데르카이드는 어떤가요?”
미레아는 속으로 찔끔했다. 라우노에게 자신의 친구가 이곳을 이 꼴로 만든 장본인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뭐, 의외로 평범해요. 다소 뻔뻔하고, 절 놀려 먹는 걸 좋아하고, 조금 능청스럽거나 능글맞고, 재수 없기도 하고, 비뚤어진 면도 있는데 그런 주제 말은 또 많고…….”
미레아는 라우노의 눈치를 힐끔 보고 말을 이었다.
“그래도 본성이 나쁘진 않아요. 상당히 재미있는 친구랍니다.”
“음…… 어째 칭찬보다 흉을 더 많이 본 것 같은데요.”
미레아가 까르르 웃으며 대답했다.
“원래 친구란 게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 친구분이 부럽네요.”
라우노가 웃음기를 머금고 미레아를 바라보았다.
“진실한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천군만마가 부럽지 않은 법이지요.”
“그렇게까지 거창한 사이는 아니고…….”
미레아가 민망하여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라우노의 얼굴을 살피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말씀 드려도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라우노 씨는 꼭 백익 니콜라우스 같네요.”
그 말에 라우노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제가 흰 날개를 가지고 있어서요?”
“지금까지 니콜라우스가 어떻게 생겼는지 정확하게 남은 자료는 없지만, 기록에 따르면 백익 니콜라우스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하얀 사람이라는 묘사가 많았어요. 라우노 씨도 그렇잖아요.”
그러더니 의미심장한 목소리지만 장난기가 다분한 얼굴로 덧붙였다.
“그리고 저는 그 사람이 늙지도 죽지도 않고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소문을 들었거든요.”
“이것만큼은 확실하게 말해 둘게요. 저는 니콜라우스가 아니에요.”
“에이, 아쉬워라. 진짜였다면 백익 니콜라우스와 손잡아 봤다고 손자의 손자에게까지 자랑하려 그랬는데.”
미레아가 깔깔 웃는 사이 라우노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아, 다 왔어요. 저기가 우리 집이에요.”
라우노가 가리킨 손끝에는 메마른 나무들 사이로 커다란 저택이 덩그런 하게 놓여 있었다. 혼자 사는 것치고는 지나치게 큰 집이었다. 대충 봐도 제법 역사가 있어 보이는 건물이라 미레아는 저도 모르게 입을 헤 벌렸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커다란 호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