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그렇게 얼마나 올라갔을까. 제법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았고 그만큼 많이 올라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 팔은 끊어질 것처럼 아픈데 벼랑은 끝이 없는 듯 위쪽으로 계속 이어졌다. 뭔가 이상하다 싶어 아래를 바라보니 아래 역시 까마득했다. 정말로 이동한 게 맞나 싶을 정도였다.
이대로 더 올라가다가는 최소한의 기력조차 남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검을 서로 수평이 되게 나란히 찔러 넣었다. 그리고 온몸의 힘을 쥐어짜 그 위에 발을 딛고 올라갔다. 아슬아슬했지만 두 검은 미레아의 몸무게를 버티며 꿈쩍하지 않았다. 이대로 무게 분산만 잘하면 검이 상하거나 바위가 쪼개지거나 하는 일 없이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은 힘을 좀 아껴 두었다가 다리에 쥐가 나 검 위에서 떨어질 것 같으면 그때는 다시 벼랑에 번갈아 가면서 검을 박아 넣으며 위로 이동하기로 마음먹었다. 미레아는 아직도 얼얼한 오른팔을 주무르며 한숨 돌리자 이번엔 울고 싶었다. 강한 바람이 휭 불 때마다 몸이 조금씩 휘청거리는 통에 절벽에 바싹 붙어 있어야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도 없었다.
아리스는 좋겠다. 날 수 있어서. 네가 그 어느 때보다 격하게 보고 싶구나. 하늘에 계신 어머니. 딸 좀 살려 주십시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속으로 돌아가신 어머니나 찾는 것뿐이라 그렇게 미레아는 한참을 그렇게 가만히 매달려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혹시나 마수라도 나오지 않을까 싶어 주변부 경계를 늦추지 않던 미레아의 시야에 하얀 것이 들어왔다.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마수는 대체로 전부 하얀 외양을 가지고 있다 보니 미레아는 저절로 마수가 떠올라 몸이 굳었다.
그녀는 홀스터에 차고 있는 권총이 한 정 있었지만 탄환은 일반 탄이었다. 마탄이 아니면 마수의 겉가죽에 구멍을 내기도 힘들었다. 그렇다고 여기에 매달려서 마수와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정말 눈물 나게 개 같은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생각하며 저놈이 언제 공격해 올지 가늠하고 있는데 이쪽으로 하얀 날개를 푸드덕거리면서 오고 있는 것은 놀랍게도 사람의 외양을 하고 있었다. 그것을 깨닫자마자 미레아는 소리를 꽥 질렀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거기 지나가는 데르카이드이신 분!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나 좀 살려 줘요!”
정말 다행히 미레아의 바람대로 그는 점점 가까워져 왔다. 미레아의 얼굴에 절로 웃음이 번졌다. 부모님 사랑해요. 저는 아직 죽을 때가 아니었군요.
“그렇게 소리 지르지 않아도, 처음부터 당신을 도와줄 생각이었어요.”
미레아는 자신의 코앞에서 멈춰선 데르카이드를 보고 눈을 깜박였다. 그는 공중에서 날개를 움직이지 않고 그저 정지해 있었다. 날개를 이용해 날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법이었다. 그의 주변으로 붉은색의 스파크가 타다닥 일었다. 그는 미레아를 보고 빙그레 미소 지었다.
“머리카락이 엄청 눈에 띈 덕분에 저 멀리서도 보였거든요.”
미레아에게 다가온 젊은 남자는 새하얀 날개를 가졌고 머리카락 역시 윤이 나는 백발이었다. 어깨를 살짝 넘은 길이의 머리는 반 묶음을 했다. 눈썹을 살짝 가린 머리카락 사이로 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미레아와 시선이 마주치자 눈이 반달처럼 휘었다.
“어쩌다 여기 매달려 있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 일단 급해 보이니, 자.”
그가 미레아에게 손을 뻗었다. 미레아는 길게 생각하지도 않고 그 손을 덥석 붙잡고 쪼그려 앉아 있던 검 위에 덜덜 떨리는 다리로 섰다.
“이쪽으로 오세요.”
그는 미레아의 손을 잡아끌었다. 문제는 그게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었단 점이었다. 미레아는 다리가 저려 힘이 없지만 않았어도 검 위에 서서 꿈쩍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힘이 빠진 다리가 속절없이 끌려갔다. 떨어진다고 생각해서 심장이 쿵 하고 놀랐는데 뜻밖에 발에 단단한 무언가가 닿는 느낌이 들었다.
“어…… 어어?”
미레아는 얼떨떨한 얼굴로 발을 탕탕 굴려 보았다. 마치 단단한 돌바닥을 딛고 있는 것 같았다. 마법이란 것은 알았지만 그래도 데르카이드가 마법을 쓰는 방식은 언제 봐도 신기했다.
“괜찮나요? 제가 있는 한 떨어질 일은 없을 거예요. 평범한 땅 위라고 생각하세요.”
청년의 질문에 미레아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꼼짝없이 여기서 죽나 하고 있었어요.”
미레아는 아직도 놓지 않고 있던 청년의 손을 꽉 붙잡고 위아래로 붕붕 흔들었다. 여기가 허공만 아니었어도 땅에 엎드려 절이라도 했을 것이었다. 청년은 쑥스럽다는 듯 웃었다.
“그런데 저를 보고 별로 안 놀라시네요.”
“네?”
청년은 빈손으로 자신의 등 뒤에 솟은 한 쌍의 날개를 가리켰다.
“아아, 그쪽 분이 데르카이드인 거요? 제 친구 중에도 데르카이드가 있거든요. 그래서 익숙해요. 마법을 쓰는 것도 신기하기는 한데 많이 봤어요.”
미레아의 대답에 이번에는 청년 쪽이 놀랐다.
“그런가요?”
“네. 사실 지금 잠깐 헤어진 사이 이 난리가 난 건데…….”
“저런.”
미레아가 바위에 꽂힌 두 자루의 검을 검 자루에 수거하자 청년이 말했다.
“그럼 내려가도록 하죠.”
“죄송한데 위로 올라갈 수는 없을까요? 제가 위에서 떨어진 거라 일행이 위쪽에 있거든요. 아마 저를 걱정하고 있을 거예요.”
“위쪽으로요?”
청년은 힐끔 위를 올려다보더니 난처하게 웃었다.
“저 위쪽으로는 갈 수 없어요.”
“예? 왜요?”
“벼랑에서 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은 가능하지만 반대로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면 벼랑이 끝없이 이어져요. 이곳은 부식된 땅 안쪽이다 보니 그런 일이 빈번하죠. 위로 가야 한다면 일단 아래로 내려간 다음 돌아가는 수밖에 없어요.”
“아니, 어쩐지 이상하더라니!”
미레아는 자신의 피땀 어린 노고의 시간이 억울해져서 혼자 성을 버럭 내었다.
“계단을 내려간다 생각하고 내려가세요.”
미레아는 조심스럽게 발을 아래로 뻗었다. 발끝에 무언가 닿는 느낌이 들자 반대쪽 발을 뻗었다. 청년의 말대로 눈에 보이지 않는 계단을 내려가는 것 같았다. 그는 미레아가 땅에 내려갈 때까지 손을 꽉 잡아 주었다. 마침에 흙으로 된 땅을 밟자마자 미레아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살았다…….”
사회적인 체면만 아니었으면 미레아는 자신의 은인에게 울면서 키스라도 하고 싶었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혹시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제 이름이요?”
미레아의 물음에 청년이 날개를 한번 활짝 폈다가 사라지게 만들고는 짧게 대답했다.
“라우노. 라우노 듀랜트.”
“전 미레아 제인스터예요. 다시 말하지만 정말 감사해요. 듀랜트 씨 아니었으면 진짜 죽었을지도 몰라요.”
“성보다는 라우노라고 부르세요.”
“네, 라우노 씨.”
“그리고 감사 인사는 나중에 하도록 해요. 여기는 부식 지역 안쪽이라 긴장을 놓긴 일러요.”
“아, 그렇군요.”
“혹시 다친 부분은 없나요?”
“그냥 근육이 놀란 거지 다친 부분은 없어요.”
아마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이곳저곳에 멍이 시퍼렇게 올라오겠지만 부상이라고 말하긴 민망한 정도였다.
“그 절벽에는 어쩌다 매달려 있게 된 거예요?”
사실대로 말하자니 거하게 바보짓을 했다고 이실직고해야 하는 판국이었다. 미레아는 적당히 둘러댔다.
“길을 잃고 헤매다 풀숲 뒤쪽이 절벽인 줄 모르고 굴렀어요.”
“저런.”
라우노는 미레아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저 절벽 위쪽으로는 아직 마수가 자주 지나다니는 길목이에요. 그런데 그 위를 지나던 길이었다니 정말 위험천만했네요.”
“이런, 몰랐어요.”
몸에 돋은 소름을 벅벅 긁는 미레아의 모습을 살피던 라우노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그런데 이런 곳엔 무슨 일로 오게 되었어요? 검과 총을 가진 걸 보니…… 혹시 군인?”
“뭐…… 비슷한 거예요.”
미레아가 웃으며 얼버무리자 라우노는 눈을 가늘게 떴다.
“흐음, 자세히 말하면 곤란한 종류의 이야기인가 보죠?”
미레아는 뒤늦게 경계심 섞인 태도로 물었다.
“제 정체는 그렇다 치고 라우노 씨야말로 이곳에 무슨 일로 계신 건가요? 위험하지 않나요?”
라우노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 여기는 데르카이드에게 가장 안전한 곳 중 하나예요.”
“예?”
“부식된 지역에서는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법칙이 통용되지 않죠. 그 말인즉슨, 세계의 간섭 없이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소리거든요.”
그리고 양팔을 넓게 펼쳐 보였다.
“라슈온이 위대한 보비네와 서리 여신의 세계라면, 이 땅은 저의 세계입니다.”
“하지만 마수가 있잖아요.”
“이 지역은 부식이 진행된 지 오래라 마수도 떠났어요. 마수도 먹을 것이 남지 않은 땅에는 흥미를 잃기 마련이거든요. 가끔 한두 마리씩 나타나기는 하지만 위협이 될 정도는 아니에요. 말했듯 이 땅의 신은 저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마수 따위를 해치우는 건 문제도 아니죠.”
“신…….”
수상하다. 미레아는 겉으로 티 나지 않게 라우노의 모습을 요모조모 살폈다. 그는 셔츠 위에 얇은 겉옷을 걸치고 통이 넓은 편한 바지 차림이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검과 화기를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자신의 모습에 비하면 이쪽은 아무리 봐도 집 근처를 산책이라도 하는 듯한 행색이었다.
아리스가 맨손으로 마법을 쓰는 것은 자주 보긴 했지만 마수나 적을 상대할 땐 힘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검과 다른 무기를 보조로 쓴다. 라우노가 데르카이드라 해도 아무것도 없이 이런 부식 지역 한복판을 어슬렁거리는 건 상당한 부담을 줄 수 있는 행동이었다.
거기에 말하는 건 또 어떤가. 자기가 신이래. 미쳤나 봐.
미레아는 생명의 은인을 나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만큼 라우노의 언행과 행동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미레아는 그냥 이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