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라일라는 물을 받아 먹다 말고 황급히 차체 밖으로 머리를 뺐다. 그리고 기껏 마신 물을 전부 토해 냈다.
“큰일 났네…… 이래서야 먹었던 약도 전부 토했잖아.”
리비엘로가 라일라의 등을 두드려 주는 동안 미레아와 쿤둘렌은 라케드가 남기고 간 약품들을 뒤져 보았다. 여러 상황에 쓸 수 있게 의약품을 이것저것 많이 챙겨 온 것은 좋았지만 아무래도 라케드 이외의 사람들은 그만큼 원하는 약물을 찾기 어려웠다. 약품들을 길거리에 전부 쏟아부은 둘은 그대로 주저앉아서는 작은 주사제 병들에 적힌 글을 하나씩 자세히 읽어 나갔다.
“이게 항구토제인가 봅니다.”
황색 액체를 주사기로 뽑은 쿤둘렌이 알코올 솜으로 라일라의 팔뚝을 문질렀다.
“전문 의료인이 아니라 죄송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이게 최선입니다.”
라일라는 쿤둘렌이 자신의 팔에 주사를 놓는 걸 말릴 만한 정신도 없었다.
“해열제…… 해열제는 어디 있더라…….”
미레아는 나머지 약품을 뒤져 보다가 해열제라고 적힌 병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깨알 같은 글씨가 빽빽하게 적힌 약품 설명서를 인상을 잔뜩 쓰고 읽으며 용법과 용량을 확인했다.
“으…… 이걸 1mL 정도 근육주사 하면 될 것 같은데…….”
그때, 무언가가 미레아의 손에 들려 있던 약병을 낚아채 갔다. 미레아는 깜짝 놀라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설명서도 놓치고 말았다.
“깜짝이야!”
미레아가 주변을 살피자 조금 떨어진 곳에 작은 원숭이 한 마리가 그녀에게서 훔친 약병을 들고 있었다.
“이런 곳에 웬 원숭이가 다 있지?”
미레아가 황당하게 중얼거렸다. 노란 털을 가진 원숭이는 그 키가 사람 팔뚝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원숭이는 작은 손으로 약병을 빙글빙글 돌려 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미레아를 보더니 꼭 약 올리는 것처럼 약병을 한 손으로 흔들거렸다. 미레아는 최대한 원숭이를 자극하지 않도록 천천히 다가갔다.
“그걸 돌려주지 않겠니? 착하지?”
원숭이는 미레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약병을 흔들거리며 딱 미레아가 다가간 거리만큼 멀어졌다.
“얘야……. 제발 돌려주지 않겠니?”
미레아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원숭이는 별안간 몸을 돌려 약병을 들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야! 인마! 너 거기 안 서?!”
미레아는 황급히 그 뒤를 쫓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리비엘로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미레아?”
“나 금방 다녀올게!”
“미레아! 잠깐만!”
“거기서 이 자식아!”
빠르기는 어찌나 빠른지 잠깐이라도 시선을 떼면 금방 사라져 버릴 것 같아 미레아는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뭔 원숭이가 저렇게 빨라?!’
단순 달리기 실력으로 치면 미레아는 전투부 요원 중에서 빠르기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혔다. 그만큼 달리기라면 자신 있는데도 불구하고 도무지 원숭이와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게다가 저 원숭이는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속도를 올리면 올리는 대로, 낮추면 낮추는 대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앞서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시오가 있었더라면 어렵지 않게 총으로 쏴 맞힐 수 있을 텐데 미레아가 사격에 그 정도까지 자신이 있지 않은 것은 둘째 치고 겨우 이런 일에 원숭이를 죽이고 싶진 않았다. 자기가 좀 뛰면 되는 일 가지고 살생을 하다니 불쌍하지 않은가.
길을 따라 달리던 원숭이는 별안간 숲속으로 들어갔다. 미레아 역시 그 뒤를 쫓았다. 원숭이는 풀숲으로 우거진 곳으로 들어갔다. 원숭이의 모습이 풀숲에 가려서 확인되지 않자 조급해진 미레아는 더 빨리 달려 풀숲으로 몸을 던졌다.
미레아의 부츠에는 마도 기계장치가 하나 있었다. 걷거나 달릴 때 지면을 딛는 충격을 흡수해 에너지를 저장했다가 다른 힘으로 전환해 방출하는 원리로 달리는 속도를 높여 주거나 점프력을 상승시키고 발차기를 할 때 힘을 실어 주었다. 미레아가 아리스를 처음 만났을 때 공중에 높이 도약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다 이 부츠 덕분이었다.
미레아는 원숭이를 놓치지 않도록 부츠에 장착된 마도 기계를 이용했다. 부츠에 축적되어 있던 힘이 방출된 덕분에 몸이 총알처럼 튀어 나갔다.
“어?”
발에 닿는 것 없이 몸이 꺼진 것은 그때였다. 풀숲 바로 뒤가 바로 벼랑이었단 것을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다. 가속도가 실린 상태인지라 멈추기 힘들었다. 미레아는 속절없이 떨어져 내렸다. 떨어지는 와중에 몸을 틀어 뒤를 돌아보니 원숭이가 머리를 내밀고 미레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레아는 추락사한다는 공포심보다 원숭이에게 품은 화가 폭발했다.
“뭐 이딴 어이없는 전개가 어디 있어, 이 망할 자식아아악!”
자유낙하 중인 미레아의 부질없는 목소리가 계곡에 메아리쳤다.
* * *
아리스는 지프를 세워 둔 곳에 도착하자마자 일행들을 찾았다.
“모두 무사해?”
쿤둘렌은 숨을 헐떡이는 아리스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무사하고 자시고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뭔가 잘 안 풀렸나요?”
하지만 아리스는 머리가 하나 비는 것을 발견했다.
“미레아는요?”
“잠시 자리를 비웠는데 아마 금방 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디 갔는데요?”
“약을 훔쳐 간 원숭이를 쫓아갔는데…….”
그 말에 아리스의 얼굴이 이상해졌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원숭이가 여기 왜 있어요?”
“저야 모르죠. 있더라고요.”
“클라인에는 원숭이가 살지 않아요.”
“그런가요? 그것참 이상하네요. 그것보다 다들 왜 이리 급하게 돌아왔어요?”
“난 또 마수라도 나타난 줄 알고…….”
시오가 반은 타박, 반은 원망이 섞인 어투로 말했다. 아무 일도 없단 말에 아리스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별일 없었으면 됐어요. 너희는 미레아한테 무선 쳐서 적당히 하고 돌아오라고 해.”
그 말에 시오가 통신기를 틀어 주파수를 맞추었다.
“미레아, 들려?”
그런데 전파 노이즈가 들려온 곳은 지프 차 안이었다. 미레아가 앉아 있던 자리에 통신기가 홀로 떨어져 있었다. 시오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이거 바보 아니야?”
“하지만 그 원숭이가 워낙 갑작스럽게 나타나 쫓아가기 바빠 보인 걸요. 그사이 통신기 같은 걸 챙길 시간이 없었지요.”
쿤둘렌이 나서서 미레아를 변호해 주었다.
“그러니까 대체 웬 난데없는 원숭이란 말입니까.”
“너무 걱정 마십시오. 금방 돌아오겠지요.”
그때 지프 차 안에서 죽은 듯이 누워 있던 라일라가 또 차체 밖으로 상체를 쭉 빼더니 위액을 토했다.
“죽을…… 것…… 같아…….”
라일라는 입을 쩝쩝 다시며 파리한 얼굴로 메마른 입술을 달싹거렸다.
“아무래도 라일라 상태가 더 안 좋아진 것 같으니 이대로 시간만 끌 순 없을 것 같아.”
파울로는 어쩔 수 없이 일행을 다시 둘로 나누어야 했다.
“내가 쿤둘렌과 라일라를 마을까지 데리고 갈 테니 나머지는 여기에 남아서 미레아가 돌아오면 데리고 와.”
시오가 같이 가고 싶단 얼굴이었지만 입술을 삐죽 내미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항변의 전부였다.
* * *
미레아는 검기를 실어 검을 절벽에 힘껏 박아 넣었다. 바위에 부드럽게 들어간 칼날은 까득까득거리는 소리를 내며 미레아가 떨어지는 속도대로 아래로 길게 바위를 자르며 내려갔다. 바위와 검날이 마찰하며 떨어지는 속도가 점점 줄어들다 머지않아 검이 우뚝 멈춰 섰다.
아래로 낙하하는 힘을 받던 미레아의 팔꿈치 관절과 어깨 관절에 장력이 걸렸다. 미레아는 저도 모르게 헉하고 신음을 내었다.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했을 정도로 오른팔 전체가 얼얼했다. 그래도 관절이 탈구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미레아는 왼손에 들고 있던 검을 바위에 박아 넣었다. 그리고 근육이 끊어질 것 같은 통증이 밀려오는 오른손은 잡고 있던 검을 놓고 왼손으로 몸의 체중을 지탱했다. 한 손으로 바위에 박아 놓은 검에 의지한 채 절벽에 매달려 숨을 고르자 이성이 돌아왔다.
미레아는 절벽을 더듬어 손으로 잡거나 발을 디딜 수 있는 틈이 있는지 찾았지만, 바위로 이루어진 절벽은 표면이 지나치게 반질반질했다. 거기에 아래를 확인해 보니 아직도 까마득했다. 미레아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위기에 빠지긴 했지만 다른 일행에게 무전을 치면 도움의 손길이 금방 올 테니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미레아는 그리 생각하며 한 손으로는 검을 잡고 빈손으로 홀스터 옆쪽을 더듬었다. 본래 의도는 홀스터 옆에 수납된 통신기를 꺼내려 했던 것이었지만 권총 옆쪽으로는 공간이 허전했다. 미레아는 설마 싶은 심정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손으로 더듬거리다 주머니도 몽땅 뒤집어 보고는 한 가지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통신기를 잃어버렸다. 아마도 난리 통에 떨어트렸거나 처음부터 지프에 두고 왔거나 둘 중 하나인 것 같았는데 어찌 되었든 지금 통신기가 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미레아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머리를 쥐어뜯다가 두 눈을 질끔 감았다가 위쪽을 향해 외쳤다.
“쿤둘렌!”
하지만 위쪽에서는 바람 소리만 들려올 뿐 대답이 없었다.
“리비엘로!”
이번에도 들려오는 대답이 없었다. 일행들이 있던 곳에서 멀리 떨어져 온 데다 다른 사람들은 미레아가 이런 상황인 것은 상상도 못 하고 있을 게 뻔했다. 애초에 누군가가 이 근처로 자신을 찾으러 왔을 거란 기대를 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미레아는 최대한 침착한 태도로 주변을 살폈다. 아무래도 이곳은 부식된 지역 안쪽인 것 같았다. 매달린 바위는 새까맸고 공기도 답답했다. 부식된 지역 안쪽은 밖에서 통용되는 물리 법칙과 현상이 적용되지 않는다. 게다가 멀지 않은 곳에서는 마수가 어슬렁거릴 것이다. 지금 당장은 괜찮아도 주변 상황이 순식간에 바뀐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정말로 큰일 났다. 미레아는 다시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동료들이 구하러 온다 해도 그때까지 버티는 것이 문제였다. 지금 상황에서 미레아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검을 바위에 번갈아 가면서 박아 위나 아래로 이동하든가 여기서 구조가 될 때까지 매달려 있든가 둘 중 하나였다. 미레아는 조금 고민하다 전자를 택했다.
오른손으로 검을 조금 더 위에 박아 넣고 팔을 끌어당겨 몸을 위로 올렸다. 그리고 반대편 손으로 든 검을 다시 그 위에 박아 넣고 또 한 번 몸을 위로 끌어 올렸다. 오른쪽, 왼쪽 번갈아 가면서 검을 찔러 넣어 위로 올라가는 작업을 반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