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그럼 저희는요?”
라케드는 자신에게 매달리는 시오에게 콧방귀를 꼈다.
“어차피 나는 적당한 용족을 구할 때까지 대타였다. 회장이 염두에 두었던 인선이 올 거야. 아마 후에 합류하게 될 대마수 요원들과 함께 합류할 것 같은데. 그럼 문제없지 않겠어? 회장을 쪼아서 일 처리에 문제없게 해 보겠다.”
“아니, 그래 봤자 고착 며칠일 텐데 그걸 못 참고 이렇게……!”
항의로 아우성치는 일행들에게 라케드는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이건 내 의무야.”
라케드는 평소보다 가라앉은 눈을 하고 있었다.
“세피로스 회장도 막을 수 없는 내 의무야. 내게 있어서 이 용주를 원래 있어야 할 곳까지 운반하는 건 그 어떤 명령보다 더 중요해. 협회의 명령을 반하고 해야 할 일을 포기한다 해도 어쩔 수 없어. 너희는 이해 못 하겠지만…….”
그렇게 말하는 라케드는 평소의 까칠한 모습일 때보다 더 건드리기 어려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러니까 미안하다.”
사람들은 일제히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라케드가 사과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길을 가는 용이 무려 미물에게 사과했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일행은 시무룩한 얼굴로 라케드를 보내 주어야 했다.
라케드는 세피로스와 연락이 닿기도 전에 일행과 갈라져 용들의 성지로 돌아갔다. 그래서 세피로스에게 보고를 했을 때는 어쩔 수 없이 후 통보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세피로스는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거나 하지 않았다. 담담하게 알겠다고 했을 뿐, 어느 사람도 책망하지 않았다. 그저 남은 일행들끼리 임무를 이어 가란 지시만 내렸다.
라케드가 비록 독불장군에 무섭긴 해도 일행들은 그 존재만으로도 심리적으로 기대고 있는 부분이 있었다. 때문에 라케드의 부재로 일행들은 불안해하는 기색이 조금씩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은 없는 사람에게 마냥 의지하고 있을 순 없었다.
그들도 그렇게 다음을 향해 나아갈 뿐이었다.
제6장 신을 잊은 대지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4인승 사륜구동형 지프는 승차감보단 견고함에 가치를 두고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다지 쿠션감이 좋지 못했다.
미레아는 이마에서 뜨끈뜨끈 열이 오르는 라일라에게 무릎을 내주었다. 덜컹거리는 충격에 머리가 울리는 것이 그나마 덜할 것이었다. 지프 뒷좌석을 차지하고 누운 라일라의 옷은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불편한지 미미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미레아는 차가운 물에 적신 손수건을 라일라의 이마에 올려 주었다.
“미안해.”
라일라가 가물거리는 눈을 뜨더니 힘없이 말했다. 아침부터 시작된 몸살은 점점 증상이 심해지나 싶더니 라일라는 결국 점심 먹은 것도 다 게워 내었다. 하필이면 부식 지역을 따라 이동 중이었기 때문에 인가라도 찾을라치면 차로 몇 시간은 더 달려야 했다.
그들은 라일라의 상태를 보고는 길에서 시간을 버리는 것보다 빠르게 이동하는 것을 택했다. 노숙하며 찬기가 올라오는 흙바닥 위에서 침낭을 뒤집어쓰고 누울 바에 차라리 힘들어도 푹신한 침대가 있는 곳까지 가겠다는 라일라의 의견도 반영되었다.
거기다 부식 지역 근처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 불가였다. 운전대를 잡은 시오 옆에서 지도에 코를 박고 있던 파울로가 고개를 저었다.
“이 앞쪽으로는 지형이 너무 위험해서 빙 둘러 가야 하는데 그렇다고 지형이 평탄하면 부식이 심하거나 마수가 밀집한 구역이고…….”
그는 혀를 쯧 찼다.
“우선 예정했던 경로에서 벗어나야 해.”
“얼마나요?”
펜으로 지도위에 경로를 죽죽 그어 본 파울로가 대답했다.
“이틀 정도는 지연돼도 앞으로 일정에 차질이 없을 것 같은데…….”
“이틀 가지고 되겠어요? 최근 무리하면서까지 강행군을 펼친 덕분에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잖아요. 이대로라면 별동대랑 합류하기도 전에 클라인의 남쪽 정화 작업이 다 끝날 정도라고요. 그러니까 어설프게 쉬었다가 얼마 못 가 또 몸살 나는 것보다 이참에 푹 쉬는 쪽이 어때요? 라일라 때문이 아니라 우리도 쉬어야 해요.”
“틀린 말은 아니야.”
라일라의 땀을 닦아 주던 미레아가 시오의 말에 동조했다.
“전반적으로 일행들의 컨디션이 떨어져 있는 건 사실이야. 라일라뿐만이 아니라 리비엘로도 위태로워.”
이번 임무를 시작한 지 벌써 한 달이나 지나 5월 초가 되었다. 아무리 체력이 받쳐 주는 사람이라 해도 이쯤이면 슬슬 쉬어 줘야 하는 시점이었다.
“그런데 그것도 쉴 만한 마을이 나타나 줬을 때 이야기지.”
파울로는 툴툴거리며 다시 지도에 코를 박았다.
“이럴 때 라케드 님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일정의 초반부터 헤어지긴 했지만 무섭게 굴거나 까탈스럽게 이러니저러니 해도 지금까지 라케드는 일행들의 마음 한편에 믿는 구석이 되어 주었다. 파울로가 못 미덥다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가 앞에서 이끄는 리더인 반면 라케드는 등 뒤의 든든한 백업 같은 포지션이었다. 라케드의 부재가 일주일째 접어들자 누적된 피로가 일행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파울로는 경로를 새로 짜며 골머리 썩히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일단 이 지역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 한참을 달리고 있는데 뒤따라오던 지프에서 경적이 울렸다. 시오는 백미러를 통해 뒤차가 헤드라이트를 깜박이는 것을 보고는 차를 세웠다.
앓고 있는 라일라와 그녀를 돌보고 있는 미레아를 남겨 두고 시오와 파울로가 차에서 내리자 다른 지프의 운전석에서 아리스가 내렸다. 그가 운전한 지프에는 리비엘로와 쿤둘렌이 타고 있었다. 아리스가 헤드라이트를 깜박인 것은 무언가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저 산 중턱에 인가가 있어요.”
“하지만 그쪽은 지도상에서 아무것도 없는 곳인데…….”
아리스가 가리킨 방향을 지도와 대조하던 파울로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옅은 안개 때문에 가시거리가 썩 좋지 않았고 나무 때문에 산속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기 어려웠다.
“내 눈에는 보여요. 나 시력 좋잖아요. 인가가 확실해요. 그런데 차가 건너갈 수 있는 길을 찾진 못했어요.”
셋은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는 각자의 차로 돌아가 검과 화기를 챙겼다. 그들은 아리스가 발견한 인가로 가서 라일라가 쉴 만한 곳이 있는지 물어보기로 계획을 세웠다. 자초지종을 들은 미레아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조심해.”
“네 쪽이 더 걱정이지. 라일라나 잘 보고 있어.”
부식 지역에서는 언제 어디서 마수가 튀어나올지 아무도 몰랐다. 지금 정차한 곳도 엄밀히 따지자면 안전하다 할 순 없었다. 그렇다고 차도 없는데 무턱대고 다 같이 움직이는 것도 여러모로 난감했다. 지금은 잠시 팀을 나누는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 있으면 무전 해.”
미레아가 자신의 머리를 가볍게 헝클어트리고 가는 파울로와 다른 둘의 뒤에서 외치자 그들이 대충 손을 흔들어 주었다.
* * *
아리스의 말에 따르면 그가 발견한 인가까지는 걸어서 갈 만한 거리라 했다. 시오는 조심스럽게 숲의 흙을 한 움큼 쥐어 손안에서 부스러트린 다음에 냄새를 킁킁 맡았다.
“부식 정도가 위험한 수준은 아니야.”
“영소나 마력의 흐름도 이상한 건 모르겠어. 부식된 땅 특유의 위화감이 들지는 않아.”
아리스의 검증까지 거치자 파울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위험하지 않다고 판단한 셋은 어느 정도 마음을 놓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네가 말한 인가에서 머물 수 있다 해도 여기까지 라일라를 엎고 오르기엔 조금 힘이 들지 않을까나.”
파울로의 말에 시오는 정수리 위에 걸쳐놓은 고글을 제 위치에 고쳐 쓰고 있는 아리스를 보며 대꾸했다.
“마법으로 길을 만드는 건 어때요?”
“내 마력을 몽땅 뽑아 먹을 셈이야?”
“힘들다고는 해도 못 하겠단 소리는 안 하네. 정말 가능하면 한 번 해 봐.”
“병자가 한 명 더 느는데 그럼 무슨 의미야.”
괜히 쓸데없는 잡담이나 하며 걷고 있자니 계곡을 따라 정말로 인가가 한 채 나왔다. 셋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들은 집으로 달려갔다. 겉보기에는 산장 같은 통나무집이었는데 관리된 흔적이 있었다. 파울로가 문을 두드리는 사이 시오와 아리스는 집 주변을 돌아다니며 특이사항이 있는지 훑어보았다.
“계십니까?”
파울로는 연신 현관문을 쾅쾅 두드렸지만, 집안에서 대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창문은 전부 커튼이 드리워져 있어서 안을 확인할 수 없었다.
“아무도 없나?”
“아무도 살지 않는 집은 아닌 것 같은데 잠시 자리를 비운 게 아닐까요?”
차라리 빈집인 게 뻔한 외관이었다면 마음대로 문을 따고 들어가 휘젓고 다녔을 텐데 그게 명확하지 않으니 이도 저도 못 하고 문만 두드리는 수밖에 없었다. 파울로와 아리스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사이 근방을 살피던 시오가 돌아와 보고했다.
“이 반대편으로 능선이 이어지는데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작은 마을이 있는 것 같아요. 이 집 말고도 인가가 보여요.”
“버려진 마을은 아니겠지.”
“사람이 지나다니는 걸 보진 못했는데…….”
“빈집이어도 묵을 만한 곳이 있을 수 있으니 한번 가 보죠, 뭐.”
그들은 시오가 말한 능선을 따라 내려갔다. 지프로 지나온 골짜기의 절벽들은 깎아져 내릴 것처럼 험준했는데 이쪽 능선은 완만했다. 조금 걷자 마을 비슷한 것이 나왔다. 인가가 많지는 않고 띄엄띄엄 있어서 인구가 많은 마을은 아니었다.
인가 사이에는 전부 밭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잡초가 없고 작물이 잘 자랄 수 있도록 관리되어 있었다. 이 마을에 사람이 사는 것이 확실했다.
“부식된 곳 바로 옆인데도 아직 농사를 지을 땅이 남아 있었구나.”
“그런데 왜 아무도 안 나와 보지?”
시오와 파울로가 설렁설렁 걸어가고 있는데 뒤따라가던 아리스가 도중에 멈췄다.
“왜 그래?”
아리스는 손을 들어 올리는 수신호를 보내 시오의 말을 막고는 홀스터의 권총에 손을 올렸다. 그 상태로 높게 쌓아 올린 밀짚 더미로 걸어가더니 그것을 유심히 보며 말했다.
“거기 있는 거 다 알아. 나와.”
그 말에 시오와 파울로도 각자의 무기를 언제든지 빼 들 준비를 했다. 하지만 밀짚 더미 쪽은 잠잠했다. 아리스는 기습하는 것처럼 밀짚 더미에 팔을 불쑥 집어넣었다. 비명이 들리더니 아리스의 팔에 남자아이가 하나 끌려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