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48화 (48/257)

48화.

아리스 역시 깨달음을 얻은 얼굴로 리비엘로를 돌아보았다.

“람, 다시 봤는걸?”

그리고는 검을 들어 마력을 집중했다. 아리스는 마법을 사용할 때 마석이라는 매개 대신 마력과 동조율이 높은 검을 쓰는 것이 편했다. 일전에 라일라에게 받은 검이 마력을 흡수해서 변환시키는 능력이 좋아 계속 사용하는 중이었다.

원래 아리스가 마법을 사용하던 방식에 술식을 조금 응용해 넣자 마력이 순식간에 증폭되었다. 그러자 눈앞에 있던 마수들의 발아래에 게이트가 생기더니 그대로 마수들이 우르르 떨어졌다. 아리스는 마수를 말 그대로 멀리 치워 버렸다.

그들을 뒤따라오는 것들은 미레아가 화기로 펑펑 터트리고 앞에서 덤벼 오는 것들은 가는 길에 방해가 되니 아리스가 방금 했던 것처럼 아예 먼 곳으로 치워 버리는 방법을 쓰니 속도가 붙었다.

그렇게 들판의 정 중앙에 도달한 셋은 아리스와 미레아가 주변을 경계하는 틈을 타 리비엘로는 물로 목을 축이고 목청을 가다듬었다.

“모두 들어라-!”

리비엘로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신호를 전해 들은 라일라와 쿤둘렌이 마도 기구를 작동시키자 노랫말을 타고 퍼지던 신성력에 반응했다.

“나는 여신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자!”

리비엘로는 지팡이로 땅을 쿵 찍었다. 하늘이 금빛으로 물들었다. 아리스가 때맞춰서 자신의 마력을 부식 정화기에 퍼부었다. 정화기는 아리스의 방대한 마력을 동력 삼아 작동하더니 다른 곳에 설치한 정화기에 마력을 전송했다. 그것은 또 다른 정화기에 마력을 전달하여 거미줄 같은 길을 형성했다. 마력이 지나가는 길 위에 리비엘로의 신성력이 내려앉았다.

- 길을 잃은 자들에게 따듯한 안식을-.

마수들이 재가 되어 사라지는 것을 보며 미레아는 땀을 훔쳤다. 통신기 너머에서 시오가 안도하며 서리 여신에게 감사 기도를 올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 다들 무사해?

“일단 우리 쪽은 부상자 없어요.”

- 이쪽도 마찬가지야. 리비엘로의 노래가 끝나면 앞서 말했던 귀환 포인트에서 합류할 것. 이상.

리비엘로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미레아는 땅 위에 벌러덩 누웠다. 마수에 의해 오염되어 부식이 일어나 검붉게 변했던 토양 위에 신성력이 내려앉더니 부식 정화기의 술식대로 흐르던 마력을 변화시켜 정화했다. 정화된 흙은 꼭 햇볕에 바싹 쬔 것 같은 냄새가 올라왔다.

미레아는 하늘을 올려보았다. 하늘 역시 마력이 흐르는 길을 따라 신성력이 대기를 정화하고 있었다. 신성력에 산란된 빛이 대기에서 반짝였다. 양 볼에 와 닿는 바람은 상쾌했고, 등에 닿은 흙은 폭신했으며 들려오는 노랫소리는 감미로웠다. 조금 전까지 마수들로 우글거리던 곳이라고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예쁘다.”

무심코 중얼거린 그 말에 옆에서 물통의 물을 몸에 뿌리고 있던 아리스 역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미레아의 말대로였다. 3일 동안 했던 고생을 잊을 정도로 보람 있는 순간이었다. 아리스 자신이 이 일에 보람이란 것을 느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줄레티아의 말에서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했다. 그 어떤 변명을 갖다 붙인다 해도 아리스는 클라인 일대의 오염에 관해 일정 부분 이상 책임이 있었다. 비록 이러한 결과를 의도치 않았다 해도 마수를 몰고 온 것은 아리스 자신이 맞았으니 말이다.

“너는 웃지를 않더라.”

갑작스러운 말에 아리스는 미레아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뜻이야?”

“임무 중에도 그렇고 지금처럼 상황이 마무리되면서 한숨 돌릴 때도 웃지를 않는다고. 평소에는 잘 웃으면서. 처음에는 그저 힘들어서 그런가 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고.”

미레아는 여전히 누운 채로 자신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여기가 딱딱하게 굳어 있어. 주름 좀 펴.”

아리스는 저도 모르게 미레아를 따라 미간을 문질렀다. 미레아는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뭣 때문에 그런지 모르겠지만 우리 아버지가 인생은 해학과 재치라 그랬어. 그러니 웃을 수 있을 때 웃으시오, 아리스 클라인셔드 군. 3일 동안 했던 개고생이 끝인데 웃어도 되잖아.”

하지만 아리스에게 웃을 수 있을 때라는 것은 적어도 지금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

아리스는 웅얼거리며 미레아의 옆에 털썩 앉았다.

“안 될 게 뭐가 있다고…… 아, 너 혹시 줄레티아가 했던 말 신경 쓰고 있어? 그 사람 말 신경 쓰지 마! 왜 그걸 마음에 담아 두고 있어?”

“딱히 담아 둔 건 아니야. 그런데…… 그렇잖아. 나 때문에 이렇게 되었는데 내가 클라인을 원래대로 돌려놓기 위해 무언가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대단한 일인 게 아니니까…….”

그 말에 미레아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아니, 대단한 일이지! 당연한 일이라 해서 대단한 일이 아닌 게 아니야. 많은 사람이 당연한 일은 대단한 일이 될 수 없다고 착각하고 있는데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넌 대단해! 네가 가진 것이 의무감이든 죄책감이든 그건 상관없어. 중요하니까 한 번 더 말한다. 아리스, 넌 대단해.”

미레아는 듣고 있는 당사자의 낯이 화끈거릴 정도로 열변을 토했다. 이쯤 되니 아리스는 미레아가 자신을 왜 이렇게 과대평가하는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때맞춰 리비엘로의 노랫소리가 잦아들자 아리스는 물에 젖은 머리를 털면서 서둘러 일어났다.

“람!”

아리스가 리비엘로에게 물병을 던졌다. 얼떨결에 물병을 받은 리비엘로가 감사 인사를 하기도 전에 아리스는 그들을 내버려 두고 쌩하니 혼자 이동하기 시작했다. 같이 가자며 뒤따라오던 미레아가 리비엘로에게 어깨를 으쓱였다.

“쟨 또 저래.”

리비엘로는 물병과 미레아를 번갈아 보다가 쿡쿡 웃었다.

“저 사람 쑥스러워서 저러는 거야.”

“쑥스러워한다고?”

“그래.”

리비엘로는 목을 축이고는 미레아와 함께 아리스가 지나간 길을 따라 걸었다. 그는 어느새 저 멀리까지 걸어가 등 뒤에서 달랑거리고 있는 땋은 머리만 간신히 보일 정도였다. 덕분에 미레아와 리비엘로가 목소리를 낮출 필요는 없었다.

“너 아리스한테 무슨 말 했어?”

“대단하다고.”

“그런 말을 들으니 당연히 쑥스러워하지.”

“뻔뻔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분께서 쑥스러워할 줄도 안다고?”

“아리스는 뻔뻔하다기보다 여러 상황에 대처하는 것이 능숙한 거야. 정치적인 경험도 많은 데다 머리도 좋아 판단력이 뛰어나. 약점이 될 만한 것을 감추고 자신을 포장하는 일엔 이골이 난 사람이지. 그러다 보니 그렇게 보이는 거고.”

“음…….”

미레아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생각보다 칭찬에 약하구나.”

그렇게 중얼거리다 아리스를 둘러싸고 있던 상황들을 떠올리니 그게 당연했다. 아리스는 칭찬보다는 공격받는 것에 더 익숙한 위치였으니 말이다. 저도 모르게 짠한 동정심 들어서 미레아는 다짐했다.

“앞으로 열심히 칭찬해 줘야지.”

“괴롭히지 마.”

“아니, 칭찬해 주는 게 왜 괴롭히는 거야?”

“지금 칭찬받았다고 혼자 저 멀리 내뺀 거 안 보여? 적당히 역치를 높이는 밑 작업부터 해 보렴.”

그 말에 미레아가 한숨 쉬며 머리를 저었다.

“쟤는 무슨 손이 그리도 많이 가냐.”

“그러는 넌 단순해서 좋겠구나.”

“오, 리비엘로 람. 나를 단순이란 말로 표현하지 말아 주겠니? 인생은 해학과 재치라는 아버지의 말대로 삶을 즐기는 중이니까.”

리비엘로가 작게 웃었다.

“그렇게 아리스가 좋아?”

그 말에 미레아의 표정이 대번에 이상해졌다.

“말의 의미를 모르겠네. 설마 그렇고 그런 의미는 아니지?”

“하지만 손이 많이 간다면서 옆에 붙어 있잖아.”

“나 아니면 쟬 누가 챙겨? 라케드 님은 욕만 안 하면 다행이고, 파울로 대장은 일거리가 가득하고, 시오 선배는 라일라한테 더 관심이 많고, 라일라는 연구 대상으로 보고, 쿤둘렌이랑은 수업하기 바쁘고, 너는 신녀라고 불편해하는데. 나밖에 없잖아.”

“흐응.”

의미심장한 리비엘로의 콧소리에 미레아는 더 놀림당하기 전에 침묵하는 쪽을 택했다. 리비엘로는 미레아를 놀리는 일을 적당히 하고 화제를 바꿨다.

“그래도 네가 나랑 라일라도 더 신경 쓰고 있다는 건 알아. 덕분에 나도 네게 의지하고 있어.”

“그렇지? 나밖에 없지?”

역시 미레아는 생각대로 단순했다. 하지만 리비엘로는 그것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 * *

줄레티아는 라케드와 파울로에게 머리를 깊이 숙였다. 협회 쪽에서 약속을 지키자 줄레티아는 그들에게 연신 굽신거리기 시작했다. 줄레티아는 그들이 진짜로 땅을 정화하는 것이 가능할지 정말로 신뢰하지 않았었고 의심만 가득한 상태로 3일을 보냈던지라 정화된 땅을 보고 기절할 뻔했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사기꾼에게 감사 인사를 다 듣네.”

라케드가 비아냥거렸지만, 줄레티아는 공손한 태도로 손바닥 크기의 작은 함을 건넸다.

“말씀드렸던 용주입니다.”

라케드는 함을 열어 반질반질하게 빛나는 구슬 모양의 용주를 확인했다. 그는 작게 한숨을 쉬며 그것을 품 안에 넣었다.

“용골이나 잘 묻어 줘. 용주는 내가 고향으로 가져가겠지만 용골까지 운반하기엔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나중에라도 찾으러 올 수 있게 말이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제 세상에는 또 줄레티아가 서리 여신의 권능으로 티몬을 구원했다는 이야기가 알려질 것이었다. 클라인 원정대는 그래도 상관없었다. 이야기 뒤편에 머무르는 것이 좋은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었다.

다만 문제는 그들의 계획이 변경되었다는 것이다. 라케드가 용주를 가지고 용족의 성지로 돌아갈 것을 희망했다.

“이 용주는 원래 주인의 의식 잔재가 남아 있는 한 제어하지 못하면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커. 앞으로 여행에 들고 다닐 수 없어.”

아연한 표정인 일행들에게 라케드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다고 용족 중 누군가에게 여기까지 마중 나오라고 할 수 없는 노릇이다. 내가 직접 운반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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