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사람 몇과 용주를 맞바꾼 게 죄입니까?!”
“뭐라고?”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줄레티아의 말에 사람들은 어이가 없었다. 그는 절절한 얼굴로 지껄였다.
“당시의 저는 저에게 용주를 준 자가 누구였는지, 그 대가가 어떤 것인지보다 지금 당장 마수와 그 데르카이드로부터 살아남는 쪽이 급급했습니다. 용주의 힘으로 그 데르카이드는 물론이고 클라인에서 뛰쳐나오는 마수로부터 이 도시를 지켜야 했으니 말입니다. 티몬은 클라인에서 가장 가까운 대도시인데 방관만 했다면 피해가 어마어마했을 것입니다. 수백, 수천의 시민들의 목숨이 달린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고작 몇 사람의 목숨이 무엇이 중요하겠습니까? 제가 상대방에게 넘긴 그들은 용주가 없었어도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그런 사람 몇을 용주의 대가로 넘긴 게 그렇게 잘못인지 저는 함부로 말하지 못하겠군요.”
“신관이 있는 도시는 신성력으로 보호받을 수 있잖아.”
아리스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말하자 줄레티아는 또 변명하기 바빴다.
“티몬은 상황이 좀 달랐습니다. 도시 규모와 비교하면 신관이 작았고 하필이면 마수가 지나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신관과 사제들 이외의 다른 경우의 수가 필요했습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제 지위에 비하면 부끄럽게도 신성력은 다른 사제들보다 미약한지라…… 마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위 사제가 여신의 신성력이 아닌 마법에 의존하면 구설에 오를 수밖에 없으니 마법을 신성력이라 속였다…… 이 말이군.”
파울로가 정리하자 줄레티아는 긍정의 의미로 침묵했다.
“그래서 감히 용주에 손을 댄 것을 나보고 이해해 달라 그럴 텐가? 본체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용주는 용의 자아가 남아 있어. 미약하지만 희로애락이라는 감정 역시 느낄 수 있다. 너는 그런 용주를 억지로 본체와 분리해 네놈 편한 대로 이용한 것이다. 사기 행각을 5년이나 했으면 충분하지. 용주는 나를 통해 용들에게 돌려주길 바란다.”
라케드가 고압적으로 나갔지만, 줄레티아는 조금 전과는 다르게 전혀 주눅 들지 않고 그에게 반발했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전 세계에서 신성력을 다룰 수 있는 사제들이 부족한데 용주가 아니라 하면 여기까지 도움의 손길을 줄 수 있는 자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5년 전 상황이 어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더니 아리스에게 윽박질렀다.
“전하께서 가장 잘 아시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자신의 잘못으로 일어난 일이라 해도 자신이 원해서 한 일이 아니었다. 아리스는 이 이상의 비난은 참을 수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내 핑계 대지 마! 당신이 했던 일들을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한다 해도 다수를 위해 희생돼야 하는 개인의 입장은 어떻겠어? 내 이름을 팔아서 성금도 걷었지? 이쯤 했으면 라케드 님의 말대로 용주를 원래대로 돌려놔.”
“소수를 위해 다수를 희생시킨 전하께서 제게 할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리스의 표정을 본 일행들은 그가 검을 뽑아 들지 않은 게 용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줄레티아는 꿋꿋했다.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시민들을 안심시킬 수 있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공황 상태에 빠졌던 도시를 가까스로 유지한 것은 그 용주 덕분이었습니다! 다 제가 해낸 일입니다! 전부 제가 용주 덕분에 이룬 평화란 말입니다! 네! 성금이요! 욕심이 없었다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신전을 유지하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제가 이 도시에 이바지한 것을 생각한다면 그 정도는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신도를 넘긴 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게 뭐가 나쁩니까? 적어도 전하께서는 저를 비난하실 자격이 없습니다!”
줄레티아가 목숨을 내놓고 사는 것 같은 말을 내뱉었다. 아리스는 입을 열거나 무언가를 하려다가도 본인 스스로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어서 이를 악물고 침묵했다. 쿤둘렌과 파울로는 이마를 짚었고 시오와 미레아는 숨을 죽이고 아리스의 눈치를 보고 있는데 라케드가 티 테이블에 양다리를 쾅쾅 올리더니 팔짱을 끼고는 말했다.
“야, 너. 그럼 그거 해결해 주면 용주 뱉어 낼 거야?”
“해결이라니 무슨 말씀입니까?”
“네놈 신성력만으로도 마수로부터 도시를 지킬 수 있도록 관리해 주면 용주 필요 없지 않겠냐.”
“그거야말로 제가 바라던 바인데 어떤 방법으로 그럴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대안이 없습니다.”
“대안 있으면 어떡할 건데.”
라케드의 말에 줄레티아는 얼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대안이란 게 있습니까?”
“자세한 방법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도시 주변 오염 지역의 정화, 부식된 땅의 회복, 그리고 일부 마수 토벌 정도면 되겠나?”
라케드의 제안에 줄레티아는 두 눈을 끔벅거렸다.
“그러니까…… 그게 가능하다는 말씀이신 거죠?”
“물론. 3일의 시간을 주면 말끔하게 정리해 주도록 하지.”
“왜…… 왜 저 같은 놈을 위해…….”
줄레티아가 감격스럽단 목소리로 말하자 라케드가 화를 벌컥 내었다.
“무슨 개소리야? 네가 뭐가 예쁘다고 내가 그래? 너 때문에 하는 거 아니야. 원하는 조건이 두 개 있다. 하나는 용주, 다른 하나는 입막음.”
입막음이란 말에 줄레티아는 삐딱하게 앉아 있는 아리스에게 한번 시선을 던졌다. 아리스는 그에게 고개를 한번 까닥였다.
“우리는 이 티몬에 온 적이 없는 거야. 알았어? 오염 지역의 정화도 우리가 한 게 아닌 거야. 눈에 띄는 행동만 하지 않는다면 적당히 네놈 공으로 돌려도 문제 삼지는 않겠다. 그리고 특히 루데키아스는 여전히 행방불명 상태여야 해. 알겠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히 지나가는 거야.”
줄레티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추후에 이 일을 말미암아 이 도시에 해가 되는 일은 없겠죠?”
“네 목이나 걱정해. 분수에 맞지 않게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야. 우리는 몰라도 네게 자신이 흑익의 동료라고 주장했다던 자와 메르티어스 황제가 제일 위험할걸. 전자는 제대로 된 정체를 모르니 목적 역시 알 수 없고, 후자는 루데키아스 목에 현상금까지 걸었는데 그걸 빼돌렸으니 루데키아스의 행방을 은폐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후환이 두렵지.”
그 말에 줄레티아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라케드는 서늘한 얼굴로 웃었다.
“그러니 입조심하고 적당한 시기에 멀리 도망가 몸을 숨기는 것을 추천한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줄레티아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치고 방을 나섰다. 그러다 문득 잊은 것이 있어 다시 줄레티아를 돌아보았다.
“아, 그러고 보니 그 얘기를 못 들었네. 네가 말한 데르카이드 말이다. 날개 색이 어떻던?”
“하얀색이었습니다.”
“……뭐? 하얀색?”
“네,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비록 흰 날개이긴 했으나 멀리서 보면 흑익이라고 착각할 만큼 어두운 밤에 나타났기 때문에 그의 모습을 가까이서 본 사람들은 잘 모를 겁니다. 하지만 분명 하얀색이었습니다. 마치 하늘에서 사자가 내려 온 것 같은 성스러운 색…….”
그 대답에 라케드가 잠시 굳어 있는 사이 파울로가 다른 일행들을 일어나게 했다.
“뭐 해? 방금 3일이란 소리 못 들었어? 당장 내일 아침부터 작업 들어가야 하니까 다들 복귀해서 쉬어 둬.”
파울로가 일어나자 다른 일행들도 뒤따라 우르르 일어났다. 그 덕에 잠시 분위기를 환기한 라케드는 줄레티아에게 힘겹게 대답했다.
“일단…… 알았다.”
라케드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 이외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그들보다 먼저 방에서 나왔다. 아리스는 줄레티아를 노려보다 제일 마지막에 일어났다.
“경고하는 데 나를 전하라 부르지 마.”
“당신은 정말로 죄책감이라곤 없습니까?”
줄레티아의 질문에 아리스가 짧게 하, 하고 웃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신 같은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니 우습기 짝이 없네. 인제 와서 그딴 게 있으면 어떻고, 없으면 어때. 그래도 적어도 내가 한 짓에 대한 책임은 지기로 했으니 그걸로 된 거 아니야?”
“당신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그런 말 듣는 것도 익숙하니까 할 말이 그것밖에 없으면 이만 갑니다.”
아리스는 괜히 시간만 버렸다고 투덜거렸다. 줄레티아는 허망하게 그 뒤를 바라보았다.
* * *
“아리스, 그쪽으로 세 마리 간다!”
부식이 진행된 들판 한가운데서 미레아는 말처럼 생긴 마수의 발목을 베어 아리스가 있는 쪽으로 몰았다. 아리스가 마수를 처리하는 동안 그 틈에 미레아는 리비엘로의 손을 잡아끌었다.
“젠장, 들판이라 엄폐물이 없어서 너무 노출되는데!”
― 원거리에서 오는 놈들은 내가 처리할 수 있으니까 다들 너무 걱정하지 말고 달려.
적당한 포인트에 잠복해서 저격 중인 시오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비전투원인 리비엘로를 데리고 정해진 구역까지 이동하는 것은 고역이었다.
“미안해.”
“너는 못 뛰는 게 당연해. 이게 우리 임무니까 사과는 됐어.”
리비엘로가 가차 없다면서 힘없이 웃는 사이 아리스가 다른 일행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라일라, 설치하기로 한 좌표까진 아직이야?”
― 장치끼리 거리가 너무 가까우면 비효율적이야. 적어도 저 마른 강까지는 가야 해.
마도 기구를 설치하기 위해 파울로와 쿤둘렌과 함께 움직이는 라일라 역시 숨이 턱까지 올라와 헐떡거렸다.
― 아리스, 3시 방향 처리해 줘!
미레아와 아리스가 달려드는 마수를 상대하는 사이 시오가 라일라 쪽을 지원했다. 미레아가 라케드는 왜 이런 일에 빠진 거냐며 속으로 욕을 한 바가지 했다. 그때 통신기 너머에서 라일라가 외쳤다.
― 전부 설치했어! 리비엘로!
“우리는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기다려.”
― 버티고 있을 테니 부식 정화기 작동 타이밍은 그쪽에서 잡아 주세요.
쿤둘렌의 말은 든든하기 짝이 없었으나 미레아, 아리스, 리비엘로는 서로를 챙기기 바빴다. 땅이 셋을 둘러싸고 움푹 꺼지더니 전갈처럼 생긴 마수들이 떼로 튀어 나왔다. 아리스와 미레아의 눈빛이 교차하였다. 둘이라면 몰라도 리비엘로가 문제였다. 이 수많은 마수가 동시에 달려들면 시오의 지원도 한계가 있었다.
아리스는 미레아와 리비엘로의 팔을 붙잡더니 마수들과 조금 떨어진 곳으로 근거리 공간 워프 게이트를 만들었다. 셋은 게이트를 통과할 때 별다른 부작용 없이 빈 땅에 안착했다. 미레아는 마수 떼가 있던 자리에 수류탄을 집어 던졌다.
“이렇게 된 거 공간 워프 게이트 한 번 더!”
리비엘로의 요구에 아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장거리는 위험해! 근거리라 해도 게이트를 여러 군데 만들면 공간 왜곡이 일어나는 부작용이 심해.”
“아니, 우리 말고.”
리비엘로는 멀리서 달려오는 새로운 마수들을 가리켰다.
“저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