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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따라 종말까지-45화 (45/257)

45화.

“당신들에게 반항해 봤자 좋은 결과가 나올 것 같지 않을 것 같으니 말입니다.”

마수가 나타나 소란을 부린 것과 용이 나타나 소란을 부린 것. 둘 중 어느 쪽이 더 심각한 사항인지 따진다면 당연히 후자이다. 티몬은 클라인의 인근 도시이고 마수가 빈번히 나타나는 지역인지라 마수가 간혹 한두 마리 정도 나타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용이라면 달랐다. 용들은 인간과 오빈과 섞여 어울리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이 가진 힘은 독특했기 때문에 인간과 오빈의 사회에 혼란을 주기 일쑤였다. 라슈발렌 협회의 요직을 맡은 세피로스와 라케드가 특이한 경우인 것이다.

오히려 용이기 때문에 그런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지만, 그것을 기꺼워하는 용은 거의 그 둘밖에 없었다. 거기에 루아드 제국이 식민지들을 통합함에 따라 다채로운 인종이 흘러들어왔다 해도 용은 루아드 제국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국 본토에 머무는 수가 적었다.

그런데 본모습으로 인간들이 사는 루아드 제국의 도시를 거니는 용이 있다? 관심받고 싶어서 미쳤다면 이해할 수 있긴 했다. 게다가 현자로 군림한 용이 이성을 잃고 날뛰었단 것도 엄청난 일이지만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런 용을 죽인 것도 엄청난 일이었다.

그래서 이런 곳에 용이 나타났다는 것은 범상치 않은 일이라 소문이 퍼지면 여러모로 좋지 않았다. 줄레티아에게도, 원정대에게도 말이다.

그러니 차라리 마수가 나타난 것으로 처리하는 것이 나았다. 초승달이 뜬 밤이었던 덕분에 달빛이 환하지 않아 목격자들은 그 소란 속에서 용을 유심하게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거기에 줄레티아가 마수라 한다면 마수라 믿을 이들이었다.

“당신들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원하는 것이 따로 있으니 제가 마수라 얼버무린 것도 묵인하는 것이겠군요.”

“아직은 그렇지요. 우리는 당신이 협조를 잘해 주면 큰 소란 부리지 않고 나가 줄 수 있습니다. 물론, 당신의 명예도 지켜 드리고요.”

때맞춰 자리가 마련됐다는 말을 전하려 사제 하나가 돌아왔다. 줄레티아는 그들을 응접실로 인도했다. 첨탑에서 대기 중이던 시오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환한 응접실에 도착하자 줄레티아가 물었다.

“먼저 씻으시겠습니까?”

“물수건이면 충분합니다.”

파울로의 말에 줄레티아가 따듯한 물수건을 마련해 주었다. 그들은 땀과 흙먼지를 닦았다.

“앉으시지요.”

줄레티아는 따듯한 차를 대접했다. 하지만 아무도 마시지 않았다. 줄레티아는 씁쓸하게 웃으며 차를 머금었다.

“독이 들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더니 아리스에게 아는 체를 했다.

“아침에 왜 그런 질문을 하셨는지 알 것 같군요.”

“그런가요?”

“조금 전에 당신의 검은 날개를 보았습니다, 전하.”

파울로는 헛기침하며 줄레티아의 신경을 돌렸다.

“당신이 관심을 가져야 할 상대는 그쪽이 아니고 이쪽입니다. 자, 그 용골은 어디서 습득한 거지요?”

“파울로, 먼저 저희에게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 줘야 하지 않겠어요?”

미레아의 말에 파울로는 지금 일어난 상황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좋아, 어차피 줄레티아 씨에게도 다 얘기해야 할 테니 말이야. 나와 쿤둘렌이 지하 통로를 발견하고 그 안으로 들어갔을 때 무엇을 봤는지 말해 주지.”

* * *

파울로와 쿤둘렌은 지하 통로를 발견했을 때 수상한 냄새를 가득 맡았다. 물론 이런 시설이나 건물에 지하로 통하는 통로 하나둘쯤 있는 건 흔한 일이지만 이곳이 어디던가. 성자 행세를 하는 사기꾼이 있는 신전 아니던가.

둘은 손전등 불빛에 의지하며 어두운 통로를 헤치고 나아갔다. 오래된 지하 특유의 흙과 곰팡내가 올라왔다. 벽을 더듬던 쿤둘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범하군요. 저는 최소한 부비트랩 같은 것이 설치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러게요. 너무 평범해서 재미가 없네요. 지키는 사람도 없고.”

입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파울로는 경계를 멈추지 않았다. 쿤둘렌은 역탐지 당할 경우를 대비해 반경을 최소화해서 술식을 풀었다. 그러니 예상 밖의 일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었다.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거대한 백골 더미였다.

“뼈……?”

쿤둘렌이 손전등 불빛으로 백골 더미를 훑는 동안 파울로는 겁도 없이 뼈를 직접 만지작거리며 살펴보았다. 넓적다리뼈로 추정되는 뼈는 세로로 세워 보니 거의 파울로의 키만큼 컸다.

“이만한 크기의 동물이면…….”

“용이군요.”

두개골을 본 쿤둘렌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용골이 왜 여기 있는 걸까요.”

파울로는 그렇게 말하다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개골에 용주가 없는데요.”

용주가 없다는 말에 쿤둘렌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세피로스나 라케드의 이마에 있는 돌 모양의 용주는 용이라면 누구나 가진 일종의 신체 기관이었다. 용주는 용 체내의 마력을 순환하고 운용할 수 있는 매개체 역할을 하므로 어떤 이유에서든 용주가 없는 용은 사망하기 마련이었다.

“용주가 사망 후 없어진 걸까요, 아니면 없어졌기 때문에 사망한 걸까요.”

“글쎄요. 하지만 이렇게 백골이 된 것을 보면 제법 오래된…….”

그 순간 쿤둘렌의 등줄기에 털이 곤두섰다. 그의 목걸이에 있던 자주색 마석이 마치 마법을 사용할 때처럼 뜨거워졌다. 마석은 술자인 쿤둘렌의 마력을 증폭시킨 것이 아니었다. 주변에 미량 있는 자연계의 마력을 끌어 들여 멋대로 증폭시키는 중이었다.

“파울로, 그 용골에서 떨어지십시오!”

그 말에 파울로는 구경하고 있던 뼈를 집어 던지고 얼른 쿤둘렌의 옆으로 물러났다.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조금 전까지 손에 들고 있던 뼈가 움찔거린 것 같았다.

“이런, 어서 여기를 벗어나야 합니다.”

“방금 뼈가 움직인 것 같은데…….”

쿤둘렌은 이미 뛰고 있었다. 그은 꾸물거리는 파울로에게 소리쳤다.

“뭐 합니까? 용주를 잃은 용이 용주를 대신할 것을 찾았으니 깨어날 겁니다!”

“용주를 대신할 것이라니 그게 뭔데요?”

“제 마석이요!”

그에 대답이라도 하듯 그들의 등 뒤에서 커다란 짐승이 포효하는 소리가 들렸다.

“맙소사…….”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뼈가 차례차례 맞춰지더니 그 위로 근육과 생체 조직들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번쩍이는 비늘이 돋아나는 것까지 확인한 파울로는 앞서 뛰던 쿤둘렌을 순식간에 따라잡았다.

용이 휘두른 꼬리가 벽을 때리는 소리가 났다. 파울로는 용이 덩치를 불리는 동안 통로에 꽉 껴서 못 움직이길 바랐지만 그것은 지나치게 희망적인 바람이었다. 완연한 모습을 갖춘 용은 벽을 부수고 있었다. 뒤에서 용이 벽과 천장이 무너트리며 쫓아오자 둘은 속도를 더 높였다.

“마석이 멋대로 마력을 증폭시켜 용을 되살렸습니다. 아니, 되살렸다는 말은 어폐가 있겠군요. 저 용은 그저 제대로 된 영혼이 없는 남아 있는 유전자 정보를 토대로 만들어진 유기체 덩어리일 뿐입니다. 그 정도는 합성으로 충분히 복원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쿤둘렌의 마석을 노리고 쫓아오는 것 같은데 그냥 마석을 버리면 어떨까요?”

“미쳤습니까?! 그러면 제 마석으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데요?!”

“그럼 용을 상대로 어떡합니까?!”

“생각보다 그렇게 나쁜 상황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이미 한번 죽었던 용입니다. 제대로 된 용주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마석과 공명해서 일시적인 생명을 얻은 것뿐이에요. 영혼이 돌아오지 않은 껍데기란 말입니다. 저 상태로는 오래 못 가요.”

“그렇다면 언제쯤 멈출까요?”

“그건 모르죠.”

용이 머리를 치켜들자 기어이 천장 바로 위에 있던 1층 바닥까지 뚫었다. 보다 못한 파울로는 대검을 뽑아 들며 뛰던 방향을 바꾸었다.

“엄호!”

굳이 말을 길게 하지 않아도 쿤둘렌은 파울로가 무엇을 할지 바로 알아채고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건물 잔해를 마법으로 멈추어서 길을 뚫어 주었다.

파울로는 자신에게 내리꽂히는 용의 앞발을 피해 긴 목을 쳤다. 하지만 검기를 실은 검임에도 불구하고 가죽만 찢긴 정도였다. 같은 자리를 두세 번 더 내리쳐야 완전히 목을 벨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용은 그것을 두고 보고만 있지 않았다.

“죽었다 살아난 놈이 뭐 이렇게 날쌔?”

쿤둘렌의 엄호를 받으며 검을 휘둘렀어도 파울로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용은 파울로를 상대하는 와중에도 쿤둘렌의 마석을 노리며 틈이 생기길 기다렸다. 용이 힘으로 밀어붙이자 파울로가 튕겨 나갔다.

다행히 제때 막아 내어 다치지는 않았으나 용과 거리가 벌려진 파울로가 다시 접근전을 벌이려는 차에 쿤둘렌과 눈이 마주쳤다. 쿤둘렌은 파울로에게 손을 들어 그를 진정시키더니 혼자 용을 향해 달려갔다.

기다렸다는 듯 용이 커다란 입을 벌렸고 쿤둘렌은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파울로는 그 모습을 아연하게 바라보다 용이 무너진 천장을 통해 1층으로 올라가려 하자 부랴부랴 그 뒤를 따랐다.

그 뒤는 미레아와 아리스가 본 대로였다. 아리스는 쿤둘렌이 맡긴 마석을 호주머니 안에서 만지작거리며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마석을 제게 준 것은 왜 그랬어요?”

“그야 마석은 마력이 더 강한 쪽에 감응하기 쉬우니 말입니다. 아리스 군의 마력은 용골보다 마석과 공명하기 더 쉬우니 용이 마석 때문에 다시 살아난다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사이 파울로는 삐딱한 자세로 줄레티아에게 심문하듯 물었다.

“그래서, 그런 고생을 했으니 용주를 잃은 용의 백골이 왜 여기 지하에 있었는지 이유라도 알아야 되겠수다.”

“그래, 나도 알아야겠다.”

파울로의 말에 갑작스럽게 끼어든 것은 예고도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라케드였다. 그 뒤에는 시오가 그들이 방에 들어가는 것을 막던 사제들과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줄레티아가 손을 들어 아랫사람들을 진정시키자 시오는 잡혀있던 팔을 보란 듯이 휙 빼냈다.

“일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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