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쿠오오!”
단단한 비늘 덕에 깊은 상처는 내지 못했어도 용이 몸을 떨었다. 그는 용이 움직이는 반동을 이용해 땅에 내려앉았다.
“파울로!”
“아…….”
용의 피가 묻은 자신의 대검을 고쳐 잡은 파울로는 미레아를 보고 앓는 소리를 내었다.
“망했다.”
그는 혼이 빠진 것 같은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용이 왜 여기 있어?!”
미레아의 물음에 파울로가 답하기도 전에 커다란 손이 날아왔다. 미레아와 파울로는 재빨리 피했고 아리스는 미처 대피하지 못한 일반인들에게 보호막을 쳐 주었다. 한 번 쾅 하고 내리치자 보호막이 크게 휘청거렸다.
용이 한 번 더 공격하려는 찰나 시오가 쏜 마탄이 공격을 퍼붓던 용의 손에 날아와 맞췄다. 하지만 관통하기는커녕 미약한 둔상만 남겼을 뿐이었다. 그래도 잠시나마 움직임을 멈추게 할 수는 있어서 그 틈에 미레아는 허겁지겁 질문을 퍼부었다.
“저 용은 대체 누구예요?”
“몰라!”
“왜 저렇게 이성을 잃었고?!”
“살아 있는 놈이 아니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살아 있지 않는데 어떻게 움직이는 건데요? 그런데 쿤둘렌은요?!”
쿤둘렌의 안부를 묻는 말에 파울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미레아는 심장이 철렁였다.
“설마…….”
파울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미친 마법사는…… 자의로 먹혔어.”
표현이 뭔가 이상해서 듣는 사람들은 어리둥절해졌다.
“머…… 먹혀? 지금 저 용이 쿤둘렌을 잡아먹었다고?!”
“그런데 자의로라니?”
- 자살이라도 했다는 소리야?
파울로가 말도 말라며 고개를 젓는데 용이 돌연 두 발로 서서 앞발로 5층의 외벽을 가격했다. 용에게 공격받은 건물 위쪽이 우르르 무너지면서 아래로 건물의 잔해가 무차별적으로 떨어졌다. 아리스가 팔을 허공으로 뻗으며 외쳤다.
“멈춰!”
떨어져 내리던 벽돌과 잔해들이 사람들의 머리 위에서 그대로 정지했다. 연이어 떨어지는 잔해들도 마찬가지였다.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잔해들을 딛고 미레아가 5층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용은 마치 무언가를 찾고 있는 듯 5층에 머리를 박고 손으로 여기저기를 헤집고 있었다. 용이 한눈을 파는 사이 미레아가 회심의 일격을 넣으려는 순간, 용의 움직임이 주춤하더니 배가 불룩해졌다.
용은 앞발로 자신의 배를 긁더니 가슴을 움켜쥐고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다 발작을 하듯 두서없이 땅과 건물을 퍽퍽 치며 고통에 몸을 떨었다.
“일반인들은 모두 도망쳐! 죽고 싶어?”
아리스는 날아오는 파편을 쳐 내며 자신의 등 뒤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사람들에게 명령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앞다투어 도망가기 시작했다.
용은 난폭하게 날뛰다 종국에는 눈물까지 흘리며 낑낑거렸다. 셋은 긴장을 놓지 않고 용의 이상 행동을 주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용의 가슴팍 안에서 무언가 움직이기라도 하는 듯 꿀렁꿀렁하더니 겉가죽을 뚫고 무언가가 튀어 나왔다. 자세히 보니 털이 난 손이었다. 그러자 용은 부르르 떨더니 흰자위를 까뒤집고 커다란 머리를 땅에 툭 떨궜다.
“저건 또 뭐야?”
아리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것을 응시했다. 손의 주인은 뻥 뚫은 구멍을 양손으로 잡고 찢기 시작했다. 도중에 갈비뼈가 걸렸는지 주먹을 퍽퍽 내리치자 단단한 갈비뼈가 쿠키처럼 힘없이 부러졌다. 구멍이 어느 정도 크기까지 커지자 손의 주인이 용의 흉강에서 튀어나왔다.
그것은 피와 정체불명의 점액을 뒤집어쓴 쿤둘렌이었다.
“으아악!”
그 충격적인 비주얼에 셋은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살아 있었어!”
파울로의 말에 쿤둘렌이 멋쩍게 웃었다.
“당연히 살아 있지 않겠습니까. 몸에 흠집 하나 없이 산채로 목구멍을 기어들어 갔는데.”
“미쳤습니까?! 대체 무슨 사고를 거치면 용의 입안으로 기어들어 갈 생각을 해요?!”
“이성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그게 가장 현실적인 답안이었습니다.”
쿤둘렌은 휴대용 물통을 열어 얼굴을 뒤덮은 점액을 물로 씻어 내었다.
“용의 가죽은 단단하고 다양한 자극에 내성이 있습니다. 검이나 화기로 상대하기에는 한계가 있고요. 하지만 내부는 일반 동물과 비슷하죠. 연약하다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안쪽에서 공격하는 게 가장 큰 타격을 줄 수 있지요.”
미레아와 아리스의 물통까지 빌려 얼굴을 말끔하게 닦아 낸 쿤둘렌이 엉킨 수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빨에 다치지 않게 조심하며 입안으로 들어가 위까지 침입한 후 위 벽을 찢고, 횡격막을 찢고, 폐를 들쑤신 다음 심장을 쥐어짜 터트렸습니다. 탈출은 보시다시피 속에서 근육과 가죽을 찢어서…….”
쿤둘렌의 침착한 설명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똑같은 생각을 했다.
‘미친 마법사!’
경악하고 있는 아리스에게 쿤둘렌이 어깨를 으쓱였다.
“마법으로 신체를 강화하는 것이 제 특기입니다. 근력을 수십 배까지 증가시킬 수 있지요. 아무래도 모의 훈련 때는 보여 드릴 기회가 없어서 이제야 선보이게 되었네요. 제가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마음이 깃드는 법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마법사가 차력 격투술을 쓴다!’
쿤둘렌의 양손에서 위협적으로 빛나는 건틀렛을 보며 아리스가 속으로 기함했다. 거기까지 말한 쿤둘렌은 돌연 자신의 마석 세 개를 양손에 낀 건틀렛과 목걸이에서 각각 분리해 아리스에게 넘겼다.
“제 마석들입니다. 아리스 당신이 갖고 있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아리스는 깜짝 놀라 쿤둘렌을 바라보았다. 마석은 마법사들의 목숨 줄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훌륭한 마법사라 해도 마석을 매개로 마력을 증폭하지 못한다면 무용지물이었다. 그런데 쿤둘렌이 이런 비상 상황에서 그걸 아리스에게 넘기는 저의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이걸 왜 제게…….”
“그렇게 보지 마십시오. 아주 주는 것은 아닙니다. 나중에 제가 돌려 달라 그럴 때 돌려주시면 됩니다.”
쿤둘렌은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아리스는 더 묻지 않고 각각 자주색, 붉은색, 호박색으로 빛나는 마석들을 자신의 겉옷 안쪽 주머니에 안전하게 넣었다. 그사이 용을 쫓아 5층으로 올라갔었던 미레아가 건물 잔해들 위로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그보다, 대체 저 용은 누구예요? 아까 살아 있는 놈이 아니라고 한 건 또 무슨 말이고.”
미레아의 질문에 파울로가 짜증스럽게 자신의 앞머리를 손으로 헝클어트리며 말했다.
“그러게나 말이다. 이 용이 누구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고…… 살아 있는 놈이 아니라고 한 건……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어.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용이 아니었으니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으나 대답하는 파울로 역시 제대로 상황 파악이 안 돼 정신이 없어 보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미레아가 용이 정말 죽었는지 검 끝으로 쿡쿡 찔러 보았다. 움직임이 없자 그제야 안심하고 일어난 미레아는 지붕이 다 뜯겨 나간 5층 건물을 보며 중얼거렸다.
“마치 5층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 같았어요. 대체 왜 그랬을까요?”
“5층이면 우리가 수상하다고 생각했던 그곳이잖아.”
파울로 대신 아리스가 대답하자 쿤둘렌이 잠시 생각하더니 심각한 얼굴로 아리스에게 지시했다.
“이 주변으로 마력 제어 필드를 형성해 주십시오. 제가 할 수도 있지만 다른 마력을 억누르려면 아리스 군의 강한 마력이 더 효과적이니 부탁드립니다.”
그 말에 아리스는 무슨 일인지 묻고 싶었지만 쿤둘렌의 얼굴은 다소 다급해 보였다. 아리스가 벼락치기로 배운 마법식을 용의 주변으로 새겨 나가고 있는데 누군가의 비명이 들렸다.
“허어억! 마, 마수다!”
미레아와 일행들이 소리가 난 곳을 보자 줄레티아가 예의 지팡이를 양손으로 움켜쥐고 있었다.
“이봐요, 이건 마수가 아니…….”
도끼눈을 뜨고 항의하려는 미레아를 아리스와 파울로가 막아섰다.
“예, 마수입니다. 마수가 어쩌다 이 도시 한복판에 나타났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말을 듣고 뒤늦게 확인하니 놀랍게도 용의 사채는 마치 핵이 파괴된 마수처럼 재가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정말 용이 아니라 마수였단 말이야?’
미레아가 당황해서 파울로와 쿤둘렌을 번갈아 가면서 보았다. 쿤둘렌은 손가락을 입가에 가져다 대더니 용의 시신 쪽을 가리켰다. 일단 핵이 파괴되면 흔적도 없이 전부 사라지는 마수와는 달리 용은 뼈가 남아 있었다. 늑골 몇 개는 쿤둘렌이 부러트린 모양 그대로였다. 지지하던 근육과 연부조직들이 없어지자 뼈는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미레아는 침을 꼴깍 삼켰다. 역시 마수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진짜 용이라고 하기엔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았다.
“이럴 수가. 마수에게서 저희 사제들을 구해 주셨군요. 신전을 대표해서 감사드립니다. 도대체 어떻게 들어온 것인지…….”
줄레티아가 허리를 숙였다. 파울로 역시 일행을 대표해 예를 취했다.
“이 근방에는 마수가 자주 나타나지 않습니까. 사고지요.”
파울로가 사고란 단어에 유독 힘을 주어 말했다.
“그런데 보상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지만, 저희도 상당히 피곤하군요. 신전에서 조금만 쉬었다 갈 수 있을까요?”
뜻밖에도 줄레티아는 불쾌한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파울로와 줄레티아 사이에 무언의 눈빛이 오갔다. 그는 뒤에서 대기 중이던 다른 사제들에게 손짓하여 손님들이 쉴 공간을 준비하라 일렀다. 그리고 세 명의 남자들에게 큰 천을 가져와 남은 뼈를 덮으라 지시하고 남은 사람들은 무너진 신전 일부를 추가로 무너지지 않게 임시로나마 보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들이 명에 따라 사라지자 혼자 남은 줄레티아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표정을 바꾼 줄레티아에게 파울로가 피식거리며 웃었다.
“내 생각보다 상당히 협조적이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