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계약 조건에 이런 일까지 해야 한다는 말은 없었던 것도 억울한데 날 수 있는데 벽을 타야 한다니.”
아리스가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미레아는 4층 외벽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서 열고 들어가기 적당한 창문을 찾으며 대꾸했다.
“있잖아, 내가 요즘 느낀 게 있는데.”
“뭔데.”
“너 은근히 말이 많아.”
“어쩔 수 없어. 네가 참아.”
미레아는 기가 막혀 짧게 탄식했다. 아리스가 손가락을 횡으로 긋자 마법이 캐스팅되면서 창문이 조용히 열렸다.
“이 복도엔 아무도 없나 봐.”
창문에 머리만 빼꼼 디밀어 주변을 살핀 미레아가 안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리스는 미레아를 따라 들어가다 위화감을 느꼈다.
“뭐지?”
“왜?”
“마력의 흐름이 이상해.”
그는 핑거 스냅으로 마력을 일으켰다. 캐스팅에 묶이지 않은 마력은 사방으로 퍼져 흩어지기 마련인데 푸른 스파크는 한곳으로 흘러갔다. 미레아는 아리스의 등을 툭 쳤다.
“힘 빠지게 엄한 곳을 뒤지지 않아도 돼서 좋은걸.”
- 아리스, 미레아, 너희 지금 안으로 들어간 거 맞지?
시오의 통신이 들어왔다.
“응,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릴 것 같아.”
- 아니,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아. 이쪽에서 너희가 확인되지 않아.
“우리 창가에 있어. 손전등 불빛 안 보여?”
- 안 보여. 그런데 실내가 아예 안 보이는 게 아니고 이쪽에서 창문 안쪽을 보면 빈 복도가 보여. 실내를 확인할 수 있는데 너희 모습만 안 보인다고.
“투영 마법이야.”
아리스가 혀를 쯧 찼다.
- 이런 식이면 너희를 지원해 줄 수 없어.
“괜찮아. 우리끼리 알아서 해 볼게. 파울로는 언제 합류하는 거지?”
- 미안한데 너희끼리 조사하고 있어. 우리가 1층에서 뭘 찾았게?
시오의 통신을 듣고 있던 파울로가 끼어들었다. 아리스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대답했다.
“지하로 통하는 비밀 통로?”
- 어떻게 알았어?
“엄청 뻔하잖아요. 이런 건물은 꼭 비밀 통로가 있기 마련이지요.”
- 어쨌든 그런 고로, 합류는 당분…… 힘…… 다…….
“파울로?”
- 있…….
“파울로, 들려요? 파울로?”
파울로의 목소리가 기계음에 묻혀 제대로 들리지 않아 아리스는 그를 연달아 불렀지만, 그의 통신기에서는 응답이 없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미레아는 자신의 통신기를 껐다 다시 켜고는 한 번 더 파울로를 호출했다.
“파울로?”
- …….
그래도 여전히 응답이 없자 미레아는 시오에게 채널을 바꿨다.
“선배, 파울로랑 통신이 끊겨서 그런데 그쪽에서는 연락이 돼?”
- …….
“염병. 통신 장애네.”
미레아는 애꿎은 통신기를 손으로 찰싹찰싹 때렸다.
“파울로 대장이 지하로 들어갔다면 무언가 통신에 간섭한 것이 아닐까? 여기도 이 정도 마력이면 의도적으로 통신 장애를 일으키기 충분하거든.”
“어떡한담.”
파울로의 지시를 받을 수도 없고, 시오의 지원도 기대할 수 없었다. 미레아는 난처해져서 관자놀이를 긁었다. 그때, 아리스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수상한 냄새를 맡았는데 여기서 가만히 지시만 기다릴 거야, 사냥개?”
그 도발적인 말에 미레아의 눈이 번뜩였다.
“난 사냥개. 하지만 목줄 따윈 없지. 난 자유로운 사냥개!”
그렇게 선언한 미레아는 조금 전 마력이 흘러간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라케드가 들으면 또 큰일 날 소리를 한다 생각하며 아리스는 그 뒤를 따랐다.
“자, 무얼 그렇게 숨기시나.”
둘은 중간중간 아리스의 마력이 흘러가는 방향을 확인하면서 손전등으로 어두운 복도 구석구석을 살피며 나아갔다. 그러다 어느 방문 앞에서 멈췄다. 마력이 문틈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문고리를 돌리니 잠겨 있었다. 창문을 열었던 것처럼 손가락을 횡으로 그어 마법으로 문을 열려다 아리스는 멈칫했다. 물리적인 잠금뿐만이 아니고 잠금 마법이 걸려 있었다. 그는 술식을 해체하며 작게 혀를 찼다.
“대체 무슨 일을 하길래 술식을 이렇게 온갖 데에 다 설치한 거야? 이 정도면 돈도 돈이고, 술자에게도 부담이 심할 텐데.”
문을 열고 들어간 곳은 줄레티아의 집무실로 보였다. 불이 꺼진 방 안에는 예배 때 걸치는 사제복과 성서들로 가득 찬 책꽂이가 있었다.
업무용 책상 옆에는 사제들이 쓰는 기다란 지팡이가 비스듬하게 세워져 있었다. 아침 예배 때 줄레티아가 가지고 있던 것이었다. 아리스의 키보다 훨씬 긴 지팡이는 제식용이기 때문에 화려한 장식이 많았다.
“이거다!”
아리스가 지팡이를 덥석 잡았다.
“흘러가던 마력의 목적지가 바로 이거야.”
“좋아, 넌 그걸 조사해. 나는 이쪽을 볼게.”
지팡이를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는 아리스 옆에서 미레아는 책꽂이를 뒤졌다.
“이거 아까는 마력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 자세히 볼 생각을 못 했는데. 마석이라도 있나?”
아리스는 지팡이를 손가락 끝으로 톡톡 건드려 보았다. 그사이 미레아는 책꽂이에서 책등이 거꾸로 꽂힌 책들을 발견했다. 미레아는 그것을 뽑아 보고는 씩 웃었다.
“이거 봐. 마법학개론 책이야. 사제가 마법을 배워서 뭐에 쓴다고 이런 게 다 있담? 가짜 성수를 만들어 낼 용도가 아니라면 말이야.”
미레아는 신나게 아리스를 툭 쳤는데 그의 태도가 이상했다.
“내가 잘못 생각했어…….”
아리스가 벼락이라도 맞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마력이 일정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을 보고 마력을 흡수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반대였어. 마력을 방출하고 있는 무언가가 있는 거야.”
“왜?”
“이 지팡이, 아까는 몰랐는데 술식이 새겨져 있어. 마력만 공급하면 바로 발동하게 말이야. 아까 물벼락을 내린 것과 같은 종류야. 그런데 줄레티아는 마석으로 마력을 증폭해야 술식을 발동시킬 수 있어.”
“그런데?”
“술식을 발동시킬 마력을 줄레티아에게 공급받은 것이 아니라면 다른 공급원이 있다는 소리 아니겠어?”
“그럼 그 공급원이 뭔데?”
“나도 모르지? 하지만 이 지팡이는 마력을 흡수하는 것이 아니야. 마력은 단순히 이 지팡이 주변에 머물고만 있어. 지금 무언가에 연결되어 있다고. 아침에 줄레티아가 나를 축복해 주었을 때 내가 눈치 못 챈 이유는 가짜 성수를 만들어 내느라 이 지팡이 주변에 모여 있던 마력을 이미 써 버린 상태였던 거지.”
아리스는 앞머리를 손으로 헤집었다.
“그리고 마력 공급원이 뭔지는 몰라도 보통의 것은 아니야. 이렇게 끝없이 마력을 발산할 수 있는 물건은 이 세상에 얼마 없어.”
미레아는 마법학개론 책 모퉁이로 머리를 긁적이며 결론지었다.
“뭔지는 몰라도 우리가 왔던 길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단 소리지?”
“맞아.”
“뭐, 그래도 영 헛짚은 건 아니었네. 그나저나 단순한 사이비 사기꾼 양아치인 줄 알았는데…….”
미레아는 뽑았던 책들을 원래 위치에 돌려놓았다. 둘은 침입했던 흔적을 지우고 방을 나왔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아리스는 중얼거렸다.
“이 건물 5층까지 있었지?”
“밖에서 보기엔 그랬지.”
“4층은 사제들의 업무 공간이고 그들이 생활하는 기숙사 건물이 따로 있는 거면, 5층 용도는 뭐지? 아무래도 마력이 위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것 같은데.”
“용도라면 4층이랑 비슷하지 않을까? 아니면 창고나.”
거기까지 말한 미레아는 우뚝 멈춰 섰다.
“그럼 파울로가 간 지하에는 대체 뭐가 있는 거지?”
그때,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건물이 울렸다. 둘은 반사적으로 자세를 낮추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지진?”
“아냐, 진동이 아래에서 온 건 맞지만 이 건물만 울린 거야.”
쿵쿵.
아리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번엔 연달아 울렸다. 다른 층에서 사람들이 작게 비명을 지르거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레아는 잠입 중이라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봤다. 밤에 순찰과 순시를 돌던 사람들이 건물 밖으로 우르르 몰려나오는 것이 보였다.
“시오 선배! 무슨 일이야?!”
- 그건 내가 묻고 싶다. 무슨 일이야? 건물이 울리던데.
통신이 연결된 시오도 어리둥절한 목소리였다. 아리스도 창가에 붙어 상황을 살폈다.
“밖에서 확인되지 않았으면 지하인가?”
“파울로!”
미레아가 다급하게 호출했지만, 통신기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 너희 둘 당장 그 건물에서 나와!
“하지만 파울로가!”
- 지금 대장 챙길 때가 아니야! 밖에 뭐가 있는지 보라고!
쿵쿵거리는 진동이 더 거세지더니 무언가 우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리스는 앞뒤 생각하지 않고 미레아를 붙잡아 창밖으로 집어 던지고 자신도 뛰어내렸다.
“야, 인마! 자기는 날아서 착륙하고 나는 집어 던지고!”
지상 2m 높이에서 둥둥 떠 있는 미레아가 검은 날개를 접는 아리스에게 버럭 성질내었다. 아리스가 예고도 없이 마법을 푸는 바람에 엉덩방아를 찧어 그것도 항의하려던 차에 건물 안에서부터 벽을 부수면서 나오는 커다란 무언가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워…….”
아리스와 미레아의 턱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저게 뭐야?”
“쿠오오오오-!”
마치 아리스의 물음에 대답하듯 괴물이 포효했다. 미레아는 입을 달싹거리다 간신히 단어 하나를 쥐어짜 내었다.
“용…….”
“뭐?!”
아리스가 깜짝 놀라 되묻자 통신기를 통해 시오가 다급하게 소리를 지르는 것이 전달되었다.
- 용이다!
“저게?!”
괴물은 자신이 용이라고 증명하는 것처럼 피막으로 된 날개를 쫙 펼쳤다. 그리고 투레질하듯 머리를 털며 목을 쭉 빼 들었다. 그러자 신전의 5층 높이만큼 긴 체고가 드러났다. 용이 계속 머리를 털던 이유가 있었다. 누군가가 용의 머리에 난 뿔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용이 날개를 퍼덕거리자 뿔을 놓고 목을 미끄러지듯 타고 내려와 검을 날개에 찔러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