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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따라 종말까지-42화 (42/257)

42화.

아리스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마력의 흐름을 기민하게 읽을 수 있어서 알아차린 사실이었다. 그들이 주변 분위기에 맞지 않게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기 시작했는지 힐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라일라가 눈치를 주자 그들은 적당히 다른 신도들을 흉내 냈다.

“어쨌든, 역시 수상하다 이거지.”

미레아는 리비엘로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신녀님께서 나서 주셔야겠어.”

예배가 마무리되자 줄레티아에게 직접 축복을 받고자 하는 신도들이 긴 줄을 이었다. 신도가 줄레티아의 앞에 무릎을 꿇으면 줄레티아는 신도의 이마를 손으로 짚고 성호를 그었다.

리비엘로와 그 일행들은 일부러 제일 마지막까지 기다렸다가 차례가 되자 리비엘로는 무릎을 살짝 굽히며 예를 취했다.

“서리 여신의 종, 신녀 리비엘로 람이 성인 줄레티아 님을 뵙습니다.”

리비엘로는 인사를 하며 서리 교단의 신녀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신원 보증용 패를 들이밀었다. 처음 보는 얼굴에 줄레티아는 조금 당황한 듯 보였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서리 여신의 종, 성인 줄레티아 바라함이 신녀 리비엘로 람을 뵙습니다.”

줄레티아는 리비엘로와 그녀의 뒤에 서 있는 다른 사람들을 보고는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신녀님께서는 어쩐 일로 오셨는지요.”

“다름이 아니고 저희는 다른 도시를 향하던 길이었는데 잠깐 들른 이곳에서 줄레티아 님의 명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저 역시 서리 여신을 모시는 자. 서리 여신의 뜻깊은 힘으로 이 도시를 지킨 성인을 꼭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내세울 만한 능력이 아닙니다.”

줄레티아는 쑥스러워하며 얼굴을 붉혔다.

‘지금까지 내 이름까지 묶어서 실컷 내세웠지 않냐.’

뻔뻔한 연기에 아리스는 속으로 비웃었는데 리비엘로의 연기력도 제법 상당했다.

“저는 이제 막 교단에 입적한지라 신성력을 느끼는 것도 간신히 하는 단계랍니다. 여신의 권능으로 대량의 성수를 만들어 내는 줄레티아 님과 비교하는 것은 실례되는 일이지요.”

그러면서 어리숙하게 웃었다. 누가 봐도 아직은 여러모로 미숙한 수습 신녀의 모습이었다.

“성인의 자리에 오르신 분께 격려의 말씀 한마디 듣는 것만으로도 기쁘답니다.”

“제가 다 영광입니다. 신녀님께서는 어느 신전 소속이신지요.”

“워낙 시골이라 말해도 모르실 거예요.”

빈말로나마 라슈발렌이 직속으로 관리하는 록산이라는 도시의 신전 출신이라고 입이라도 털었다간 입막음으로 줄레티아에게 어떤 꼴을 당할지 몰랐다. 리비엘로는 정말로 듣지도 보지도 못한 지역의 이름을 대어 줄레티아의 경계심을 낮췄다.

리비엘로가 앞에 무릎 꿇자 줄레티아가 성호를 긋고 축복을 내려 주었다. 다른 일행들 역시 찝찝했지만 축복받는 시늉은 해야 했기 때문에 똑같은 절차를 거쳤다.

“그런데, 이건 작은 호기심입니다만.”

마지막으로 축복을 받은 아리스가 줄레티아에게 말을 걸자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5년 전 루데키아스를 실제로 보셨다 들었습니다. 그가 정말로 마수를 몰고 이 도시에 나타났습니까? 아, 줄레티아 사제님을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당시 상황이 어땠는지 궁금해서요.”

일행들은 그에게 짧게 책망의 눈빛을 던졌다. 십 대 소년일 당시의 루데키아스 대공자의 얼굴은 대중에게 알려진 상태였다. 5년 이상이 지나 인상이 조금 변했다 해도 소년 시절의 얼굴을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고글을 쓰고 있지만 그런 건 얄팍한 눈가림에 불과했다.

그들이 아리스를 이 자리에 데리고 온 것은 수상한 부분은 하나라도 더 알아차리기 위함이었지 이렇게 나대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하지만 줄레티아는 별다른 의심 없이 대답했다.

“제 입으로 말씀드리기 민망하지만 아무래도 소문이 과장된 면은 있지요. 하지만 루데키아스 대공자가 마수를 몰고 온 것은 사실입니다. 신성력으로 결계를 펼쳐 그를 막았습니다.”

“그랬군요. 그가 대체 왜 이 도시에 왔을까요?”

“그건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자의 생각을 어찌 범인이 알겠습니까. 아마 살육에 미쳐서 그런 것이 아닐까요?”

미레아는 이번에야말로 긁어 부스럼을 만든 아리스가 원망스러웠지만 정작 당사자는 평이한 어조로 말했다.

“맞는 말씀입니다. 대공자가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죠.”

그리고는 가볍게 묵례했다.

“실례했습니다.”

“별말씀을요.”

리비엘로는 할 수 있다면 줄레티아를 더 붙잡아 두고 싶었지만 마땅한 핑곗거리를 찾을 수 없었다. 이 이상 캐물었다간 줄레티아의 의문만 돋을 뿐이었다. 시오 역시 리비엘로에게만 보이게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철수하잔 신호를 보냈다. 리비엘로는 다시 예법에 맞게 허리를 숙였다.

“저희의 여정에 축복을 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께 위안이 되셨으면 합니다.”

* * *

신전에 다녀온 사람들의 보고를 받은 파울로와 쿤둘렌의 표정이 심각했다.

“역시 그냥 넘길 수 없겠는데.”

“그렇다 해도 그 사기꾼, 아리스의 얼굴도 못 알아보던데 은근히 허술하지 않아요? 생각보다 별일 아닐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가볍게 대꾸한 라일라의 말에 파울로는 고개를 저었다.

“저런 맹목적인 광신도들을 거느리고 있는 사람이 제일 무서운 법이야.”

그렇게 말하며 파울로는 라케드의 눈치를 힐끔 보았다. 아직도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라케드가 아무 소리 없는 것을 보고는 그는 안심하며 말을 이었다.

“잠입해서 조사하자. 어떤 식으로 마법을 쓰는지 확인해야겠어. 불확실한 요소는 최대한 없는 것이 좋으니까 변수를 만들지 말자고.”

“언제요?”

“오늘 밤.”

“너무 급해요.”

시오가 걱정스럽게 말했지만, 파울로의 생각은 달랐다. 명백하게 사기를 치고 있는데 이러다가 범죄까지 손을 대게 되면 지구대가 아니라 중앙 정부에서 이쪽을 신경 쓰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게 파울로의 의견이었다.

“황제가 이쪽에 신경을 쓰게 만들어서 좋은 일은 없지. 게다가 우리에겐 시간이 많지 않아.”

잠자코 있던 라케드가 입을 열었다.

“부식 정화기를 설치할 지역이 아직도 12군데나 남았어. 기간은 80일 정도가 남았고. 서두를 수 있을 때 서둘러야 뒤에 가서 고생 안 한다.”

그는 읽고 있던 책을 탁하는 소리가 나게 접고는 본격적으로 끼어들었다.

“그러니까 고작 사이비 사기꾼으로 일을 질질 끌지 말란 소리다. 신속하게, 조용히 처리해.”

그 말에 시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신도들이 그렇게 많은데 어떻게 조용히 처리해요?”

“어려우면 협박이라도 해서 우리 편으로 회유해 봐.”

“어찌 되었든 결국 뒷조사는 해야 한다는 소리네요.”

미레아가 앓는 소리를 하는 사이 파울로는 벌써 작전을 세우고 구성원을 선별했다.

“알아들었지? 잠입 조사는 나를 포함해서 쿤둘렌, 미레아, 시오, 아리스. 이렇게 다섯이 간다.”

“잠입인데 쿤둘렌이……?”

몸이 날랜 사람 위주로 팀을 꾸려야 하는 와중에 마법 전담인 쿤둘렌이 끼자 아리스가 의문을 표했다. 비웃음의 의미가 아니고 쿤둘렌의 안전을 걱정한 것을 이해한 쿤둘렌이 쑥스럽게 웃었다.

“이런, 생각해 보니 합동 훈련할 땐 보여 드릴 기회가 없었군요.”

그의 근육이 위협적으로 꿈틀거렸다.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드는 법. 제가 전투부인 것은 마법 캐스팅이 빠르단 이유만 있는 것이 아니랍니다.”

“네가 합동 훈련할 때를 제외하면 훈련장에 도통 나오질 않아서 한 번도 못 봤구나? 기대해.”

미레아의 말에 아리스가 어리둥절하며 대꾸했다.

“합동 훈련 끝나기 무섭게 바로 마법 수업 끌려가서 숙제하고 있었는데 뭔지 알아야 합을 맞출 거 아니냐.”

“아, 괜찮습니다. 제가 맞추면 되니까요. 그사이 아리스가 싸우는 방식도 많이 봐 와서 익숙하니 문제없을 겁니다.”

쿤둘렌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그날 밤. 검은 그림자 넷이 신전의 담벼락을 타 넘었다.

몸이 제일 가벼운 미레아가 담 아래에서 쿤둘렌의 손을 디딤대 삼아 도약하자 쿤둘렌이 그 반동으로 미레아의 몸을 더 높이 띄워 주었다. 미레아가 담에 올라 밧줄을 내려 주자 쿤둘렌을 선두로 파울로와 아리스가 넘어왔다.

- 괜찮아. 그쪽에 경비 없어.

인근 탑에 잠복한 저격수, 시오가 저격용 총의 조준경으로 주변 상황을 살피며 통신기로 안내했다.

- 아까도 말했듯 3층까지는 신도들 공간인 것 같았고 4층까지는 올라가야 뭐가 나올 것 같아요. 창문 너머로 사람 지나다니는 것도 3층에서는 별다른 이상한 걸 못 느끼겠는데 4층은 이상하리만치 잠잠하거든. 그런데 지금 정문에는 경비가 둘 있네. 자세히 보니까 무장을 했네요? 총을 가지고 있어요. 벽을 타고 올라갈 수 있겠어요?

“좀 더 쉬운 길은 없어?”

- 내부 구조도 모르는데 어쩔 수 없잖아요. 뒷문을 찾아보시던가요.

파울로는 조금 생각하다 결정했다.

“나랑 쿤둘렌은 1층을 통해 가 볼 테니 미레아랑 아리스는 벽을 타고 4층으로 직접 가.”

“왜 우리 둘만?”

“기동력은 너희가 제일 좋으니 먼저 가 있으란 소리야.”

- 걱정하지 마, 미레아. 너희가 움직이는 건 이쪽에서 볼 수 있으니까 위험 요소는 확실하게 제거해 줄게. 어차피 마취 탄이라 상대는 죽지도 않는다고. 오히려 대장이랑 쿤둘렌은 내가 지원할 수 없으니 더 걱정이다만.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 거야.”

파울로가 시건방지다며 시오를 타박했다. 그들은 경비를 피해 움직여 1층 테라스가 비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곳에서 둘로 갈라져 파울로와 쿤둘렌은 1층 테라스를 통해 실내로 침입했고 미레아와 아리스는 벽을 타기 시작했다.

둘의 능력으로 4층 정도는 그리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었다. 다만, 위, 아래로 경비가 지나갈 때마다 숨소리를 죽이고 벽에 찰싹 달라붙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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