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그 말에 라케드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미레아, 너는 감이 좋은 편이지.”
“네? 네. 그렇죠.”
“네가 그렇게 느꼈다면 이유가 있겠지. 혹시 이후에 오늘처럼 기시감이 드는 일이 생기면 바로 내게 말하도록.”
그 말에 미레아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라케드를 바라봤다. 헛소리 취급하거나 착각하지 말라며 일갈할 줄 알았는데 라케드가 자신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
“알겠습니다.”
대답을 듣자마자 라케드는 바로 평소의 태도로 돌아왔다.
“그럼 가 봐. 나도 좀 쉬게.”
미레아가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서자 아리스도 그녀를 따라 방을 나서려 했다.
“이봐, 아리스. 너 니콜라우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라케드의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아리스는 발을 멈추고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니콜라우스라면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
“최초의 데르카이드 백익(白翼) 니콜라우스 말이다.”
아리스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대답했다.
“아마 남들이 알고 있는 수준과 비슷할걸요? 혹시 어느 정도까지 알고 있어야 하는 상황인가요?”
“그렇진 않다.”
그렇게 대답한 라케드는 손짓만으로 그들에게 볼일 끝났다는 의사를 전했다. 미레아와 아리스는 서로 눈짓을 교환했지만, 라케드의 태도가 영문 모르겠다는 건 마찬가지였다.
둘이 나가고 방문 너머로 발소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파울로와 둘이 남은 라케드는 형형한 얼굴로 마른세수하였다.
“설마 니콜라우스의 짓이라 생각하는 건가요?”
파울로의 물음에 라케드가 짓씹듯 투덜거렸다.
“이게 우연이 아니라면 달리 누구를 의심하겠어.”
미레아가 느꼈다는 기시감의 이유를 찾으라면 분명히 그놈이다. 마수의 눈으로 그들을 들여다볼 수 있는 건 그놈밖에 없었다.
어차피 라슈발렌이 움직인 이상 그가 어떤 형태로든 개입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생각 이상으로 빨랐다. 오늘 일은 아마 경고겠지. 그가 원정대를 제대로 방해하려 나섰다면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피해도 미미했고 말이다.
“앞으로 어떡할까요?”
“괜찮아. 흑익이 우리와 있으니 계획대로 하면 돼.”
“우리가 그러도록 내버려 둘까요?”
“내버려 두지 않아도 해야지. 그리고 말했잖아. 우리에겐 흑익이 있다고.”
라케드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번에야말로 이 지긋지긋한 연을 끊자.”
오랜 세월을 살아온 용의 눈에는 짙은 피로감이 서려 있었다.
* * *
미레아를 방까지 바래다주는 길에 아리스는 가벼운 타박 아닌 타박을 들었다.
“너는 네 별명이 흑익이면서 백익 니콜라우스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으면 어떡해?”
“내가 그 사람에 대해 왜 알아야 하는데?”
“같은 데르카이드잖아. 최초의 데르카이드인데 상식으로라도 알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게다가 마치 일부러 그러기라도 한 듯 둘의 별명이 서로 대비되는 흑과 백. 재미있잖아?”
“그건 사람들이 제멋대로 붙인 거잖아. 나는 남들에게 흑익이라 불러 달라고 그런 적이 없고, 그건 니콜라우스도 마찬가지거든. 그리고 그런 말을 하는 너도 니콜라우스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그래?”
니콜라우스에 관한 주제에 심드렁한 아리스에게 미레아는 혀를 쯧쯧 찼다.
“뭘 모르는 소리. 나는 니콜라우스에 대해 좀 아는 편이라고. 누구와는 다르게 호기심이 많아서 관련 기록들을 들춰 봤거든. 그 사람이랑 관련된 이야기를 찾아보면 나름 재미있어. 이건 음모론이긴 하지만 그가 100여 년 전 자취를 감춘 이후 아직 살아 있다는 말도 있어.”
“니콜라우스의 행적이 끊긴 게 그가 28살일 무렵인데 그 이후 장수했다면 당연히 살아 있을 수 있지.”
“아냐, 내가 말한 건 하나도 늙지 않은 젊은 청년의 모습으로 살아 있다는 뜻이었어.”
“그런 건 대체 어디서 주워들었어?”
“우리 아빠한테.”
돌아가신 미레아의 아버지를 음모론자라며 흉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아리스는 그냥 흘려들으려 그랬다. 하지만 미레아는 새초롬한 얼굴로 그를 흘겨보았다.
“지금 내 말 하나도 안 믿지?”
“데르카이드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은 무엇이든 할 수 있지. 그런 음모론이 나오는 것도 이상하진 않아.”
“방금 그 말 엄청 거만하게 들리는데.”
“반어법이었어.”
작게 한숨 쉰 아리스는 말을 이었다.
“날 봐라. 하고 싶은 거 다 한 사람처럼 보여? 데르카이드라 해서 뭐든지 자기 멋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거든.”
“너, 하고 싶은 거 없잖아.”
갑자기 정곡을 찔린 아리스는 말없이 미레아를 노려보았다. 그들은 이미 미레아의 방문 앞에 도착했지만 맞붙어서 입씨름하기 바빴다.
“그렇게 봐도 하나도 안 무서워. 하고 싶은 게 없으니까 마이련 시골 촌구석에 박혀 있던 거고, 뭘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세피로스 밑으로 들어온 거잖아.”
가만히 듣고만 있자니 아리스는 반발심이 들었다.
“아니지. 하고 싶은 게 없어서가 아니라 최소한 인간다운 면모를 유지하려면 하면 안 된다는 걸 아니까 안 하는 거든!”
“아, 그래? 하고 싶은 게 뭔데?”
“세계 멸망.”
미레아는 얼마든지 농담을 받아 줄 준비가 되었지만, 아리스는 제법 진지한 목소리였다.
“내가 세계를 멸망시킨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그렇지 않다고 증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억울하지라도 않게 진짜 멸망시키고 말지.”
아무래도 진담인 것 같은 아리스의 말에 미레아는 하하 웃다가 정색했다.
“미친놈아, 그거 아니야.”
억울함에 사로잡혀 있던 아리스도 정색했다.
“그래서 아직 실행에 옮기지 않았잖아.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이미 망해 가고 있는걸. 그런데 나를 잡아 죽일 생각만 하는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야? 나 혼자 엿 될 바에, 물귀신처럼 다른 놈들까지 엿 먹이는 쪽을 선택할래.”
“내가 음모론자라면 넌 종말론자야.”
미레아는 관자놀이가 아파 왔다.
“행여라도 실행에 옮길 생각이라면 미리 말해 주길 바라. 나는 라슈발렌의 일원으로 너를 막아야 하는 의무가 있거든.”
“네 손에 죽는다면 영광이지.”
싱글거리며 대답한 아리스 덕에 미레아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긴 숨을 토해 내었다.
“얼른 방에 돌아가서 잠이나 자라.”
그 말에 아리스는 손으로 미레아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작별 인사를 했다가 한 대 맞을 뻔했다.
그렇게 긴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제5장 가짜 성인
루아드 제국의 국경을 넘자마자 마수 때문에 한바탕 홍역을 치른 클라인 원정대는 걱정과는 다르게 여정을 떠난 지 17일째까지는 순조롭게 일이 진행되었다.
대신 북서쪽을 포기하고 동남쪽 지역부터 돌기 시작했다. 처음엔 라케드가 초반부터 시간을 너무 잡아먹었다며 짜증을 내는 바람에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 신경이 곤두서 있었지만 벌써 세 군데에 부식 정화기 마도구를 설치했고 그동안 칼부림이 필요한 일은 없었다.
처음 목표는 3개월 동안 15군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 정도 속도면 빠른 편이었다. 덕분에 미레아의 팔 부상은 무리 없이 깨끗하게 나을 수 있었다. 원정대는 18일째 된 날에 네 번째 목적지이자 클라인 인근의 도시인 티몬에 도착했다.
클라인은 제국의 북쪽에 있는데 북으로 갈수록 날씨가 따듯해졌다. 남반구에 위치한 로아메나 대륙은 북으로 갈수록 적도에 가까워져 날씨가 온화했으며 덕분에 클라인은 제국 제일의 곡창지대였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 같은 지역이 마수 때문에 부식되었으니 제국의 입장에선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되찾을 만한 가치가 있는 땅이었다.
티몬은 부식 정화기를 설치할 예정인 지역 중 제일 큰 도시였다. 하지만 클라인과 가장 인접한 도시 중 하나였기 때문에 마수를 걱정한 시민들이 대거 빠져나가는 통에 한 집 건너 한 집은 빈집이었다. 그것이 원정대 일행들이 알고 있는 정보였다.
그런데 막상 티몬에 도착하니 듣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그런 것치고 도시 자체는 엄청 활기찬데?”
시오가 의아하단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의 손에 들린 커다란 빵 봉지에서 미레아와 라일라가 부지런히 달달한 빵을 꺼내 먹고 있었다. 숙소에 짐을 풀고 시간이 남자 시오를 선두로 미레아, 라일라, 리비엘로, 아리스가 호기심에 시내를 구경하러 나온 것이었다.
일행은 도시가 활기차다는 말에 동의하면서 두리번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인구수가 줄었는데도 티몬의 분위기는 다른 대도시 못지않게 활기찼다. 시장은 북새통을 이루었고 사람들 얼굴에는 구김이 없었다.
“티몬은 원래 제국 제일의 곡창지대인 클라인 근교였기 때문에 제국 내에서 내로라하는 양조장이 밀집된 지역이었어. 클라인과 바로 연결되는 도로와 열차도 있고 도심지에 큰 강도 흐르기 때문에 항로까지 있는 덕분에 육로까지 하면 교통도 제법 발달했지. 워낙 큰 도시였기 때문에 아무리 인구가 줄었다 해도 남아 있는 시민들만으로도 이 정도는 유지하는가 보군.”
“역시 현지인.”
라일라가 감탄했지만, 아리스도 이 상황은 의외였다.
“그렇다 해도 내 정보는 대부분 5년 전 상황들이야. 설마 클라인이 그 지경이 되었는데도 이 정도까지 도시의 기능을 유지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항로는 몰라도 열차는 끊겼을 텐데 말이야.”
“그렇다면 우선 정보 수집이다.”
그리 적당한 이유를 붙인 시오는 마지막으로 남은 빵을 아리스의 입에 쑤셔 넣어 주고는 앞장서서 사람이 가장 많은 선술집으로 들어갔다. 일행들은 그냥 대낮부터 술을 마시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했지만, 파울로가 준 자유 시간이 넉넉했기 때문에 말없이 그를 따랐다.
선술집에서 도수가 약한 술을 주문한 후 말재주가 좋은 시오와 아리스는 능숙하게 바텐더와 얘기를 하며 자연스럽게 원하는 주제로 이야기 흐름을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