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처음 벤 머리에 핵 있는 거 몰랐어?”
“본체가 갑자기 내 앞에서 사라지는 바람에 당황해 잊고 있었어.”
아리스의 시선이 시오의 이마에서 흐르는 피에 박혔다. 시오는 뒤늦게 자신의 상처를 인식하고 멋쩍게 웃으며 피를 훔쳤다.
“아, 이건 별것 아니고…….”
“리비엘로!”
객차 안에서 라일라가 리비엘로를 부르는 비명이 들려오자 미레아가 거의 사색이 되어 달려갔다. 객차 안에 들어가자 정신을 잃고 쓰러진 리비엘로가 쿤둘렌에게 안겨 있었다.
“다친 곳은 없는데 신성력을 많이 써서 기절한 겁니다. 시오야말로 뇌진탕 괜찮습니까?”
“저는 부딪힌 게 아니고 긁힌 거예요. 아까 객차가 흔들릴 때 객차 안에 뒹굴고 있던 나무 상자가 스쳤어요. 라일라 너는?”
“나, 나는 시오가 감싸 줘서 아무렇지도 않아. 병원,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시오랑 미레아 둘 다 피 나잖아.”
아직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는지 라일라가 더듬거리며 두서없이 말했다. 미레아는 습관처럼 괜찮다고 말하려다 뒤늦게 자신의 팔 상태를 떠올렸다.
“이 정도는 라케드 님이 꿰매 주실 수 있을 거야.”
굽어 있던 허리를 펴던 라케드가 으르렁거렸다.
“이제야 국경 초입인데 벌써 몸 상태가 그게 뭐냐? 다음부터 다치면 팔 한 짝 없이 살라고 내버려 둔다?”
“하지만 이 상처 그대로 병원에 가서 어쩌다 다쳤냐는 물음에 ‘마수에게 물렸습니다!’라고 대답하면 큰일 난단 말이에요.”
오빈, 인간, 용 셋의 의학에 동시에 능통한 사람은 협회 내에 라라미드 아니면 라케드밖에 없었다. 그러니 다종족으로 구성된 이 원정대에서 의료진 역할을 할 사람을 뽑자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라케드 님 말대로 이제 막 루아드의 국경을 넘었는데 마수가 덮칠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방심하고 있던 것은 이 자리에 있던 모두 마찬가지니, 미레아를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쿤둘렌이 자신을 감싸 주자 미레아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라케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했다.
“그럼 이제…… 어떡하죠?”
파울로가 객차 안에서 뒹구는 동안 엉킨 머리카락을 손으로 벅벅 빗어 풀며 라케드에게 의견을 구했다.
“네가 대장이잖아.”
가뜩이나 예민해진 상태였던 용은 파울로에게 남한테 떠넘기려고 하지 말고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하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파울로는 미심쩍다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제게 결정권을 주시는 건…… 맞지요?”
“회장님이 구태여 내가 아니라 너를 대장으로 지목한 이유가 있지 않겠냐?”
“그럼 제 마음대로 해요?”
“그렇다고 전부 네 마음대로 하란 소리는 아니거든?”
“제가 대장이잖아요?”
“내 성에 안 차면 대장 갈아 치운다. 알아서 잘해.”
그러니까 혼자 알아서 잘하되 눈치껏 라케드의 비위를 맞춰야 한단 소리에 파울로는 집에 있는 아내가 보고 싶어졌다.
라케드가 세피로스에게 직통으로 현 상황을 보고한다고 라일라와 시오를 부려 통신기의 안테나를 세우는 동안 파울로는 다른 일행을 재정비시키고 아리스에게 마수의 공격으로 부서진 객차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봐, 아리스. 다음 포인트에서 열차가 정차할 때 이걸 폭발시켜.”
“폭발이요?”
“그래. 흔적도 없이 말이야. 열차에 마수에게 공격당한 흔적이 있으면 치안대가 이상하게 생각할 거 아니냐.”
둘이 상의를 하는 동안 미레아는 통신기를 붙잡고 있는 내내 벌을 서듯 두 손으로 안테나를 창밖으로 최대한 높이 들어 올린 시오를 애잔하게 바라봤다.
“그보다 이런 식이면 생각보다 일찍 열차를 버려야 할 수도 있겠습니다. 어찌 되었든 검문을 몇 차례 거칠 수밖에 없으니 눈에 띄지 않게 행동하려면 말입니다.”
쿤둘렌의 말에 미레아는 열차를 버릴 거면 용의 모습으로 변한 라케드를 타고 가자는 불경한 말을 할 뻔했지만, 입 밖으로 냈으면 죽을 것 같아서 참았다.
라케드가 세피로스에게 보고를 마치자 때마침 기절했던 리비엘로가 정신을 차렸다. 리비엘로는 라일라의 간병을 받으며 침대칸에 누워 있다가 눈을 뜨자마자 라일라의 부축을 받아 화물칸으로 넘어왔다.
“리비, 정신이 들어?”
라케드가 붕대를 감아 주는 동안 얌전히 팔을 내주고 있던 미레아가 화색이 되어 묻자 리비엘로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왜 여기 누워 있는지 모르겠어. 무슨 일 있었니?”
“기억 안 나?”
“무슨 기억?”
“조금 전까지 있었던 일들 말이야! 마수가 열차를 공격하고……!”
“마수?”
리비엘로는 얼굴을 찡그리며 기억을 불러 오려고 애를 썼지만 헛수고였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식당칸으로 가던 길이 내 마지막 기억이야.”
“오, 차라리 그게 나을 수도 있어. 썩 좋은 추억이 아니거든.”
라일라가 끔찍한 기억이라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하나 설명해 주면서 물병 뚜껑을 열어 리비엘로에게 건네주었다.
“마수가 나타났었다니…….”
물을 마시자 혼자 설 수 있게 된 리비엘로가 충격 받은 얼굴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리스가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확인하듯 물었다.
“전혀 기억이 안 나?”
“응.”
아리스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른단 얼굴인 리비엘로에게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고는, 기관차에 있을 파울로에게 다음 정차 포인트를 재확인하러 지도를 들고 자리를 떴다.
“쟨 또 왜 저런다니?”
미레아는 잊을 만하면 자기 친구에게 틱틱거리는 아리스가 이럴 땐 정말 밉상이었다. 리비엘로가 난처한 웃음을 흘리며 생각을 곱씹다 미레아에게 물었다.
“혹시 오전에 나랑 아리스 사이에 무슨 일 있었니?”
“아니. 내가 계속 같이 있었는데 아무 일도 없었어.”
미레아가 어깨를 으쓱거리자 리비엘로도 따라서 으쓱거리며 중얼거렸다.
“난 저 사람이 항상 어려워.”
“네가 어려워하는 사람도 있어?”
“그렇지, 뭐. 그나저나 또 다치면 어떡해?”
긴 상처가 난 미레아의 팔을 본 리비엘로가 대답 대신 말을 돌렸다.
“내가 목숨 걸고 싸웠단 증표인데 왜 혼나기만 하냐.”
“너 얼굴이 창백해.”
미레아는 양손으로 얼굴을 비볐다. 억지로 비빈 자리에 피가 몰려 발갛게 된 얼굴로 미레아는 붕대를 다 감은 팔을 들어 흔들어 보았다. 그런 미레아를 내버려 두고 리비엘로가 가볍게 노랫말을 흥얼거리자 신성력이 약하게 퍼졌다. 신성력을 쓰는 대신 체력이나 아끼라는 미레아의 충고를 들으며 리비엘로는 속으로 기도했다.
‘서리 여신이시여, 부디 우리의 앞길을…….’
리비엘로는 입술을 꾹 다물고는 성호를 그었다.
* * *
장장 5시간의 여정 끝에 작은 마을에 기차를 정차시킨 원정대는 숙소를 잡자마자 각자 침대 위에 널브러졌다.
불행하게도 열차 여행은 이것으로 끝이었다. 당초 계획대로였다면 클라인의 북서쪽까지 열차를 써서 이동할 생각이었지만 마수의 습격으로 열차가 입은 타격이 여러모로 컸다. 대신 열차에 같이 실려 있던 지프 차를 내렸다.
간신히 식사까지 마치고, 오늘 있었던 일과 앞으로 계획에 대한 회의까지 한 다음에 그들은 정말로 각자의 방에서 쉴 수 있었다. 라케드의 방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가 해산했는데 미레아는 일부러 미적거리다 방 안에 라케드와 파울로 그리고 아리스만 남았을 때 입을 열었다.
“라케드 님.”
라케드는 의아한 눈으로 미레아를 바라보았다. 그만 보면 항상 줄행랑치기 바쁜 미레아가 먼저 말을 거는 일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기 때문이었다. 미레아는 무언가를 망설이다 어렵게 운을 뗐다.
“5년 전에…… 마수들이 록산에 나타났을 때 라케드 님도 그 자리에 있었죠?”
“그래.”
“오늘 본 마수가 정말로 처음 보는 타입이었나요?”
라케드가 살짝 눈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군.”
“그러니까, 5년 전에 록산에 나타났던 마수 중엔 없었다는 소리지요?”
라케드는 바싹 긴장한 미레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가 처음 보는 타입이라고 확신하는 이유는, 오늘 나타난 마수의 진화 정도가 다른 마수들에 비하면 월등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마수들이 진화하는 데엔 어느 정도 시일이 걸리는 것을 고려한다면 5년 전에는 그와 같은 형태가 없었어. 그 정도로 능력이 발달한 마수는 우리가 비밀리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상황이었다면, 텔라인에 정식으로 보고해야 할 정도로 위험한 마수다. 설령 5년 전에 내가 미처 확인하지 못한 타입이었다 해도 저런 마수가 텔라인이 공개한 목록에 있었다면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미레아는 석연치 않다는 듯 아리스에게도 확인차 물었다.
“네가 마이련에서 신세 지던 마을을 둘러싸고 있던 마수의 숲에서 저란 마수를 본 적 없어?”
“그 숲은 규모가 컸지만, 보통은 진화가 덜 된 마수들이 많았어. 나도 그런 마수는 처음 봐. 단거리 공간 전이를 할 수 있는 마수가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
좀처럼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하자 미레아는 팔짱을 끼고 얼굴을 찡그렸다. 라케드는 의아한 눈으로 미레아를 바라봤다.
“대체 무슨 일 때문에 그래?”
“분명 처음 보고되는 마수인데 저는 왜 기시감이 느껴졌을까요?”
“기시감?”
“그 시선이 제가 5년 전에 봤던 마수와 똑같아서…… 솔직히 말하자면 그놈이 연상돼서 공포와 분노 때문에 피가 식은 느낌이었거든요.”
미레아는 5년 전과 오늘 겪은 일을 연상하자 저도 모르게 몸이 부르르 떨렸다. 파울로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조심스럽게 추측했다.
“네 트라우마 때문 아니겠어?”
“저는 마수에 대한 트라우마가 거의 없어요. 지금까지 제가 잡은 마수가 몇 마리라고 생각하세요?”
미레아의 확언에 아리스가 증언해 주었다.
“미레아는 제 앞에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마수 한 마리를 혼자 잡은 적이 있어요.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의 분위기가 아니었는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