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38화 (38/257)

38화.

“아까부터 나풀나풀 거추장스럽게 구네.”

아리스가 다른 수를 쓰려고 할 때였다. 마수가 돌연 그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뭐야!”

아리스가 당황한 그 시각, 미레아는 커다란 그림자를 인지하자마자 생각을 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미레아가 서 있던 객차 지붕이 날카로운 발톱에 뜯겨 나갔다. 미레아는 다행히도 옆 객차 위로 몸을 피해 무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리하게 몸을 움직인 덕에 지붕 위를 몇 바퀴 굴러 열차 아래로 떨어질 뻔했다. 그 충격을 완전히 완충하지 못해 두개골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아니, 휘청거리는 것은 미레아의 머리가 아니고 방금 타격을 받은 열차였다.

“라케드 님!”

미레아는 혼미한 정신 속에서도 열차의 상태를 확인했다. 미레아와 나란히 객차 지붕 위에 서 있던 라케드 역시 미레아의 맞은편으로 몸을 피하면서 다른 일행이 안에 있는 객차가 멀리 튕겨 나가지 않게 마력으로 끌어당겼다.

그래도 충격이 컸던지라 줄지어 달리던 열차 차체가 크게 기우뚱거렸다. 라케드의 주변으로 녹색으로 빛나는 스파크가 튀었다. 미레아는 라케드가 탈선 직전의 열차를 바로 잡기 위해 용의 모습으로 변신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라케드는 미레아에게 소리쳤다.

“너 그쪽으로 가서 파울로에게 죽어도 열차를 멈추지 말라고 전해!”

그와 거의 동시에 열차가 한 번 더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이번엔 아까의 반대편으로 기울었다. 쇠가 마찰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쿤둘렌의 목소리가 아래에서 들렸다.

“괜찮습니까?”

쿤둘렌이 기울어지는 객차의 반대편을 마법으로 바로잡았다.

“오, 수고.”

라케드가 다시 반대편의 균형을 잡자 열차는 정상적인 자세로 달리기 시작했다. 경외 어린 시선을 보내는 미레아에게 라케드가 보란 듯이 말했다.

“나와 쿤둘렌이 있는 한 열차가 탈선될 일은 없을 거다.”

“그나저나 이 녀석이 목숨 아까운 줄 모르네.”

탄창 하나를 비운 시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새 탄창으로 갈아 끼웠다. 마탄에 맞은 자리가 아물지 않은 채 체액을 뿜으며 활강하고 있는 마수는 신성력의 보호를 받는 열차에 손을 댄 덕분에 양발도 너덜너덜했다. 하지만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이 마수는 단거리 공간 전이를 할 수 있었다.

“왜 저렇게 죽어라 덤비는 거야?”

라케드는 객차를 안정시키자마자 방금 자신들을 덮친 마수에게 전류 계통의 공격을 했다. 마수는 전격에 몸을 떨며 추락하는 듯싶더니 다시 날갯짓하며 움직였다.

신성력을 아랑곳하지 않는 마수라면 리비엘로가 위험했다. 리비엘로는 라일라와 함께 시오의 뒤쪽으로 빠져 있었다. 미레아가 그들을 엄호하기 위해 객차로 접근하는 길에 라케드를 완전히 무시한 마수가 다시 앞을 막아섰다. 미레아는 검을 교차시켜 마수의 발톱을 막았다. 하지만 앞서 다친 팔에 통증이 밀려와 저도 모르게 균형이 무너졌다.

“미레아!”

서둘러 돌아온 아리스가 마수를 발로 걷어찼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미레아는 마수와 거리를 벌렸다가 마수가 자세를 바로 하기 전에 마수의 사각지대인 옆으로 돌아가 몸을 피했다.

일행들은 마수가 아까부터 미레아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미 두 번이나 먼저 공격해 왔다. 그렇다면 지금 미레아가 다른 일행들을 엄호하겠다고 설치는 건 주객전도인 상황이다.

“괜찮아?”

“응.”

아리스는 마수와 미레아 사이를 막아섰다. 아까처럼 유인책이 통할 것이라고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렇다면 팔에 부상까지 입은 미레아를 보호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마수는 크르렁거리더니 저공비행을 하며 미레아와 아리스를 견제했다. 아리스는 구태여 다시 날아오르지 않았다. 방어하려면 미레아의 곁에서 하는 것이 더 유리했다. 마수의 뒤를 쫓다 아까처럼 공간 전이를 하는 마수를 눈앞에서 놓칠 수는 없었다.

그들은 대치 상태에서 천천히 발을 옮겼다.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마수는 아리스를 힐끔거리면서도 탐욕스러운 얼굴로 미레아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밑에서는 시오가 저격용 소총을 겨누고 있었고 라케드와 아리스는 미레아의 옆과 앞을 지키고 섰다.

미레아는 이마에서 흐르는 식은땀을 훔쳤다. 라케드는 분명 본 적 없는 새로운 타입의 마수라 했다. 미레아 자신 역시 저런 마수는 기억에 없었다. 그런데 왜 저 시선에서 기시감이 느껴지는 것일까. 바싹바싹 마르는 입술을 혀로 핥자 그 모습을 본 마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순간 미레아는 마수가 두 번이나 자신을 노린 이유를 깨달았다.

“아하.”

마수는 정신계 물질인 영소를 섭취하려고 한다. 그리고 생명체의 정신계 물질이란 감정이 격해지면 증가하기 마련이었다. 미레아가 마수를 대면했을 때 그 속에서 요동을 치던 수많은 감정의 소용돌이와 차가운 분노를 마수가 읽어 낸 것이었다. 데르카이드의 마력보다 미레아의 불안정한 감정을 더 맛있는 먹잇감으로 여긴 것이다.

“저 빌어 처먹을 자식이 나를 우습게 알아도 정도가 있지.”

미레아가 다치지 않은 쪽 손에 힘을 주어 검 자루를 움켜쥐었다.

“다들 나를 지원해.”

미레아의 말에 일행들이 인상을 쓰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넌 표적이니까 나대지 말고 얌전히 있어.”

“저 녀석은 나를 노리고 있으니까 차라리 내가 선공하는 쪽이 낫지 않아요? 다들 나를 지키면서 싸우는 건 더 힘들단 말입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마수는 공간 전이를 할 수 있는데 너 혼자는 위험해.”

라케드에게 말대꾸하는 미레아에게 아리스가 손을 들어서 막았다. 하지만 미레아는 답답하단 얼굴로 쏘아붙였다.

“그러니까 엄호하라는 말이잖아. 저놈은 결국 나한테 오게 되어 있어. 어디서 어떻게 오느냐가 문제지. 하지만…….”

미레아가 가볍게 발을 굴렀다.

“그건 나한테 문제가 되지 않아. 잡히는 건 내가 아니라 저놈이야. 내가 미끼 할 테니까 네가 잡아.”

미레아가 자신을 콕 집어 말하자 아리스가 황당하단 얼굴로 되물었다.

“뭐라고?”

“미레아, 그 작전에선 내가 지원 사격을 할 수 없어! 내 동체 시력으로는 공간 전이를 따라잡지 못해! 그리고 아군이 근접전을 벌이는 상황에서 감에 의지해 저격할 수 없어.”

“그리고 난 혹시 모를 이목 때문에 용으로 변신할 수 없어. 쿤둘렌과 파울로는 열차를 지켜야 해서 그 이상의 지원을 생각할 수도 없다. 미레아의 말대로 한다면 미레아와 아리스 너희 둘밖에 움직일 수 없어.”

라케드의 말에 미레아가 엄지를 들어 올려 보였다.

“문제없어요.”

워커 뒷굽에서 일어난 스파크가 다리를 감싸자 미레아는 대답 없이 잔상만 남기고 위로 뛰어올랐다. 다르게 말하자면 마수의 입안으로 제 발로 뛰어들었다. 아리스는 미레아가 제발 뭘 할지 미리 말을 하고 움직여 주었으면 싶었다. 아무리 그래도 미끼 역을 자처하다니 두통이 올 것 같았다.

미레아의 공격은 제법 날카로웠지만 단조로웠다. 당연한 말이지만 날개가 없는 두발짐승은 허공에서 움직임에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다. 마수는 미레아의 공격을 슬쩍 피하면서 옆으로 돌아갔다. 미레아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마수를 발판 삼아 걷어차면서 그 반동으로 반대편 객차 위에 착지했다.

미레아와 마수의 거리가 벌어진 틈에 아리스가 접근해 검으로 공격했지만, 허공만 갈랐다. 마수가 다시 공간 전이를 했기 때문이었다. 마수는 이번에도 미레아의 뒤에서 나타났다. 미레아는 마수의 이빨에 몸이 찢기기 전에 아슬아슬하게 뛰어올라 공중제비를 돌고는 위에서 아래로 검을 휘둘렀다. 검이 마수의 단단한 깃털을 타고 미끄러졌지만 당황하지 않고 그대로 몸을 물려 아리스와 위치를 바꿨다.

아리스의 검은 곧장 마수의 날개를 베었다. 마수는 괴성을 지르며 다시 공간 전이를 했다. 미레아의 반응은 아까와 비슷했다. 마수가 접근하는 방향을 인지하자마자 생각을 하기도 전에 몸을 움직였다. 미레아의 반사 신경은 인간의 한계까지 끌어 올린 상태였다. 마수를 피하는 것이 우선이라 치명타를 줄 만한 결정적인 공격을 할 만큼의 여유는 없었다.

하지만 단순한 공격이어도 마수가 주춤하게 만드는 것쯤은 할 수 있었다. 미레아의 검을 마수가 물었다. 그와 동시에 미레아와 아리스는 동시에 입꼬리를 올렸다.

미레아는 무모하긴 해도 생각 없이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미레아의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마수가 아무리 공간 전이를 하며 순식간에 이리저리 이동할 수 있어도 공격을 하려면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 틈이 있는 한 미레아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마수의 공격을 피할 자신이 있었고, 자신이 벌어 준 그 순간을 아리스가 놓치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그 신뢰에 부응하듯 아리스가 마수의 코앞으로 공간 전이를 했다. 마수가 했던 것과 같은 방법이었다.

마수가 나타날 위치를 미리 잡는 것쯤은 어렵지 않았다. 미레아의 옆에 있기만 하면 되었다. 마수는 급작스럽게 나타난 아리스를 보고 당황했고, 아리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마수의 하나 남은 목을 베었다.

“좋아!”

미레아가 만족스럽단 얼굴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한도의 한숨을 돌리고 있는 아리스를 대신해서 잘린 마수의 머리에서 핵을 찾아내어 부쉈다.

“하…… 아슬아슬했다.”

아리스는 멍한 얼굴로 마수의 머리가 재로 변해 바람에 날아가는 모습을 보다 황급히 정신을 차리렷다.

“자, 어떠냐!”

미레아가 기운차게 팔을 번쩍 들어 올리기 무섭게 총알이 미레아의 머리 옆을 스치듯 지나갔다. 미레아의 등 뒤에서 쿵 하며 무언가 떨어졌다. 연기가 올라오는 총구를 후 불며 시오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전에도 비슷한 상황에서 구해 준 것 같은데, 너희는 뒷마무리가 어설퍼.”

돌아보자 먼저 베어 냈던 마수의 머리 밑으로 어설프게나마 몸이 재생되며 일어나다 시오가 핵을 쏘아 맞히자 힘을 잃고 쓰러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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