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그 질문이 뜻밖이었는지 아리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리비엘로를 봤다가 다른 사람들 역시 자신의 답을 기다리는 것을 보고는 간신히 추억을 곱씹으며 대답했다.
“음…… 클라인은 로아메나 대륙 북쪽에 있어서 대체로 날이 따듯했고…… 그러다 보니 한여름에는 엄청 더워서 정오가 되면 점심 식사 후 기온이 조금이나마 떨어질 때까지 일을 안 했어.”
“일을 안 해? 하나도?”
미레아가 호기심을 내비치자 아리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보통은 해가 가장 뜨거운 두세 시간 정도 가게 문도 닫고 길거리에 행인도 없지.”
“좋겠다.”
시오의 속 편한 질투에 아리스가 피식거렸다.
“그만큼 여름은 죽을 정도로 더우니까 어쩔 수 없어. 그리고 서쪽에는 높은 바위산들이 많고 동쪽에는 주로 평야 지대인데 특히 동남쪽은 곡창지대로 유명해.”
하지만 출발 전까지 지형을 파악하기 위해 골백번도 더 봤던 내용에 일행들이 질린 얼굴을 했다.
“그런 지리 수업 같은 내용 말고 다른 건 없어?”
라일라의 말에 아리스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어…… 그런 것 말고는 평범하지? 사람들 성격도 느긋하고.”
“축제 같은 것도 없어?”
“축제라 해도 거창한 건 없어서…… 농사짓고 사는 동네가 재미있어 봤자 얼마나 재미있겠어.”
“너 참 지루하게 살았구나.”
“그전까지 인생이 너무 다양한 방식으로 극단적인 일이 많았던지라 난 클라인이 조금 지루해도 좋았거든.”
이런 잡담을 들으며 식사를 하고 있던 미레아는 무심코 창밖을 내다보았다가 뜯어 먹고 있던 빵을 던져 버리고 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일행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미레아는 다급하게 시오의 어깨를 때렸다.
“선배, 선배, 선배! 빨리 조준경으로 저것 좀 봐 봐.”
그 말에 시오가 가방에서 조준경을 찾는 사이 아리스가 창문에 붙어 미레아가 가리킨 곳을 보았다. 조준경이나 망원경 따위가 없어도 아리스의 눈에는 하늘에 커다란 하얀 새 같은 것이 보였다.
아리스는 그것의 머리가 두 개만 아니었어도 그냥 새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정말로 마수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마수였다. 시오 역시 조준경으로 아리스가 본 것을 자세히 보고는 혀를 찼다. 하지만 더없이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파울로 대장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
“쿤둘렌이랑 있을 거야.”
“좋아, 두 사람이랑 합류해서 우리 객실로 집합하자.”
시오의 지시에 누구보다 먼저 리비엘로가 둘을 찾으러 달려갔다. 시오는 테이블 위를 점령하던 전단지를 한쪽으로 밀어 버리고 그 자리에 짐 가방 내용물을 쏟아 내었다. 그리고 동요하지 않고 저격 소총을 조립하기 시작했다.
“라케드 님은 아직 객실에 있나?”
“당분간 침대 위에서 내려올 생각이 없는 것 같았으니, 아마도.”
손을 부지런히 움직이는 시오를 대신해 아리스가 상황을 살피며 몸을 돌리는데 라일라가 의아한 얼굴로 그들에게 물었다.
“왜들 그래? 무슨 일이야?”
그 말을 들은 아리스는 리비엘로에게 상황을 설명해 준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레아는 창문과 가장 가까운 자리인 데다 동체 시력이 좋아서 빠르게 움직이는 마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리스는 평범한 사람보다 시력이 몇 배는 좋았기 때문에 다른 도구가 없어도 먼 거리에 있는 마수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리비엘로는 창문과 가장 멀리 떨어져 앉아 있었고 그 앞을 미레아와 시오가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분명 마수가 나타났는지 제대로 보지도 못했을 게 뻔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인지 어떻게 알고 파울로와 쿤둘렌을 찾으러 먼저 움직인 건지 의문이 들었다.
“좀 떨어진 곳에 마수가 있어.”
아리스의 대답에 라일라의 눈이 커졌다. 미레아가 가리킨 방향에서 비행 중인 하얀 점을 확인한 라일라는 시오의 저격 소총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사이 완전히 조립한 소총의 가늠자와 가늠쇠의 수평을 맞춰 본 시오가 미레아에게 고갯짓을 했다. 그의 눈이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미레아는 아까까지만 해도 헤실거리던 시오가 지금은 이렇게 든든할 수 없었다. 시오는 탄창을 끼우며 미레아에게 지시했다.
“미레아, 앞쪽 차량으로 가서 상황을 알아보고 와.”
“그럼 나도 같이 가.”
아리스의 말에 시오는 잠깐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오도 움직일 준비를 하는데 라일라가 그의 팔을 잡았다.
“시오, 그거 일반 탄 아니야?”
“맞아.”
“마수에게 일반 탄은 통하지 않아. 내 짐 속에 마탄이 있어. 가져와야 해.”
그 말에 미레아는 얼른 라일라를 시오에게 붙여 주었다. 그리고 움직이기 전에 시오에게 단단히 일렀다.
“시오 선배, 라일라를 부탁해. 알았지? 라일라는 시오 선배랑 꼭 붙어 있어. 절대 혼자 다니지 마. 마탄 회수하자마자 둘은 빨리 라케드 님한테 가.”
아리스와 미레아는 바로 기관실로 향했다. 가는 길에는 미레아가 묵는 침대칸이 있었다. 미레아는 얼른 짐에서 두 자루의 검을 찾았다. 그리고 앞으로 어떡할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이대로 멈춰서 마수를 상대하고 가는 게 나은지 다른 안전한 방법이 없는지 말이다.
‘어쩌면 속도를 높여서 빨리 이탈하는 쪽이 더 나을 수도 있겠지.’
미레아는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마수가 경비대에게 발견이라도 되면 좋을 텐데 저 지역은 인가가 없는 산악 지대 쪽이었다. 경비대가 바로 발견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리고 이곳은 평소에 마수가 출몰하는 지역이 아니었다. 마수가 잦은 빈도로 출몰하는 곳에는 철도를 깔지 않는다. 분명 마수에 대한 대비책도 미비할 것이었다. 마수는 먼 허공을 활강할 뿐 이쪽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다. 그사이 마수의 눈에 띄지 않고 지역을 벗어나면 다행이지만…….
“운이 없네.”
미레아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녀가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사이 아리스는 역시 꿈자리가 사나웠다며 한숨 쉬었다. 아리스는 이 상황에 대한 경우의 수를 따지고 있었다. 루아드에 들어온 지 1시간 만에 예상하지도 못한 사건이 생긴 게 우연일까? 운이 없었다 치기엔 지나치게 없었다.
미레아는 동력차의 기관실까지 한달음에 달려갔다. 철로만 살피고 있던 기관사와 부기관사가 의아한 얼굴로 미레아를 보았다. 그들은 라슈발렌 협회 측에서 붙여 준 사람들이었지만 전투부 소속이 아닌 비전투원이었다. 미레아는 그들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4시 방향에 마수가 있어요.”
그 말에 요원들의 눈이 커졌다.
“어떡할지는 아마 파울로가…….”
미레아가 판단을 유보하며 머뭇거리자 아리스가 대신 말했다.
“괜찮아요. 이대로 멈추지 말고 달려요.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들은 제가 지킬 수 있으니까 염려 마세요.”
그러고는 미레아에게 손가락을 세워 천장을 가리키고는 먼저 창문을 통해 나와 열차 벽을 타고 객차의 지붕 위로 올라갔다.
“이열, 든든한데? 지켜 주겠다니. 나한테 그런 소리 했으면 설렐 뻔했어.”
그를 뒤따라온 미레아의 저급한 휘파람에 아리스는 미간을 구겼다.
“네가 그렇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면 난 그게 뭐든 믿고 싶어지더라.”
“그거 알아? 지도자 위치에 있는 사람은 그걸 익혀야 해. 신뢰도 있는 태도와 몸가짐, 어투. 그러니까 전부 진심이 아닐 수도 있으니 너무 신용하지 마.”
“방금 그게 허세였단 말이야?”
“아니, 지금은 진심이지.”
아리스는 얼른 미레아의 오해를 바로잡아 주었다.
“그럼 계획이라도 있어?”
“파울로의 지시가 없어도 견제는 해야 할 것 같아서.”
그들은 열차 지붕 위에서 아직 먼 하늘을 활강 중인 마수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아리스! 너는 마지막 객차 위에 있어!”
아래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내려다보니 파울로가 창밖으로 머리를 빼 들고 그들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마수가 불시에 공격한다면, 마지막 객차가 가장 위험해!”
그 말에 아리스는 지붕을 따라 뒤쪽 객차로 빠른 걸음으로 이동했다. 그러면서 자세는 언제든지 공격에 대응할 수 있도록 유지하였다.
“파울로, 나는요?”
“너는 기관사에게…….”
“기관사에게는 멈추지 말고 달리라고 벌써 얘기해 놨어요.”
그러자 파울로가 한쪽 눈썹을 치켜뜨고 물었다.
“누구 판단이야?”
“……아리스인데요.”
미레아가 눈치를 보면서 대답했다. 하지만 파울로는 탓하려고 물은 것은 아니었는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녀석은 판단력이 빨라서 좋아. 이렇게 된 이상 최고 속도로 이탈한다. 아직 멀리 있으니 맞붙기 전에 도망치자.”
미레아에게는 그렇게 말해 놓은 뒤 파울로는 상황을 살피기 위해 기관실로 향했다. 그리고 곧 철로를 달리는 열차의 속도가 더 붙기 시작했다.
“이쪽으로는 오지 마라…… 그냥 발견하지 말고 지나가…….”
미레아는 두 검을 빼 들었다. 하지만 미레아의 염원이 무색하게도 마수와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상한 점은 조금씩 다가오는 것은 맞는데 공격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자신들에게는 운이 좋게도 마수가 아직 열차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생각하자니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커다란 쇳덩어리를 오감이 발달한 마수가 못 봤을 리 없었다. 여러모로 이상했다. 미레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했다.
‘일단 라케드와 파울로에게 이후 대응을 어찌할지 명령을 받고…….’
생각의 흐름이 끝맺기도 전에 미레아의 눈앞에 기괴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 수십 개가 다가와 있었다. 그 눈동자들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미레아는 얼어붙었다.
어떻게, 라는 의문을 가질 틈이 없었다. 저 멀리 있었던 마수가 무슨 수를 썼는지 몰라도 한순간에 미레아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