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인간은 왜 순간 이동 한번 하자면 그 절차가 복잡한 짓을 해야 하는 걸까.”
미레아가 임무에 나갈 때마다 항상 하던 생각을 하며 투덜거렸다. 지금 그들이 타고 있는 열차는 일반 여객용이 아니고 화물차로 위장한 것을 특별히 협회 측에서 마련한 것이었다. 조종석에 있는 기관사 역시 협회 측 사람이었다. 화실에서 석탄을 부지런히 태워 열차의 동력을 제공하는 인부 역시 협회 요원 중 하나였다.
침대칸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화물칸으로, 실제로 위장을 위해 여러 짐이 뒤섞여 실려 있었다. 그러다 보니 열차에 탑승한 승객이라고는 원정대 사람들밖에 없었다. 그들은 그 비좁고 유흥거리 하나 없는 열차에서 4일 차 아침을 맞고 있었다. 안락한 열차 여행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그림이었다.
루아드 제국의 국경을 넘기까지 고작 3일이었지만, 록산에서 시작해 대륙을 이동하는 것은 마냥 자리에 앉아 있기만 한다고 해서 편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미레아야 이런 이동이 익숙하지만, 라일라와 리비엘로는 또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니 미레아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저 둘을 챙기는 수밖에 없었다. 미레아는 라일라와 리비엘로와는 개인적으로도 친분이 깊었고, 다른 사람들은 전부 남자이다 보니 고민이나 힘든 점을 같은 여자인 미레아에게 툭 터놓고 이야기하는 쪽이 더 쉬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미레아는 마음을 평소보다 더 단단히 먹었다.
비록, 지금 일어나 보니 그 둘은 벌써 일어나서 객실에 없지만! 어쨌든 정신 똑바로 차리자, 미레아 제인스터. 그 어느 때보다 내 역할이 중요하다!
미레아는 힘찬 하루를 보내기 위한 첫 발걸음으로 식당 칸으로 향했다. 식당 칸이라 해서 특별한 것은 없었다. 그저 화물칸에 식탁 두어 개를 붙여서 구색만 맞췄을 뿐 음식 마련은 그들이 가져온 보존식으로 때워야 했다.
미레아는 자신보다 먼저 일행들이 모여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미레아가 반가운 얼굴로 다가갔지만 시오, 리비엘로, 라일라와 더불어 아리스는 한 테이블에 옹기종기 머리를 맞대고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이 앉은 4인용 테이블에는 남은 자리가 없어서 옆 테이블에 접시를 내려놓은 미레아가 고개를 쑥 들이밀었다.
“뭐 해?”
미레아가 온 것도 모르고 대화에 깊이 빠져 있었는지 그들은 미레아가 말을 걸자 화들짝 놀라 돌아봤다.
“무슨 일 있어? 무슨 얘기를 하길래 그렇게 진지해?”
“어…… 임무에 관한 얘기 중이었어.”
라일라가 히죽 웃으며 대답했지만, 미레아는 네 명이 보고 있던 것을 이미 봐 버렸다. 시오의 손에는 ‘루아드 제국 추천 관광 명소로 선정된 10개의 도시’라고 적혀 있는 전단지가 들려 있었다.
아침을 먹던 중이라 반쯤 비워진 접시들 사이로 그 외의 다른 지역들을 소개한 전단지가 흩뿌려져 있었다. 미레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시오의 손에서 전단지를 빼앗아 앞면을 자세히 보고는 헛웃음을 들이켰다.
“관광 명소? 선배, 장난해? 진심이야? 우리가 지금 어디 수학여행이라도 가는 줄 알아?”
자신은 조금 전까지 비장한 마음을 먹고 다짐했거늘, 정작 당사자들은 관광 명소 따위나 찾아보고 있으니 김이 팍 샜다. 라일라는 어색하게 웃었고 리비엘로는 특유의 유들유들한 미소로 어물쩍 넘기기를 시도했으며, 아리스는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시오는 혀를 쯧쯧 차며 손가락을 까닥였다.
“너야말로 뭘 모르는군, 미레아 제인스터. 하긴, 넌 이런 장기 임무는 처음이니 모를 수도 있으니 선배의 가르침을 잘 듣도록.”
시오는 미레아의 손에서 다시 전단지를 뺏어서 손으로 탁탁 쳤다.
“우리는 지금 여행객 신분이란 말이야. 여권이랑 입국 허가서 보이지? 여기 뭐라고 적혀 있는지 읽었어? 여행 목적으로 입국 신고를 했잖아. 그러니 적어도 여행객처럼 보이긴 해야지.”
시오는 몸에서 떼놓기 불안하다며 아침 식사하는 데까지 지고 온 분해한 저격 소총이 담긴 여행용 가방을 한번 고쳐 맸다. 그 행동은 정말로 자신의 여행 짐을 날치기 당할까 불안해하는 여행객으로 보였다.
“가는 곳 정보는 최대한 많이 익혀 두는 것은 기본이란 것 몰라? 재수 없어서 불시에 검문 걸려 봐. 그럼 뭐라고 둘러댈 거야? 여행객이면서 관광 명소 하나도 못 대면 그게 무슨 개망신이냐고. 물론, 정말 몇 년씩 걸리는 장기 임무에 비하면 장기라고 표현하기 민망하지만 그래도 3개월 동안 별의별 일이 다 있을 수 있단 말이야. 특히, 리비엘로와 라일라가 말이다. 이 둘은 이런 여행 자체를 해 본 적이 없다잖아. 우리야 밖에서 신문지 한 장 덮고 노숙을 해도 탈 나지 않을 정도로 튼튼하지만, 저 둘은 아니거든. 우리의 팍팍한 기준을 똑같이 따르라고 하면 안 되지.”
“어…….”
“그리고 라케드 님이 동행하는데 저분이 우리가 헤실거리면서 나돌아 다니는 꼴을 눈감아 줄 사람이야?”
“아니.”
“그렇지. 그러니 마냥 놀러 다니는 것이 아니라 선을 지킬 거란 말이다. 그리고 잊고 있나 본데, 나 시오 미도르야. 내가 괜히 네 선배가 아니란 말이다. 알아들었어? 나 믿지?”
시오는 자신의 가슴을 탁탁 치며 믿음직스럽게 물었지만, 미레아는 지금 자신의 속에서 올라오는 강렬한 충동을 억누르는 중이었다.
‘시오 선배, 전부터 묻고 싶었는데 라일라 좋아해?’
미레아는 저렇게 묻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려 죽을 것 같았다. 미레아는 라일라와 친했고 시오와도 가까웠다. 시오는 미레아의 바로 앞 기수 선배이다 보니 여러모로 부대낄 일이 많았고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라일라는 미레아가 개인 지급된 마도 기구를 자꾸 고장 내는 바람에 기술부에 들락거리다 알게 된 사이였다. 수리를 보내던 것이 누적되자 그것들을 고치던 라일라는 대체 미레아 제인스터가 누구인지 얼굴이나 보자며 안면을 튼 것을 계기로 성격이 잘 맞아 친해졌다. 하지만 이건 예외적인 경우고 보통 기술부와 전투부 사람들은 서로 가깝게 지낼 만한 계기가 거의 없었다.
시오와 라일라 역시 미레아를 빼면 접점이 없었다. 미레아는 상대방과 어울릴 때 따로 친분이 없는 둘을 굳이 한자리에 합석시킬 이유가 없어서 한 번도 같이 부른 적이 없었다. 어느 날 미레아가 라일라와 있을 때 시오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예의상 서로 통성명만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저 둘이 저렇게 친해졌냔 말이다. 분명 셋이 한자리에 있던 적은 5분을 넘기지 않았는데 대체 미레아 자신이 없던 사이 저 둘에게 무슨 일이 있었냔 말이다. 단순히 친구 사이라면 왜 자신이 쏙 빠져 있냔 말이다.
지금도 봐라. 시오 미도르는 미레아에게 저런 식의 ‘배려’를 해 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구르면서 배우는 쪽이 더 빠르다며 힘들어서 허덕이고 있는 걸 일부러 구경만 했다. 물론 튼튼한 자신과 라일라는 상황이 다르다지만 이건 너무했다.
미레아 눈에는 아니꼬울 정도로 시오는 라일라에게 지나치게 다정했다! 미레아는 제발 시오가 라일라에게 고백이라도 했다가 차이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둘 사이에 낀 자신만 난처해진단 말이다.
미레아의 속을 알 리 없는 시오는 미레아가 말을 잃자, 그 틈에 중단되었던 화제를 이어 말했다.
“그래서, 아무래도 고된 여행길이다 보니 먹고 자고 하는 것만이라도 최대한 누릴 수 있을 만큼 누려야지. 그래서 지역별로 특산물과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여행지를 보고 있었지.”
미레아는 시오가 보고 있는 지역을 확인하고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선배, 선배 말대로 3개월 동안 예측할 수 없는 일투성이일 텐데 지금 굳이 두 달 이상은 보내야 지나가는 동네의 맛집을 알아 두어야 할까.”
“예측 불가능한 일투성이니까 하나라도 더 알아 둬야지.”
라일라가 시오를 옹호하며 나섰다.
“그리고 전문 가이드도 있으니 얼마나 좋아.”
“그래. 루아드 전국의 지도와 지역의 특성을 근 20년 동안 달달 외운 나만 믿어.”
조금 거만한 태도로 말하는 아리스를 흘겨보며 미레아가 물었다.
“설마 3일 동안 나 빼고 선배들끼리 이러고 있었어?”
“아니. 우리 그동안은 정신없이 바빴잖아. 잠깐 짬 생긴 틈에 이러고 있는 거야.”
리비엘로가 살포시 웃으며 답하자 미레아가 동정의 눈빛을 보냈다.
“리비, 피곤하면 이 사람들한테 맞춰 줄 필요 없어.”
“어머, 그렇지 않아. 나 괜찮은데?”
하지만 미레아에겐 그 말이 신용도가 높은 대답은 아니었다. 시오의 행실이 영 못마땅했어도 미레아는 한 가지 사실만은 인정했다. 시오는 이 원정대 사람 중에서 가장 신중한 성격이었다. 그건 라케드의 깐깐함과는 달랐다. 신중하고 참을성이 좋았으며 일에 대한 경우의 수를 생각해 대비책도 항상 여러 가지를 준비해 뒀다. 그건 시오의 본질이 저격수라 그랬다.
시오의 그런 면을 고려하면 지금도 핑계가 영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아무리 봐도 라일라 때문인 것 같단 말이지. 그나마 추잡스럽게 치근덕거리는 성격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결국, 미레아는 그들의 옆 테이블에서 아침을 꾸역꾸역 먹으며 루아드의 관광 명소에 관한 이야기를 줄기차게 들어야 했다.
“기왕 여기까지 왔는데 남부 쪽으로 갈 일이 없어서 아쉽다. 남부 쪽에 있는 호수가 장관이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라일라가 아깝다며 입맛을 쩝 다시자 아리스가 딱 잘라 말했다.
“아, 미안. 거기 가도 볼 거 없을 거야. 그 지역은 전에 내가 완전히 파괴했거든. 아직 회복 안 됐을걸?”
“너 자연경관에 무슨 짓이야?! 뭘 하면 그렇게 되는데?”
“그러지 말고 클라인 얘기나 더 해 봐.”
리비엘로의 말에 아리스는 어색하게 관자놀이께를 긁적거렸다.
“글쎄…… 여기저기서 부식이 일어나서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지 나도 모르겠는데…….”
“지금 말고 원래 말이야. 암흑 지대라 불리기 전, 부식도 오염도 되지 않은 원래 클라인은 어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