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우리에게 뒤집어씌우지 마! 디트레히트도 형님이 몰아붙여서 죽인 거야! 형님이 원래부터 권좌를 탐했다는 것은 선대 황제도 알고 있었어! 그런데도 디트레히트는, 그 미련할 정도로 착해 빠진 어린 녀석은, 우리를 지키겠다고 선황제에게 가장 먼저 우리의 안전과 권리를 주장했어! 그랬는데 형님이 망쳤어! 형님이 선황제를 자극하지만 않았어도 디트레히트가 주검으로 돌아오진 않았겠지!”
마라피네스의 말에 메르티어스 황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폐하, 저는 디트레히트가 죽었기 때문에 폐하에게 충성을 바쳤던 것입니다. 저 하나 때문에 폐하와 아버지까지 그렇게 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루데키아스가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하자 마라피네스가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아리스, 이 망할 겁쟁이는 내게 맡기고 넌 개소리엔 대답하지 말아라.”
황제가 마라피네스를 걷어찼다. 그것을 본 루데키아스가 한 발 내딛으려 하자 마라피네스가 오지 말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래, 그렇다면 아까 네 말대로. 네 아들은 그 더러운 짓을 하면서까지 붙여 놓을 가치가 있는 목숨이라 생각하느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사실 대답은 필요 없다. 루데키아스의 힘이라면 서리 여신의 속삭임대로 세계의 종말을 가져올 것도 가능하겠지. 내 눈으로 똑똑히 본 그 말도 안 되는 능력이라면 말이야.”
“그것은, 루데키아스를 뜻한 게 아니야.”
“인간의 태를 빌려 태어나 하늘을 향해 뻗는 검은 날개를 두려워하라.”
황제의 한마디 한마디에 루데키아스의 얼굴에서 핏기가 점점 사라져 갔지만, 마라피네스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이 루데키아스를 지칭한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어.”
“서리 교단에서 여신의 속삭임이 가리키는 자가 어째서 루데키아스라 확신하는지 알고 있나?”
황제는 친히 허리를 굽혀 마라피네스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 속삭임은 루데키아스가 태어난 난 날, 테나력 2989년 3월 12일 날 내려졌다.”
“우연이야.”
“여신의 말씀에 우연의 개입은 없다.”
“하지만 폐하, 저는 예언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조용히 살고 싶을 뿐입니다! 그러기 위해 폐하께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습니까!”
루데키아스의 항변에도 황제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지난 3년간, 너를 보며 확신했다. 너를 그대로 두면 어느 형태로든 좋지 않은 일이 있을 것이야.”
루데키아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황제의 말대로 자신이 세계의 종말을 가져올 정도로 대단한 존재라면, 지금 여기서 이렇게 무력감이나 맛보고 있지 않을 것이다.
“메르티어스 폐하.”
루데키아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마지막으로 물었다.
“저를 가족이라 여긴 적이 있긴 있었나요?”
황제는 루데키아스의 질문에 답하는 대신 싸늘한 음성으로 명령했다.
“루데키아스를 이 자리에서 죽여라.”
그때 바닥에 쓰러져 있던 마라피네스가 온 힘을 쥐어짜 일어나더니 황제의 바로 옆에 있던 기사를 제압하여 그 검을 빼앗아 황제의 목을 겨누었다.
“아리스, 도망가!”
루데키아스를 향했던 검들이 전부 마라피네스의 목에 드리웠다.
“아버지!”
“넌 혼자서 도망갈 수 있잖아.”
하지만 그의 말대로 루데키아스가 순순히 아버지를 두고 도망갈 리 없었다. 황제는 그를 잘 알았다.
“마라피네스. 네 아들을 그렇게 모르더냐. 내가 굳이 너를 여기까지 데리고 온 이유를 모르겠더냐.”
“아니, 잘 알지. 나를 인질로 삼고 싶은 것이라면, 안타깝게 됐군.”
그 순간 루데키아스는 자신을 바라보는 마라피네스의 눈빛을 읽고 그가 무슨 일을 하려는지 알아차렸다.
“나는 설령 서리 여신의 앞이라 해도 내 아들의 목숨은 가치 있는 것이라 감히 주장할 것이다.”
“아버……!”
루데키아스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들고 있던 검으로 자결을 한 마라피네스의 심장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렇다. 마라피네스는 루데키아스를 잘 알았다. 인질이 없어진 순간 루데키아스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그리고 루데키아스는 아버지의 유언이 되어 버린 그 말을 저버릴 수 없었다.
마검이 루데키아스의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에 맞춰서 공명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검은 날개가 터져 나왔고 몸의 마력이 폭발할 것 같은 그때, 누군가가 루데키아스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이봐, 소년. 동지들은 네 의지에 답해 줄 거야.”
그러니 너는 네 마음속 목소리에 귀 기울여. 네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뭐야?
* * *
아리스는 흠칫 놀라며 잠에서 깼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마에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그는 습관처럼 손을 더듬어 검부터 찾았다. 하지만 검 대신 손끝에 닿는 이불의 감촉에 이곳이 대륙 횡단 열차의 침대칸 객실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는 머리맡에 비스듬하게 세워 두었던 검을 끌어안고 한참을 숨을 색색거리며 몰아쉬었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유일무이한 구명줄이라도 잡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고 있다 보니 진정이 된 그는 부스스 일어나 창밖을 보았다. 이른 새벽 햇빛이 보였다.
“조금 전에 루아드 국경을 넘었어.”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려 보니 맞은편 2층 침대 위에 라케드가 안경을 끼고 희미한 전등 빛에 의지해 책을 읽고 있었다. 라케드는 침대에서 뒹굴기 편한 복장을 하고 있었고, 이마의 용주와 인간보다 긴 귀를 가리기 위해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있었다.
“궁금해할까 봐 미리 말해 준다.”
고국 땅을 오랜만에 밟자마자 5년 전 꿈이라니. 미신을 믿지는 않지만, 시작부터 꺼림칙했다. 아리스는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이 상태로 다시 잠들고 싶은 기분이 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요?”
파울로와 시오의 침대가 텅 비어 있었다.
“불침번 서고 옆 객차로 아침 먹으러 갔다. 속 편하게 잠잔 건 너뿐이거든.”
방금까지 악몽을 꿨는데 속 편하단 소리를 들으니 억울했다.
“방금 국경을 넘었으면 어차피 하루 이상은 더 가야 하는데 잠이라도 자면서 시간을 죽여야 하지 않겠어요.”
“내 기억으로는 록산을 떠나고 여기까지 오는 3일 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잠만 잔 거로 기억하는데.”
“앞으로 고생할 텐데 체력을 미리 비축해야죠.”
“너 은근히 한마디도 안 진다?”
“제가 져야 해요?”
라케드는 아리스를 쥐어박고 싶어 미칠 것 같단 표정을 지었다. 미레아가 아무리 혼날 짓은 전부 하고 다닌다 해도 최소한 라케드 앞에서 닥치기는 했는데 이놈은 아주 막 나가고 있었다.
행동을 같이한다 해도 아리스는 라슈발렌의 사람이 아니었고 협회 내 요원들의 계급 체계와 위계질서를 지킬 이유가 없었다. 아리스는 누구처럼 까라면 까는 위치가 아니었다. 라케드는 심호흡하며 아리스가 협력만 잘한다면 최대한 관대해지기로 마음먹었다.
“저도 아침 먹고 올게요.”
어느새 검을 허리춤에 차고 한쪽에 벗어 둔 부츠를 챙겨 신는 아리스에게 라케드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다녀오는 길에 내가 먹을 빵이랑 차 좀 가져와. 그냥 흰 빵에 홍차면 괜찮으니까.”
그 말에 아리스가 멈칫하더니 혼잣말로 툴툴거렸다.
“나보곤 온종일 잠만 잔다 그러면서 자기야말로 움직이지를 않아.”
혼잣말치고는 목소리가 커서 라케드는 결국 아리스에게 읽던 책을 집어 던졌다.
“왔다 갔다 하려니 늙은이 관절이 안 좋아서 그렇다, 왜!”
하지만 아리스가 나가면서 책에 얻어맞기 전에 객실 문을 재빨리 닫아 버려 애꿎은 책만 바닥에 떨어졌다.
“하! 미레아 제인스터보다 한술 더 뜨는 놈이 왔어!”
라케드는 마법으로 떨어진 책이 자기 쪽으로 날아오게 만들어 붙잡고는 이를 갈았다.
“대체 저 미친놈을 제어할 만한 사람이 나 말고 또 누가 있어? 하다못해 세피로스여도 저거 어디 감당이나 하겠어? 아무래도 내가 임시 동행이 아니게 될 것 같은데?!”
라케드가 객실에서 자기를 향한 저주를 퍼붓든 말든 아리스는 느긋한 걸음으로 옆 칸으로 향했다. 며칠 사이 익숙해진 얼굴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 * *
한편, 그 시각 미레아는 야무지게 아침 세수를 하고 완전히 말똥말똥해진 얼굴인 거울 속 자신을 향해 중얼거렸다.
“좋아, 루아드에 들어왔고, 지금부터가 진짜 집중해야 할 때야. 너의 역할이 중요하다, 미레아 제인스터!”
그리고는 가볍게 자신의 양 뺨을 두드렸다. 미레아가 지금 걱정되는 것은 다른 게 아니고 라일라와 리비엘로였다.
지금까지 했던 임무 중에 이번이 가장 긴 장기 임무였다. 그것 때문에 긴장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인 체력인 데다 이런 일이 익숙하지 않은 라일라와 리비엘로가 3달이나 되는 여정을 잘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특히, 리비엘로는 이런 장거리 여행 자체를 해 본 적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세로킨의 록산에서 루아드의 클라인까지 가기 위한 여정은 상당히 지루할 수밖에 없었다. 먼저 록산에서 세로킨의 수도인 딜다로 이동해야 했고, 거기서 또 대륙 횡단 열차로 갈아타야 했다. 로아메나 대륙의 동쪽 끝에 있는 세로킨이 대륙의 서북단에 있는 루아드까지 열차로 달리면 몇 시간은커녕 며칠이 걸리는 거리였다.
게다가 원정대의 첫 번째 목적지는 15군데의 마도 기구 설치 후보지 중 가장 먼 곳인 클라인의 서북단 끝쪽에 있는 산맥이었다. 가장 멀고 험난한 지역이다 보니 황제의 눈을 피하기 가장 쉬운 곳이었다.
출발 전에 워프 게이트 마법을 이용하자는 의견이 나왔었다. 하지만 보통 워프 게이트 마법은 목표 지점에서 보조 마법으로 길잡이 삼을 만한 좌표를 보내는 것이 정석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지나친 장거리를 한 번에 워프했다가 원하는 곳에서 한참을 벗어나 엉뚱한 곳에 떨어질 가능성이 너무 컸다. 아리스나 라케드 혼자라면 해 볼 만했겠지만 다른 사람들까지 위험을 감수할 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