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미레아는 어색하게 웃고는 괜히 바다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그러다 마침 네가 머무를 곳이 필요하다 그러잖아. 그래서 너를 핑계 삼아 데려온 거야.”
그리고 목을 가다듬고는 아리스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고마워. 나는 네 덕분에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어.”
이번엔 아리스 쪽이 멋쩍어져서 살짝 얼굴을 붉혔다.
“아니, 그런 거로 감사받자니 나는…….”
“알아. 내가 혼자 의미 부여한 거지만, 그래도 너는 내가 외면했던 정원도 이렇게 예쁘게 바꿔 줬잖아.”
미레아의 말을 들은 아리스는 이 정원의 늦여름 풍경을 자신은 볼 수 없겠다 싶었다. 록산의 바다가 훤히 보이는 이 집은, 타일로 장식된 대문을 넘어오면 현관 앞까지 난 길 양쪽으로 정원이 있다.
“그러니까 이제는 계절마다 여기서 이렇게 사진을 찍는 거야. 어때?”
미레아는 사진기를 낮은 담벼락 위에 올려놓고 타이머를 맞추더니 아리스의 옆자리로 달려가서 섰다.
찰칵.
사진기가 시간 간격을 두고 세 번 찍도록 설정했기 때문에 두 장이 남았다. 아리스는 미레아의 요구대로 똑바로 서서 사진기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계절마다 내게 사진을 보내 줘. 나도 내가 꾸민 정원이 어떻게 변하는지 볼 권리쯤은 있잖아?”
정원을 버려두었던 동안에도 꿋꿋하게 살아남은 나무들은 부지런히 꽃을 피워 내고 과실을 빚어내었다. 봄에는 따듯해진 날씨를 가장 먼저 반기는 아몬드 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여름에는 수국이 정원을 지킨다. 뜨거운 여름 햇살 아래 레몬이 익어 가고 가을에는 올리브가 주렁주렁 열리는 작은 공간.
아리스의 말에 미레아가 눈을 빠르게 깜박이며 무슨 소리냐는 투로 말했다.
“네가 와서 찍어야지. 네 말대로 이 정원을 꾸민 사람이 직접 봐야 할 거 아니야.”
찰칵.
“아니, 잠깐. 나 눈 감은 것 같은데!”
아리스에게 대꾸하는 사이 셔터가 터지자 미레아가 분개했다. 하지만 이번엔 아리스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 떠나면 내가 여기 올 일이 없어.”
“꼭 일이 있어야지만 와? 그냥 놀러 올 순 있잖아. 설마 이 이후에 나를 영영 안 볼 생각이었어? 그렇다면 좀 실망인데.”
미레아는 아리스의 등을 때렸다.
“빨리 앞이나 봐.”
찰칵.
마지막 셔터 음이 들리고 미레아는 사진기를 회수하러 종종걸음으로 걸어갔다. 아리스는 미레아의 뒷모습에 대고 물었다.
“나보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놀러 오란 소리야?”
“그렇지.”
“그래도 돼?”
“당연하지. 네가 꾸민 정원이잖아.”
미레아가 아리스를 마주 보았다.
“너에겐 항상 문을 열어 두고 기다릴게.”
아리스는 그 말을 곱씹어 보다가 목구멍 안쪽이 간질거려서 피식 웃었다.
록산 시내에서 트램을 타고 오르막길을 올라오면 타일로 장식된 나무 대문을 가진 집이 있다. 작은 정원이 있고 외벽은 벽은 노란색으로 칠했으며 붉은 기와를 올린 지붕이 멋스러운 집.
봄에는 아몬드 꽃이, 여름에는 수국이 피고 레몬이 익어 가며 가을에는 단단한 올리브 과실이 주렁주렁 열리는……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멋스럽게 서 있는 집. 여러 사람의 정성스러운 손이 많이 탄 집.
아리스는 이 집이 좋았다. 이 정원이 좋았다. 이 도시가 좋았다. 그리고 미레아가 자신을 기다려 준다는 말이 좋았다. 미레아의 말은 항상 자신을 기쁘게 했다.
하지만 아리스는 들뜨던 마음을 다시 가라앉혔다. 그의 경험상 기대는 독이다.
* * *
그날 밤.
미레아는 임무를 떠나기 전 항상 그렇듯, 유서를 작성했다. 역시 항상 그랬듯, 하나는 세피로스의 앞으로, 하나는 파울로의 앞으로. 그리고 길게 망설이다 봉투를 하나 더 꺼냈다. 하지만 겉장에 수취인의 이름은 적지 않았다.
제4장 시선
“폐하…….”
루데키아스는 자신을 포위한 황실 기사단을 포함한 중앙군과 그 가운데에 있는 메르티어스 황제를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황제는 오른손에는 총을, 왼손에는 그와 똑같은 얼굴을 한 쌍둥이 동생의 멱살을 쥐고 있었다.
멱살이 잡힌 마라피네스는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피투성이가 된 몸을 간신히 지탱하고 있었다. 제국의 대공인 그에게는 치욕적이기 짝이 없는 취급이었다. 루데키아스는 그에게 달려가고 싶었으나 검을 든 기사들이 앞을 막아서서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날은, 이제 막 초여름이 된 햇살이 몸을 찌르는 것같이 따가운 날이었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에 풀벌레 소리와 꽃향기가 퍼지던 날이었다.
류은현은 아들의 긴 머리를 부드러운 빗으로 빗어 하나로 묶어 주었다. 루데키아스는 자신은 어린애가 아니라 투정했지만, 어머니가 자투리 공단 천으로 머리 매듭을 지어 주는 바람에 함부로 그것을 풀어 버릴 수 없었다.
사용인이 얼음을 띄운 음료를 내와 루데키아스는 창가에 앉아서 그것을 마시고는 지나가는 영지민이 건네는 인사를 받았다. 그러다 그늘에서 묶은 머리가 망가지지 않도록 옆으로 돌아누워 빈둥거리는 것이 큰 낙이 되어 준 날이었다.
그 여느 때보다 평화로운 날이었다. 분명 그리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 루데키아스는 몸이 식어 갔다. 황제는 차가운 눈으로 루데키아스를 응시했다. 분명 아버지의 시선은 따듯했는데 그와 똑같은 푸른색 눈동자라 여겼던 황제의 눈에는 뼈가 시리도록 냉기가 넘쳤다.
황제의 잘 빗어 넘긴 은발 머리와는 달리 마라피네스의 머리카락은 흘러내린 피 때문에 적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루데키아스는 잠시 동안 저기 두 발로 서 있는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이고 피투성이가 된 쪽이 자신의 백부이기를 바랐다. 자신이 잠깐 둘을 헷갈렸던 것이라 여기며 말이다.
“메르티어스, 형님…… 제발…….”
마라피네스는 애원하며 황제에게 손을 뻗었다.
“제발…… 형님의 조카잖아…… 루데키아스만큼은…….”
“아버지!”
루데키아스는 양손으로 자신의 검, 페니드란을 고쳐 잡았다. 하지만 황제는 손을 들어 올려 그의 행동에 나지막한 경고를 하였다.
“루데키아스, 네가 저항하지 않으면 네 아버지는 무사할 것이다.”
“먼저 공격을 해 놓고 비겁하게!”
“황제 폐하께 무례한 언사를 삼가거라!”
황제를 모시는 누군가가 일갈하자 루데키아스는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들은 처음부터 루데키아스의 목숨을 노려 봤자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아비 되는 대공부터 노렸다.
마라피네스는 급작스럽게 들이닥친 황제의 친위대 기사들의 검이 자신을 향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루아드의 수도에 남아 황제를 보좌하던 마라피네스와는 달리 다른 식솔들은 대부분 영지인 클라인에서 지내고 있었다. 때문에 루데키아스는 마라피네스의 일에 손을 쓸 틈은커녕 황실 기사단이 성을 포위하고 나서야 상황을 알았다.
황실 기사단이 무슨 목적으로 클라인 영지에 들어섰는지 알아차린 순간 루데키아스는 어머니인 류은현을 가신들과 함께 피신시킨 뒤 검을 빼 들고 홀로 성문 앞에 섰다. 루데키아스는 상황이 심상치 않자 일부러 그를 돕겠다며 나선 가신들을 전부 물렸다.
상대는 황제였다. 황제에게 검을 겨누었다가 잘못하면 반역자로 몰릴 것이었다. 그들은 오랜 세월 동안 여러 고초를 함께 겪은 사람들이었다. 루데키아스는 자신을 위해 이미 한번 반역에 가담했던 가신들에게 또다시 반역자의 낙인을 찍게 버려 둘 수 없었다. 그리고 루데키아스는 원래 아무도 거느리지 않는 쪽이 오히려 편했다. 그래서 전부 어머니에게 붙여 대피시켰다.
그런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간신히 숨만 붙여 놓은 상대로 끌려온 아버지의 멱살을 아무렇게나 쥐고 있는 황제였다. 루데키아스는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는 마른침을 억지로 삼키고 입을 열었다.
“큰아버…… 아니, 폐하. 무슨 일인지 정확한 정황을 제가 알지 못하오나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아무런 죄도 짓지 않으셨습니다. 제발 아버지를 풀어주십시오.”
“아니, 내게 오해는 없다.”
황제는 자신의 발을 들어 마라피네스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마라피네스가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지자 황제는 발에 힘을 줘서 그를 아무렇게나 넘어트렸다. 피투성이인 쪽은 마라피네스였지만 루데키아스는 자신의 피가 모두 빠져나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여러 전투의 선봉에 섰지만, 오늘처럼 두려운 적은 없었다.
“그리고 마라피네스 역시 죄가 없지.”
“그럼 대체 왜…….”
“죄라면 네가 죄다.”
루데키아스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폐하,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하지 않았단 말이냐. 나를 황제의 자리에 앉힌 것은 네 아비와 너 아니더냐. 루데키아스 레민나 류 파니드라우.”
그 말에 루데키아스는 어깨를 흠칫 떨었다. 루데키아스가 입을 열기 전에 마라피네스가 입술을 짓씹으며 말했다.
“그건 네가 원했잖아. 선대 황제가 우리를 멸하려 하는 것을 역으로 빌미 삼아 반역을 꾀한 것은 형님이었잖아.”
“맞다. 내가 원했다. 몇 십 년을 그토록 원했지만, 그전까지는 이 권좌의 근처에도 다가갈 수 없었지.”
황제는 자신의 동생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그것이 고작 반년 만에 내 손에 들어오더군. 정치적인 밑 작업도 필요 없었지. 전부 죽여 버리면 그만이었으니까. 허탈할 정도로 쉬웠다.”
황제의 눈이 형형한 빛을 띠었다. 루데키아스는 그가 저런 눈을 한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루데키아스, 너는 대체…… 무엇이냐. 대체 무엇이기에 내가 그리 애를 써도 손에 잡을 수 없던 것을 그렇게 쉽게 내 손에 쥐여 줄 수 있는 것이냐. 나를 황제로 만든 그 힘이 왜 하필이면 너에게 있는 것이더냐.”
그 말에 마라피네스는 힘겹게 기침을 하면서도 웃었다.
“쿡, 쿨럭, 크하, 하! 아, 아아…… 형님, 지금 우리가 무서운 거야? 자신을 황제로 만든 그 힘은 반대로 황제의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도 있으니 그게 무서운 것이지?”
“형님께 언사가 불손하군.”
“우리가 형님의 그 자리를 위해 얼마나 더러운 짓까지 했는데!”
“나를 위해?”
황제는 조소했다.
“말은 똑바로 해야지. 그것이 나를 위한 것이었나? 너의 가족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형님, 형님도 제 가족입니다.”
“가족.”
황제는 느리게 턱을 쓰다듬었다.
“그렇다면 디트레히트가 죽을 때 너는 어디 있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