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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따라 종말까지-32화 (32/257)

32화.

그 말에 아리스는 냉큼 옷을 챙겨 입었다. 아리스는 이후에 라일라에게 더 붙잡혀 있는 것이 아닌가 걱정되었지만, 라일라는 오히려 아리스에게 관심을 거두고 계측기에 기록된 숫자들을 노트에 열심히 옮겨 적더니 복잡한 연산식을 세워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연필 끝을 노트 위에서 탁탁 치더니 무언가 잘 풀리지 않는지 얼굴을 구겼다가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리비엘로, 지금 신성력 좀 내어 볼래?”

“지금? 하지만 지팡이를 두고 왔어.”

“상관없어. 아주 조금이어도 괜찮으니까.”

그 말에 갑자기 미레아와 시오가 박수를 짝짝짝 쳤다. 쿤둘렌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면서 그들을 따라 박수쳤다.

“뭐 하는 거야?”

아리스의 질문에 시오가 대답했다.

“자, 너도 빨리 박수 쳐. 호응이 좋으면 좋을수록 리비엘로의 신성력은 향상되는 법이거든.”

시오의 설명에 아리스는 어렴풋이 그들의 행동을 이해했다. 마법에서 주문이 필요한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주문은 마법 자체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다.

다만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술자의 높은 집중력이 필요한데 주문은 그러한 집중력을 높이는 데 사용하는 것이었다. 어려운 단어를 시처럼 낭송하는 모습은 대개 멋있어 보이니 자신에게 도취할 수 있는 도구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것은 신성력 역시 마찬가지였다. 감정의 고양은 성직자들이 내는 신성력의 크기를 더 증폭시킨다. 그들의 앞에 선 리비엘로는 우아한 동작으로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그러자 미레아가 양손을 입가에 고깔 모양으로 모으더니 좀 신이 난 목소리로 외쳤다.

“절! 세! 미! 녀! 리! 비! 엘! 로!”

그러니 이들의 반응이 이런 거다. 잘한다, 잘한다, 추임새를 넣어 주는 거로 기분이 고양되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미레아에게 질세라 시오와 라일라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록산의 대표 가희(歌姬) 납셨다!”

“12번째 성가 불러 줘!”

“나는 그렇게까지 띄워 주지 않아도 된다니까…….”

추임새가 필요 없는 성격이었는지 멋쩍게 웃은 리비엘로는 목을 가다듬더니 나지막하게 숨을 내뱉었다. 숨결에 콧노래가 섞여 흐르더니 곧 가사로 바뀌었다. 리비엘로는 라일라가 요구한 성가를 노래했다. 그녀의 신성력은 성가의 음파에 섞여서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아리스는 감탄을 담아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노래를 통해 신성력을 내는 것은 상당히 영리한 방법이었다. 음파는 멀리 그리고 넓게 퍼지니 말이다. 각 종교마다 성가대가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리비엘로의 음색은 깨끗하고 고왔으며 듣는 사람의 마음을 진정시키는 목소리였다. 지금 당장 오페라 하우스에 서서 노래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실력인지라 아리스는 내심 놀랐다.

라일라가 앞에 둔 계측기의 바늘이 또 움직이기 시작하자 얼른 그 수치들을 받아 적었다. 리비엘로는 한 소절만 부르고 노래를 멈췄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는지 라일라는 또 노트에 코를 박고 있었다.

라일라가 너무나도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차마 방해하지 못하고 조용히 그녀의 노트나 훔쳐보다가 하나도 이해할 수 없어서 금방 싫증 냈다. 다행히도 라일라가 금방 고개를 들더니 자신의 짐을 허둥지둥 챙겼다.

“잊어 먹기 전에 연구실 가서 실험 좀 할게! 아, 쿤둘렌 저 이것 좀 빌려주세요. 쓰고 바로 드릴게요.”

쿤둘렌의 허락이 떨어지자 라일라는 계측기를 챙겨서 자신의 자전거 짐칸에 다른 물건들과 함께 몽땅 쑤셔 박더니 인사도 없이 빠르게 사라졌다.

“무언가 영감을 받았나 봐.”

미레아가 허탈하게 웃었다. 시오는 아리스와 미레아의 어깨를 툭툭 쳤다.

“우리는 여기서 더 폐를 끼칠 수 없으니 같이 저녁이나 먹으러 갈까?”

미레아가 동의하며 리비엘로의 옆에 다가가 팔짱을 꽉 꼈다. 그리고 반대편에는 아리스의 팔을 꼈다.

“리비엘로도 같이 가는 거야. 좋든 싫든 몇 달 동안 얼굴 봐야 하는데 제발 좀 친해져 봐.”

아리스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고 리비엘로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들은 대문까지 배웅 나온 쿤둘렌에게 정중하게 인사하고는 트램 정거장으로 향했다. 리비엘로는 따라가다 다시 쿤둘렌에게 돌아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쿤둘렌, 위대한 보비네의 충직한 백성이시여. 당신이 아리스의 마력이 끼치는 파급력에 대해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요. 이 자리에서 막연하게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을 드리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여신의 조각은 이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어요. 그러니 쿤둘렌께서 할 수 있는 일을 해 주세요.”

쿤둘렌은 따듯하게 웃으며 양손을 합장하였다.

“그대에게 서리 여신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당신에게도 보비네의 광명이 있기를.”

오빈은 인간식 인사를 하고 인간은 오빈식 인사를 하며 헤어졌다. 트램 정거장에서 저녁 메뉴를 정하고 있던 세 사람은 저 멀리서 트램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리비엘로를 재촉했다.

리비엘로는 조금 뛰어서 막 출발하려는 트램을 따라잡아 올라탔다. 그들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는데 공교롭게도 끝에서부터 시오, 미레아, 아리스 순으로 좌석에 앉는 바람에 빈자리가 아리스 옆자리밖에 없었다. 하지만 리비엘로는 태연하게 빈자리에 털썩 앉았다.

“잘생긴 신사분. 제가 합석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어요?”

“이미 앉아 놓고 무슨 소리야?”

아리스는 퉁명스럽게 대꾸하더니 물었다.

“얘네들은 마이련식 전골을 먹으러 가자는데 넌 어때?”

뜻밖에도 아리스가 무시하지 않고 의견을 물어 오자 리비엘로는 잠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고개를 저었다.

“난 먹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어.”

“그래? 맵지 않게만 요리하면 크게 호불호 갈리지 않는 음식이라 괜찮으면 한번 먹어 볼래?”

“좋아.”

“람도 먹는대.”

아리스가 리비엘로의 말을 전하며 미레아 쪽을 돌아보자 미레아가 후후 웃었다. 그 반대편에서는 리비엘로가 후후 따라 웃더니 서운하단 어투로 말했다.

“어머나, 성 말고 리비엘로라고 불러도 되는데.”

“람.”

“어머.”

타협은 없다는 단호한 대답에 리비엘로가 서운함을 내비쳤다.

“그래,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 이만해도 큰 발전이잖아?”

미레아가 여전히 후후 웃으며 팔꿈치로 아리스를 가볍게 쳤다. 리비엘로는 미레아가 아니었다면 아리스가 고작 저녁 메뉴 때문에 자신과 말 섞는 일 따윈 결코 없었을 것이라 확신했다.

* * *

날은 어느덧 4월 초입으로 넘어가 루아드 제국으로 출발하기 전날이었다. 아리스는 늦은 아침을 먹고 테라스에 있는 흔들의자에 방정치 못한 자세로 앉아 나른한 고양이처럼 햇볕을 쬐며 쿤둘렌이 내준 숙제를 하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찰칵하는 셔터 음이 들렸다.

“얼굴 주인한테 허락은 받고 찍는 거야?”

아리스는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소리의 진원지에 대고 물었다. 작게 웃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 번 더 찰칵, 셔터 음이 울렸다. 이번에는 한쪽 눈썹을 올리며 뒤를 돌아봤다. 미레아가 커다란 사진기를 들고 렌즈를 통해 아리스를 보고 있었다.

“웃어!”

하지만 아리스가 미처 표정 관리를 하기도 전에 셔터 음이 먼저 들렸다. 아리스는 이대로 있다가는 피사체로 실컷 쓰일 것 같아서 자리에서 일어나 책으로 사진기 렌즈를 덮어 버렸다.

“계속 찍을 거야? 이건 어디서 났어?”

“내일 가져갈 짐을 챙기려고 여기저기 뒤지다 보니 나왔어. 새 필름도 남아 있더라고.”

미레아는 입꼬리에 미소를 걸고 낡은 사진기를 만지작거렸다.

“이것도 가져갈까 봐.”

“짐을 줄여도 모자랄 판에 그걸 가져가서 뭐에 쓰게?”

“뭘 모르는군. 추억에서 남는 건 사진이라고.”

“추억 여행하러 가는 것이 아니잖아.”

“추억 여행이 아니라 해도 나중엔 그런 것도 다 추억이 되는 법이야.”

미레아는 책을 쳐서 치운 다음 아리스를 잡아끌어 정원 한가운데에 세웠다.

“움직이지 말아 봐.”

아리스에게 엄하게 이르고는 미레아는 대문 앞까지 가서 사진기를 들었다. 아리스가 어색해서 어정쩡하게 섰다.

“왜 날 찍으려 그래?”

“있어 보라니까?”

미레아는 자신의 자세를 이리저리 바꿔 보며 구도를 맞췄다. 그러다 원하는 그림이 나오지 않자 입술을 삐죽였다.

지금 둘이 서 있는 자리는 이 집에 아리스를 데리고 처음 왔을 때 대문 앞에 떨어져 있던 열쇠를 가지고 돌아오다 정리되지 않은 정원 한복판에 서 있던 그를 봤을 때와 똑같은 위치였다. 아리스도 같은 위치였고, 미레아도 같은 위치였다. 심지어 시간대도 비슷했다. 다만, 정원의 모습만 다를 뿐이었다.

미레아는 아직도 어정쩡하게 서 있는 아리스를 열심히 렌즈로 노려보며 생각했다. 분명, 그때는 그 어지러운 정원 속에서 아리스만 돋보였다. 마치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것이 존재하는 느낌이었다. 아리스가 그곳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반대였다. 이 자리는 아리스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었다. 미레아는 이것이 단순히 정원의 변화만은 아니라 생각했다. 그녀는 그 당시 자신이 느꼈던 풍경을 찍고 싶었던 것이라 아쉬웠지만 이것은 이것대로 괜찮았다.

찰칵.

“임무를 떠나기 전에 사진 하나쯤 남겨 둬야지. 돌아오면 계절이 바뀔 텐데.”

쿤둘렌의 아내인 샤르네는 미레아가 돌아오기 전까지 이 정원의 손질을 기꺼이 맡아 주었다. 모처럼 예쁘게 꾸몄는데 또 정글로 만들 수 없는 노릇이었다.

미레아는 사진기에서 눈을 떼고 말했다.

“있잖아, 아리스. 그거 알아? 사실 나는 내 가족들이 전부 죽은 이후 이 집에 혼자 있는 걸 엄청 무서워했거든.”

아리스가 담담한 얼굴로 경청했다.

“네가 보다시피 이 집이 혼자 쓰기엔 좀 크잖아. 그래서 가족들 없이 혼자 있으려니 너무 어색하고 그래서…… 그래서, 몇 년은 수도 아카데미에 가서 거기 기숙사에서 돌아오지 않았었어. 졸업하고 나서 세피로스의 밑으로 들어가기로 했을 때도…… 이 집을 마주하는 것이 겁나서 기숙 아파트로 들어갔어. 전에는 파울로와 세피도 같이 살았었지만, 그 둘은 지금 자기 집이 따로 있고 가족도 있단 말이야. 그래서 이 집에서 같이 살자고 할 수 없었어. 그렇게 어영부영 5년이나 이 집의 정원이 정글이 되도록 내버려 두었는데…… 사실 나도 이 집에 돌아오고 싶었어. 그런데 그 이상으로 너무 겁이 나더라. 나는 내가 그렇게 겁쟁이인지 그때까지도 몰랐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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