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오빈과 인간은 마석을 이용해 봤자 정신계 물질인 ‘영소’가 실제로 마력으로 전환되는 양은 극히 미미했다. 그러므로 마법 술식과 주문, 촉매가 필요한 것이다.
커다란 바위를 드는 힘을 마력이라 치자. 맨몸인 인간이 자신의 몸보다 큰 바위를 직접 드는 것은 많은 힘을 요구한다. 하지만 도구를 사용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도르래를 사용하면 훨씬 더 적은 힘으로 바위를 들어 올릴 수 있다. 마법 술식은 그 도르래 역할을 한다. 도르래에 윤활유를 바르면 사용하기 더 편해지는데 그런 역할을 하는 게 바로 촉매와 주문이었다.
그런데 아리스의 마법에는 도르래도 없고 윤활유도 없었다. 오로지 마력만 있을 뿐이었다. 비유하자면 인간이 아무런 도구 없이 맨몸으로 바위산을 들고 있다는 소리다. 단순히 그리 하겠다 ‘생각’하고, ‘의지’를 가지면 그것이 마력으로 전환되어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쿤둘렌은 마른세수하였다.
“다른 사람들이 마법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긴 아는 거죠?”
“사람 참 무시하시네. 저도 기초적인 마법학은 이수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시큰둥했다.
“아는데 왜 이렇게 무식한 방법을 써?”
미레아의 말에 아리스는 손을 휘적이며 대답했다.
“난 이게 편해. 복잡한 술식 외우지 않아도 되고.”
“하하, 재수 없어.”
시오가 칭찬하는 것 같은 어투로 욕을 했다. 쿤둘렌 앞에서 말을 가리지 않은 덕에 시오는 리비엘로에게 옆구리를 쿡 찍혔다. 쿤둘렌은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기초적인 것은 이수했다고 하니 어느 선인지 한번 문제를 내 보겠습니다.”
쿤둘렌이 종이에 문제를 적어 내는 동안 일이 점점 귀찮게 돌아가는 것에 불만이 커진 아리스는 몰래 혀를 찼다.
쿤둘렌은 약 30분의 시간을 주었지만, 아리스는 막힘없이 답을 술술 적어 나가더니 5분 만에 답안지를 제출했다. 하지만 답안지를 읽는 동안 쿤둘렌의 미간이 절로 구겨졌다. 대충 써 내려간 것은 그렇다 치는데 특히 마지막 서술형에 대한 답안이 가관이었다.
[술식이 없어도 약 7,000 에쿠 이상의 마력을 한곳에 집중하면 지나치게 밀집한 마력 사이에 반발이 일어나 열에너지가 발생한다. 그렇게 되면 자연 발화가 일어나 지열을 불태울 수 있으니 술식이 필요 없다. 7,000 에쿠 이상의 마력을 사용하여 측정한 논문이 없어 학술적으로 검증되지는 않았으나 실제 경험에 기반하였을 때 관측 가능한 현상이다.]
애초에 7,000 에쿠까지 마력을 쓸 수 있는 개인은 없거니와 그 증명이랍시고 내놓은 대답은 ‘내가 하니까 되던데.’라니. 쿤둘렌은 50여 년에 걸쳐 쌓아 온 자신의 학문적인 지식에 대한 회의를 느꼈다. 아리스의 답안을 종합하여 점수를 매긴 쿤둘렌은 아리스의 수준을 평했다.
“일반 아카데미 4학년 수준.”
참고로 일반 아카데미는 4학년까지 과정이 있다. 보통은 일반 과정을 이수한 후 이어지는 3년 과정인 심화 아카데미에서 국가에서 지원하는 기초적인 교육을 마친다. 심화 과정까지 마친 마법사들은 고급 아카데미에서 마법학을 4년 동안 전공 이수하여 자격을 취득해야 했다. 거기에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하려면 박사 과정까지 수료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아, 실제로 그즈음에서 마법을 배우는 게 멈추긴 했어요. 제가 그때 반란 일으키는 데 따라가는 바람에…….”
아리스가 변명을 덧붙이자 쿤둘렌은 다시 한번 신음을 흘리고는 속으로 자신의 신에게 한탄했다.
오, 보비네이시어!
갈 길이 구만리였다.
“그럼 대체 최대치로 낼 수 있는 마력은 얼마야?”
라일라의 질문에 아리스는 골똘히 고민하였다.
“제대로 측정 안 해 봐서 모르겠는데 지금은 아마 20,000 에쿠 이상은 될걸?”
라일라와 쿤둘렌이 경악하는 사이 시오가 행간의 단어를 찍어 얘기했다.
“지금은? 예전에는 달랐어?”
“마검 페니드란으로 클라인을 봉인할 때 거의 기초대사 기능만 유지할 수 있는 정도만 남기고 마력 대부분을 써 버렸으니까. 5년 동안 회복하긴 했는데 전부 돌아온 것 같지는 않고.”
그렇다면 예전에는 대체 어느 정도였단 소리인지 차마 묻기가 두려웠다.
“아니, 왜들 그래요. 데르카이드 처음 봐?”
“난 처음 본다.”
“나도.”
시오와 라일라의 말에 쿤둘렌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100년 동안 공식적으로 집계된 데르카이드 수가 200명이고, 비공식적으로는 3배에서 많게는 10배 이상은 있으리라 추측하지만 그리 많은 수가 아니라 제대로 된 연구 기록이 없기는 합니다. 하지만 데르카이드라고 해서 모두 이 정도는 아닙니다. 적어도 제가 아는 선에서는 말이지요.”
쿤둘렌은 한때 연구 목적으로 데르카이드를 조사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직접 데르카이드를 섭외하는 것부터 큰 난관이었고 데르카이드가 나타난 역사가 길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 단발적으로 연구된 자료들이 전부였다.
그래서 심도 있는 수준까지 도달하지는 못하였으나 학계에 있는 학자 중 데르카이드에 대해 어느 정도 검증된 지식을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세피로스가 그에게 아리스를 맡긴 이유에는 그 사실도 포함되어 있었다.
쿤둘렌은 실제로 만나 봤거나 기록상에 남아 있는 다른 데르카이드들의 예를 들어 주고는 말을 이었다.
“최초의 데르카이드였던 백익(白翼) 니콜라우스의 경우 마석이 없어도 마력 측정치가 30,000 에쿠 정도 되었지만, 그 이후 세대의 데르카이드들은 급격하게 감소하여 보통은 10,000 에쿠 정도에서 그칩니다. 보통의 인간일 경우 마석이 있을 때 평균 1,500 에쿠 가량을 낼 수 있고 오빈은 그보다 조금 더 높다고 하지만 평균 2,000 에쿠 정도입니다.”
쿤둘렌의 말을 듣고 있던 시오가 물었다.
“그럼 용은요?”
“용은 마력의 운용이 인간과 오빈과는 달라. 이마의 용주가 마석을 대신하고 술식은 신경계 안에서 자체적으로 전환되지. 용이란 개체 하나가 거대한 마법식인 거야. 그러니 용의 마력을 측정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어.”
미레아는 아리스가 붙여 놓은 유리병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시오에게 설명해 주었다. 쿤둘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리스, 당신은 어쩌면 니콜라우스에 견줄 만한 마력량일 수도 있겠군요.”
“말이 나온 김에 측정해 보지 그래요?”
지금까지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리비엘로가 말을 꺼냈다.
“어차피 마도 기계를 개조하려면 어느 정도 수준인지 알아야 하잖아.”
그 말에 라일라와 쿤둘렌이 동의했다. 측정 기구를 내오는 쿤둘렌에게 아리스가 황급히 말했다.
“이 연구실을 폭발시킬 생각이 아니라면 밖에서 해야 할 거예요.”
그리하여 밖으로 나온 그들은 뒷마당에 모였다. 아리스는 속에 입은 옷만 남기고 겉옷과 셔츠를 벗었다. 안에 입은 옷은 등이 훤히 노출되어 있었는데 그가 그런 옷을 입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사용하는 마력이 일정 이상 넘어가면 날개는 저절로 나와. 책이나 논문에는 데르카이드의 날개가 가진 기능에 대한 여러 추측이 있지만, 내가 봤을 땐 아마 마력이 흐르는 것을 보조해 주는 것이 아닐까 싶어. 날개를 꺼내지 않고 마법을 써 보려고 한 적이 있었는데 뭔가 막힌 기분이었거든. 그게 왜 날개 형태여야 하는진 나도 모르겠지만.”
아리스는 양쪽 어깨 관절을 번갈아 가며 돌리며 준비운동을 하였다. 라일라가 안테나와 계기판이 달린 기계를 아리스 앞에 놓아 주었다. 그녀의 표정은 기대감에 들떠 있었다. 아리스는 사람들을 물러나게 하더니 손끝에 마력을 모았다. 굳이 손끝인 이유는 집중할 때 가장 형상화하기 쉬운 신체 부위이기 때문이다.
마력이 손에 어느 정도 모이자 아리스는 그것을 증폭했다. 자연적으로 떠돌아다니는 영소와 그의 마력이 맞부딪히면서 파란 스파크를 일으켰다. 그의 마력이 일으키는 스파크가 어째서 푸른색인지는 아리스도 잘 몰랐다. 그만큼 데르카이드인 아리스 역시 본인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았다.
손에서 시작한 마력은 전신으로 퍼지더니 그가 경고한 대로 갑자기 등에서 검은 날개가 확 돋아났다. 이제 아리스는 마치 번개를 두르고 있는 것 같았다. 지켜보는 사람들은 그 빛 때문에 눈을 찡그려야 했다.
“여기까지가 내가 무리 없이 마력을 끌어낼 수 있는 범위고…… 조금 더 올려 볼게요.”
스파크가 더 강해지자 미레아는 그가 이 일대를 전부 태워 먹는 것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잘못하면 연구실이 폭발할 거라는 경고를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리스는 힘이 들긴 하는지 이마에서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얼굴을 살짝 일그러트리더니 바로 마력을 거두었다.
“이 이상 올리면 몸에서 마력 고갈이 일어나요.”
아리스는 날개까지 완전히 집어넣고 땀을 훔치며 숨을 몰아쉬었다. 라일라는 계기판의 숫자를 읽어 주었다.
“최대 출력일 때 측정이 22,624 에쿠. 난 인간한테 이런 수치는 처음 봐.”
“회장님께서 마법을 배우라 한 이유가 있었군요.”
쿤둘렌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마력은 곧 정신력이다. 그 정신이 행하고자 하는 것은 의지이다. 그러므로 마법은 술자가 원하는 바를 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런데 데르카이드의 마력으로 마법을 행한다면, 그 의지가 꺾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면, 데르카이드는 자신의 의지로 세계의 운명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서리 여신의 속삭임이 정말 표면적인 의미를 그대로 실현되는 것이라면, 이 자를 흑익으로 지칭하는 것이 현재로선 옳은 해석이겠지. 그렇다면 제대로 된 마법을 가르쳤을 때 그가 미치는 영향력은 도대체 어느 정도가 될지 전혀 알 수가 없군.’
그렇게 생각한 쿤둘렌은 리비엘로를 바라보았다. 리비엘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사색에 잠겨 있다가 쿤둘렌의 시선을 느끼고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서로 별다른 말을 한 것은 아니었으나 리비엘로는 그에게 미소 지었다. 쿤둘렌도 작게 웃고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수업이라고 하기엔 민망하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죠. 저도 다음 수업에 대해 준비해야 하니 오늘 시험의 결과를 참고해서 커리큘럼을 세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