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아리스는 어려서부터 목숨에 위협을 받았고, 세상으로부터 멸시 당했으며, 아군보다 적이 더 많았다. 살기 위해 아버지와 백부가 일으킨 반역에 가담했고 선봉에 서서 같은 황실의 혈족들을 도륙하였지만, 그 대가는 배신이었다.
아리스에게 세상의 모든 불행이 쏟아진 것은 아니었지만 좋은 것은 전부 자신의 손안에서 빠져나가 손바닥에 헛된 희망이라는 작은 흔적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가 그나마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이 세상에 좋은 구석이 조금이나마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것이 다시 자기 것이 될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단 최소한의 기대감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거기에 원래 욕심이란 게 많지 않았던 아리스의 천성도 한몫했다. 현 상황에 순응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 이상 나서서 무언가를 바꿔 보겠단 의지가 있지는 않은 그의 천성 말이다.
미레아는 과거에 있었던 사건들에 비하면 자신이 운이 좋다고 생각하는 편이었지만 아리스 역시 미레아처럼 본인의 상황을 그렇게 받아들일까? 미레아는 회의적이었다. 그렇다고 감히 그를 탓할 수 없었다.
미레아가 파란 수면 위에 부서지는 햇살을 담은 것 같다고 생각했던 푸른 눈동자는 지금 심연보다 더 깊어 보였다. 그가 정말 황제의 목을 원하는 것인지 미레아로선 알 수 없었다.
“그러니 저를 이용하세요. 대신 제게 황제의 목을 주세요. 여러분께서 저를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얼마든지 이용당해 드리겠습니다.”
아리스의 말에 회의장 안이 찬물을 뿌린 것같이 조용해지자 세피로스가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뭔가 착각하고 있군, 아리스 클라인셔드.”
아리스가 눈동자를 돌려 세피로스를 바라보았다. 세피로스는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건 채 단단한 표정으로 아리스를 응시했다.
“네가 말한 그건 동맹이라고 하는 거다.”
아리스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세피로스는 이 자리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확언하듯 말했다.
“우리는 동맹 관계다. 내가 아리스 네게 협력을 요청했듯 너 역시 그게 맞는 정당한 몫을 나에게 요구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지킬 의무가 있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네만 네 의견은 다른가 보지?”
아리스가 대답하기 전에 라케드가 귀찮다는 듯 먼저 말했다.
“이용이라고 부르든, 동맹이라고 부르든, 한배를 탄 이상 항해하는 동안 최선을 다해 서로 협력하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저는 결과만 좋으면 그 어느 쪽도 상관없습니다, 회장님.”
아리스는 세피로스가 당연한 소리를 참으로 상투적으로 표현한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라케드의 말 뒤에 이어진 말은 당연하지 않은 소리였다.
“그러니까 아리스 네놈, 출발 전까지 쿤둘렌에게 마법을 배워라.”
그 말에 사람들이 라케드와 세피로스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들의 얼굴에는 모두 같은 의문이 떠올라 있었다. 지금 클라인을 봉인할 만큼 강력한 마검을 만들었으며, 그 힘으로 한 제국의 황제를 갈아 치운 사람한테 뭐라고?
당사자 역시 어이없는 건 마찬가지였는지 아리스는 의자에 기대고 있던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왜 갑자기 주제가 그쪽으로 튀는지 영문을 모르겠는데요?”
“네놈이 협력한다고 그러니 하는 소리이지 않냐. 쿤둘렌은 좋은 스승이 될 거야. 오늘부터 부탁하지.”
“이 건은 나도 동의했다.”
“하지만, 회장님. 제가 그에게 가르칠 만한 무언가가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는 이미 완성된 마법사입니다. 데르카이드이기도 하고요.”
쿤둘렌의 정중한 의문에 세피로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저 녀석이 마법을 쓰는 꼴을 한번 보면 생각이 바뀔걸.”
“아리스가 마법 쓰는 꼴? 마법 잘만 쓰던데요?”
시오가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아리스는 세피로스의 의중이 대충 짐작 가는 구석이 있어서 더 말을 할 수 없었다.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만 멀뚱멀뚱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추가적인 사항이 생기면 다시 소집할 예정이다. 그전까지는 출발까지 시일이 좀 있으니 각자 몸 상태 관리에 신경 쓰는 게 좋을 것 같군. 아리스, 쿤둘렌은 한때 아카데미 교수 자리에 역임한 적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시간 없으니까 오늘부터 바로 시작해서 최대한 많이 배워 놓도록.”
자기 할 말만 하더니 서류를 탁탁 정리하며 먼저 일어나는 세피로스를 보면서 아리스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자고로 공부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드문 법이고, 아리스는 드문 경우에 속하지 않았다.
세피로스가 먼저 퇴장하자 쿤둘렌이 아리스 앞에서 작게 헛기침하였다. 아리스는 자신을 드리우는 커다란 검은 그림자를 애써 외면하며 물었다.
“제가 마법을 꼭 배워야 하나요?”
“저는 하달 받은 명령을 이행할 의무가 있습니다. 당신에게 마법을 가르쳐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리스는 목덜미를 쓸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회장님께서는 오늘부터 바로 수업에 들어가는 것을 원하시니 괜찮으시다면 제 개인 연구실로 가실까요?”
쿤둘렌은 옆에서 눈을 번뜩이고 있는 세 사람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다른 용건이라도 있습니까?”
그들이 쿤둘렌의 말에 대답하기도 전에 라케드가 서류철로 정수리를 한 대씩 때리며 지나갔다.
“야, 꼴통 3인방. 또 일 만들지 말고 곱게 집에 가라?”
미레아, 시오, 라일라는 맞은 자리를 문지르며 라케드의 뒤통수를 노려보다 그가 나가자마자 라일라가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말했다.
“마도 기계를 개조할 때 참고할 수 있도록 저도 수업에 참관하고 싶습니다. 아리스의 마법 수준을 정확하게 알아야 기계를 조정할 때 도움이 됩니다.”
제법 그럴싸한 핑계였다. 쿤둘렌이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있는 시오에게 시선을 돌리자 그는 가볍게 대꾸했다.
“마법 쓰는 꼴이 대체 어떤지 보려고요.”
미레아는 그보다 더 당당한 얼굴로 말했다.
“오늘 저녁 담당이 아리스인데 얘가 없으면 밥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제가 굶어요.”
누가 봐도 구색 맞추기로 꺼낸 이유였지만 쿤둘렌은 눈감아 주기로 했다. 그는 파울로와 리비엘로에게도 물었다.
“혹시 다른 이유로 동행하실 분 계신가요?”
“저는 집에서 마누라가 기다리고 있어서 정시 퇴근하겠습니다.”
파울로는 그렇게 말하며 정말 바람처럼 사라졌다.
“나는…….”
리비엘로는 적당히 사양할 말을 찾으며 자리를 뜨려 했지만, 라일라가 갑자기 붙잡았다.
“제가 리비엘로의 신성력과 아리스의 마력을 각각 조율해야 하는데 이 자리에 리비엘로가 없으면 안 되잖아요?”
“음…….”
리비엘로는 아리스의 눈치를 살폈다. 아리스가 반쯤 포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불편하지만 않다면 도와줄게요.”
이로써 라일라의 사심을 담은 계획이 성공했다.
* * *
쿤둘렌의 개인 연구실은 그의 저택에 딸린 별채에 마련되어 있었다. 아기자기하고 소탈한 면이 있는 미레아의 집과는 달리 쿤둘렌의 집은 고풍스러운 그의 성정을 대신하는 듯했다. 오빈족 전통 문양으로 수놓은 카펫이 널려 있었고 주로 자수 공예품이 집 안을 꾸미고 있었다.
연구실로 사용 중인 별채에는 책이 엄청나게 많았다. 여기저기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별채의 문에서 책상까지 가는 일직선으로 난 길만 깨끗했다.
쿤둘렌은 평소에는 잘 쓰지 않아서 책과 마도구만 잔뜩 올라가 있는 책상 하나를 비웠다. 예고 없이 들이닥친 손님들에게 쿤둘렌의 아내인 샤르네는 기꺼이 꽃차를 내어왔다. 그들은 2남 1녀의 자녀가 있었지만, 현재는 모두 아카데미 학기를 이수하러 집을 떠나 있었다.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시며 쿤둘렌이 말을 꺼냈다.
“가르치라고 명령을 듣긴 했습니다만, 학생의 수준을 모르니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모르겠군요. 제가 간단한 테스트를 몇 가지 해도 괜찮을까요?”
“그러세요.”
아리스는 여전히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선, 마법을 쓰는 것을 한번 보라 그랬으니 간단한 마법 몇 가지만 보여 주십시오. 가령…….”
쿤둘렌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주변을 휘휘 둘러보다 빈 유리병이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가져왔다.
“이 유리병을 깨트리지 않고 수직으로 깨끗하게 잘라 볼까요?”
쿤둘렌이 그것을 책상 위에 세우자 아리스는 차를 마시면서 손가락을 세로로 휙 그었다. 푸른 스파크가 유리병 표면에 일더니 챙 하는 맑은 소리가 나며 유리병이 정확하게 양 갈래로 쪼개졌다. 쿤둘렌이 요구한 대로 깨지지 않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본 사람들의 얼굴은 살짝 굳었다.
“평소에도 이런 식으로 마법을 사용하십니까?”
“음…… 그렇죠…….”
아리스가 말꼬리를 늘리며 대답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쿤둘렌은 세로로 쪼개진 유리병을 아리스 앞에 밀어 놓더니 다시 말했다.
“자, 그럼. 이번엔 원래대로 붙여 보세요.”
쓰러져 있던 유리병 두 조각이 둥실거리며 가볍게 허공에 뜨더니 자석에 철이 붙듯 저들끼리 딱 붙었다. 아리스는 자신의 마력이 주변 영소와 반발하며 유리병 표면에 푸른 스파크를 일으키고 있는 것을 손으로 잡아 책상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남은 차를 마시며 조용히 쿤둘렌의 평가를 기다렸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시오였다.
“이게…… 가능해?”
“방금 봤잖아.”
아리스의 대답에 라일라가 커다래진 눈을 비볐다.
“아니, 나도 이론적으론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까 어이가 없네.”
“그러니까, 평소에도 이런 식이라고?”
미레아의 물음에 아리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스를 제외한 사람들은 할 말이 많은 얼굴로 그를 보았다. 그들의 반응이 이러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마법이란 결국 사람이 자신의 정신력을 끌어와 물질 에너지로 전환하여 사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절대로 마법을 쓸 수 없다. 정신 에너지를 물질 에너지로 효율 좋게 전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매개체, 마석이 있어야 했다. 그리고 마석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마법을 쓸 수 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