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29화 (29/257)

29화.

세계 역시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여러 물리법칙이 생겨 세계의 질서를 이루기 마련인데 그 유기적으로 연결된 고리가 깨진다면 자연스럽게 물리법칙마저 기존과 다른 게 바뀌기 마련이었다.

문제는 부식된 지역 안에서 물리법칙이 어떤 식으로 바뀌는지 예상을 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무작위적이었고 상식을 뛰어넘는 일도 있었기 때문에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런 곳에서 마수를 상대하며 생존하는 것은 그 누구라 해도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러니 라케드가 저런 반응인 것도 당연하다.

“잠깐. 지금 호위가 3명, 아리스까지 전투원에 포함한다 해도 겨우 4명이라 마수에 대비한 별동대가 소대 단위 정도는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가요?”

“라케드와 교대해서 들어갈 사람을 포함한다면, 세 명이다.”

사람들의 얼굴이 실망감에 굳었다. 대장의 직책을 맡은 파울로가 대표해서 툴툴거렸다.

“대체 그 인원을 얻다 씁니까.”

“내 얘기를 마저 들어. 아리스가 있잖나. 마검의 주인. 마검의 근원. 마검의 위치를 알 수는 없어도 마검과 가까워지면 공명할 수 있으니 위치도 알 수 있겠지.”

아리스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페니드란이 원래는 저랑 정신적으로 연결되어 있긴 했는데 그걸 강제로 끊어 버린 바람에 근처에서 공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5년이나 지나서 그 녀석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지 예측할 수 없어요.”

“최소한 방향 정도는 느낄 수 있을 걸세. 마검의 본질은 자네 마력이니.”

“그거 정도는…… 그럭저럭…….”

“나침반 같은 것이군요.”

쿤둘렌이 간단명료하게 아리스의 역할을 정의 내렸다. 아리스는 그 표현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었으나 다른 사람들은 전부 이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나는 처음부터 자네들을 그 안으로 밀어 넣을 생각이 없다. 클라인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암흑 지대 바깥에 신성력 순환기부터 설치해야 해.”

그 말에 라케드는 준비해 뒀던 커다란 지도를 탁자 위에 폈다. 그리고 펜으로 암흑 지대의 경계를 표시하고 지도 위에 미리 그려진 동그라미를 탁탁 가리켰다.

“정식 명칭은 다들 아는 대로 ‘마력 촉매 신성력 연쇄 반응 광범위 술식 순환기’지만 이름이 지나치게 길어서 ‘부식 정화기’라고 부르겠다.”

라케드의 가차 없는 개명에 라일라가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다들 부식 정화기의 작동 모습을 한 번씩 본 적 있겠지만 그 원리를 제대로 설명해 주도록 하지. 부식 정화기는 오염된 정신계 물질을 정화하고 부식이 진행된 지역에 사라졌던 정신계 물질을 다시 돌려 놓는 역할을 한다. 어떤 원리냐면…….”

라케드는 지도 위에 동그라미가 쳐진 지역을 펜으로 이었다.

“이 지역들에 일차적으로 마력 제어용 마도구를 설치해서 마력이 서로 흐르도록 연결을 할 거다. 그리고 람 군의 신성력으로 부식 정화기를 작동시키면 서로 거미줄처럼 연결되었던 이 마력의 흐름을 타고 신성력이 광범위하게 퍼지게 된다. 그 과정에서 신성력과 마력은 소멸하지 않고 서로를 자극해 오히려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렇게 되면 신성력과 마력에서 흘러나온 오염되지 않은 영소가 부식된 지역에 다시 스며들어 정상적인 환경으로 조성…… 시오 미도르, 지금 내 설명을 들으면서 졸고 있는 건가?”

동공이 반쯤 풀려 있던 시오가 얼른 또랑또랑한 얼굴로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라케드는 성에 차지 않는지 작게 혀를 쯧 차고 말을 이었다.

“어쨌든 부식 정화기를 우선으로 설치할 지역은 총 15군데다. 처음에는 방금 말한 15군데 지역 위주로 정화 작업을 할 거지만 마검 페니드란을 회수했을 때 마도구만 제대로 작동한다면 마검의 마력으로 이렇게…….”

라케드는 15군데 지점을 서로 두서없이 잇다가 마지막으로는 암흑 지대 가장자리에 큰 원을 그렸다.

“이런 식으로 한 번에 정화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 원래 50군데 이상의 후보군이 있었으나 퍼블킨즈 군의 노력으로 이만큼 줄일 수 있었어.”

라일라가 하품하며 퀭하니 움푹 꺼진 눈을 비비며 추가 설명을 했다.

“대신 아리스와 리비엘로가 힘내야 해. 수를 줄인 만큼 술사들이 받는 부담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어요.”

아리스는 자신이야 상관없었지만, 리비엘로의 신성력이 걱정되었다. 이 정도 규모면 대신전의 고위 성직자가 필요할 수도 있는데 아리스가 봤을 때 리비엘로의 신성력은 그렇게까지 강해 보이지 않았다. 아리스가 불신 섞인 시선을 보냈지만, 리비엘로는 생글생글 웃었다.

라케드의 이어지는 설명은 이랬다. 루아드 영공에 라슈발렌 문장이 예쁘게 찍힌 비공정 띄우면 황제가 아주 싫어할 테고, 애초에 입국 허가조차 내주지 않을 테니 이동은 대륙 횡단 열차를 이용할 계획이었다.

암흑 지대 주변을 3개월에 걸쳐서 탐색한 후 부식 정화기를 설치한 다음 술식으로 조금씩 땅을 정화해 가장자리부터 안전한 지역을 확보한다. 그런 식으로 암흑 지대 안쪽으로 접근을 한 후 최대한 빨리 페니드란을 발견하도록 하며, 마수가 외부로 유출되기 전에 그 검을 매개로 암흑 지대를 한 번에 정화한다.

클라인 내부에 있는 마수들로 추가적인 피해를 보지 않게 하며 마검은 회수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그럼 황제 측 토벌단은요?”

“자기들이 자진해서 기어들어 가겠다는데 그냥 죽으라 해.”

라케드의 막말에 미레아와 시오가 진절머리를 쳤다. 가만히 듣고 있던 쿤둘렌이 입을 열었다.

“그걸 황제가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겁니다. 분명히 문제로 삼겠지요.”

쿤둘렌의 말에 미레아 역시 동의했다.

“맞아요. 남의 나라 땅에서 그런 짓 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놈이 어디 있겠어요?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해도 우리는 루아드 정부의 허가도 받지 않았고…… 이런 식으로 마음대로 휘젓고 다녀도 괜찮을까요?”

하지만 파울로와 세피로스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은밀하게 몰래 하면 되잖아. 어차피 결계가 클라인 전체를 한 번에 정화하기 전에는 티도 안 나. 마검을 찾기 전까지는 그 넓은 곳 중에 극히 일부만 정화하는 거니까. 황제가 눈치를 챈다 해도 그때쯤이면 우리는 마검을 들고 튄 다음이겠지. 그사이 연막은 회장님께서 적당히 쳐 줄 거야. 그렇죠?”

“게다가 클라인을 훔친 놈이 클라인을 다시 돌려놓겠다는데 뭐가 문제야? 마검은 아리스의 개인소유잖아요.”

시오의 말에 라케드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핑계를 대려면 수백 가지는 만들 수 있겠지.”

“그러니까 루아드 측에서 그 부분에 대해 문제 삼기 전에 황제의 목을 치면 되잖아?”

아리스가 대수롭지 않게 던진 말에 세피로스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토끼 눈을 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봐요? 세피로스가 분명 나한테 황제의 목을 준다 그랬단 말입니다.”

“잠깐, 회장님? 저에게 그런 말은 없으셨는데요?! 농담이시죠?”

라케드가 신경질적으로 다그치자 세피로스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반문했다.

“그게 문제라도 되나?”

“아니 당연히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라슈발렌 문제는 아니지. 우리는 땅을 정화하고, 그 틈을 이용해 마검을 회수한 것은 마검의 주인, 폐위된 대공자인데. 그 사정까지 우리가 알 바는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남의 집안 정치 싸움에 우리가 끼어들어야 하는 이유라도 있나.”

세피로스의 태연한 말에 라케드가 말문을 잃는 사이 미레아가 반발하고 나섰다.

“그 말은 아리스를 버리겠다는 소리인가요? 땅을 정화하고 마검만 회수하면 볼일은 더 없으니, 이후엔 아리스만 호랑이굴에 던져 넣고 우리는 뒤로 쏙 빠져 있겠단 말인가요?!”

“호랑이굴?”

아리스는 다른 사람이 입을 열기 전에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리고 담담한 어조로 반문했다. 격양된 미레아와는 달리 정작 당사자인 아리스의 얼굴에는 감정이 내비치지 않았다. 반짝이는 신록과 같은 눈빛과 지독할 정도로 가라앉은 푸른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쳤지만, 아리스는 눈을 느리게 감더니 고개를 돌렸다. 미레아는 자신의 눈을 피하는 그 모습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리스는 느리게 입을 열었다.

“호랑이굴이라…… 당신들은 호랑이가 누구라 생각하십니까? 이 세계에 파니드라우란 성을 가진 사람을 단둘로 줄여 버린 사람이 누구일까요? 그들과 저 둘 중 두려워해야 하는 쪽은 어느 쪽입니까?”

아리스는 스산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백 명을 도살하든, 천 명을 도살하든, 제 악명에 변함이 없는 것은 똑같은데 거기에 한두 명 더 추가된다 한들 뭐가 바뀌겠습니까. 저는 메르티어스 황제의 목만 있으면 상관없습니다. 그 목이 제자리에 붙어 있으나 떨어져 있으나 제가 겪어야 하는 고초의 종류만 달라지는 것이지 똑같잖아요. 그러면 황제의 목이라도 제가 갖는 쪽이 저의 작은 행복이 되지 않겠습니까.”

미레아는 마른침을 삼키며 생각했다. 이 사람은 역시 보통의 사람들과는 달리 어딘가 심하게 어긋났다. 미레아가 요 며칠간 본 아리스는 세간에서 떠드는 것처럼 잔악무도한 괴물이라고 볼 수 없었다. 그는 잘 웃고, 잘 떠들었다. 미레아에게 장난 거는 것을 좋아하고, 그 반응에 즐거워했지만, 상대방이 불쾌해하지 않을 선을 지키는 법을 알고 있었다. 만사 쾌활하게 행동했고, 가벼운 행동에도 격식이 있었다.

다만, 가끔 사회에서 통용되는 정신적인 태도가 범인들과 상당히 달랐다. 그것을 아리스 본인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자각하고 있기에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선을 지킬 수 있지만, 그는 세간에서 말하는 윤리 의식만이 정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비틀린 부분이 튀어나오는 것은 아리스의 성장 환경과 처한 상황들을 생각하면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미레아 역시 슬펐던 과거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던 시기가 있었고, 당시에는 세상이 모두 흑백으로 보였었다. 원망을 풀 곳이 없어서 혼자 가슴을 치며 세상을 부정하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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