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27화 (27/257)

27화.

검날의 길이는 가장 대중적으로 쓰는 검들보다 살짝 짧았다. 보통 그러면 길이에 비해 무거울 법도 한데 혈조(칼날에 낸 흠)를 깊게 파서 무게를 줄였다. 아리스가 썼을 때 그는 그럭저럭 다루기는 했지만 낯설었던 기억이 있었다.

“전부 다 빼고 검술로만 승부해 볼래? 검기 빼고, 마법은 더더욱 안 되고. 나는 술식이 새겨진 보조 기구 없이는 마법을 못 쓰잖아. 네 말도 안 되는 마력으로 밀어붙이면 승부가 안 된다고. 그러니까 순수한 검술로만!”

아리스는 자신의 새 검을 검집에서 조금만 뺐다가 다시 밀어 넣으며 대답했다.

“좋아.”

그는 미레아를 따라 연무장을 구경한 후 거추장스러운 겉옷은 벗고 최대한 움직이기 편하게 셔츠를 걷어붙였다. 미레아 역시 가벼운 활동복 차림이었다.

둘이 연무장 한가운데에 서자 할 일 없는 전투부 구경꾼들이 삼삼오오 몰려왔다. 아리스가 두리번거리자 시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우리 외에 다른 사람들에게 네 정체 들키면 안 되니까 날개 꺼내지 말고 마법 쓰지 마.”

“어차피 마법 금지 규칙이잖아.”

아리스가 스트레칭을 하는 것을 기다린 후 미레아는 검을 비스듬하게 늘어트린 준비 자세를 취했다. 아리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검이 두 자루인 것에 맞춰 변형하긴 했지만, 저 자세는 루아드 제국 황실 기사단 검술의 기본자세였다. 루아드 황실 출신인 아리스 역시 그 검술을 익혀서 사용했다. 아리스도 미레아처럼 몸에 익은 동작대로 검을 비스듬하게 비껴 늘어트렸다.

미레아가 씩 웃었다.

“선공한다.”

“와라.”

미레아가 발을 가볍게 통 구른다 싶더니 어느새 아리스의 코앞에 와 있었다. 전에 봤을 때도 느꼈지만 이렇게 빠른 움직임은 처음 봤다. 대응이 조금 느리긴 했어도 검술 자체는 아리스에게 익숙한 방식이었기 때문에 방어에 성공했다.

같은 검법이었기 때문에 기술 자체의 숙련도와 신체적인 능력으로 판가름 날 수밖에 없었다. 몇 합을 주고받은 뒤 아리스는 미레아의 움직임을 분석했다. 속도는 미레아 쪽이 우위라 해도 기술은 아리스 쪽이 큰 차이로 앞섰다. 근력도 그가 더 좋았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공략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찰나, 미레아의 허점이 노출된 것을 놓치지 않고 아리스가 치고 들어왔다. 그 순간 미레아의 움직임이 변했다. 고속으로 움직이던 와중에 동세를 거의 직각으로 꺾는 신기를 보이며 아리스의 검을 받아쳤다. 아리스의 표정이 잠깐 무너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아리스는 일단 거리를 벌렸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자세, 다른 움직임, 다른 검술이었다. 아리스는 어이가 없어서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방금 미레아가 보여 준 움직임은 마이련 중부 산악 지대 군사들이 쓰는 검법이었다.

아리스의 검술의 뿌리도 바로 그 두 검술에서 유래했다. 어릴 적 루아드 제국에서 익혔던 황실 기사단 검술과 외조부와 어머니를 통해 배웠던 마이련의 검술을 병용하는 것이 아리스의 특징이었다.

미레아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면서 검 끝을 가볍게 까닥거렸다.

“자, 와 봐.”

‘어떻게’라는 물음보다는 이렇게 된 이상 자존심 문제였다. 일부러 상대방이 쓰는 검술대로 도발해 오는데 그렇다면 응해 주는 게 인지상정이다. 아리스는 미레아의 바람대로 마이련의 검술을 사용하여 공격했고 미레아 역시 그 특유의 움직임을 이용하여 방어했다. 쌍검술로 변환한 것을 고려해도 미레아가 두 가지 검술로 오른 경지는 고수라 부르기 손색이 없다고 아리스는 평했다. 그래도 기술적인 면으로는 아리스가 위였다.

슬슬 기세를 자신 쪽으로 끌어오는데 미레아의 움직임이 또 변칙적으로 바뀌었다. 앞의 두 검술과는 명백하게 다른 움직임이었다. 아리스에겐 낯선 검술이었다. 이것이 원래 쓰던 검술이었는지 아리스의 검을 따라 했던 것보다 더 능수능란하게 움직였다. 아리스가 제법 잘 받아치자 미레아는 싱글거리면서 또 움직임을 바꿨다. 조금 전까지는 날카로운 공격 중심의 검술을 썼는데 이번에는 물이 흐르는 것처럼 몸을 유연하게 움직이는 검술이었다.

검술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저마다 추구하는 목적, 뜻이 있다. 오로지 살육을 위한 검, 누군가를 지키기 위한 검, 마음의 수행 도구로 사용하는 검, 정의를 관철하기 위한 검.

그 외에도 수많은 목적이 존재했고, 검술은 그 목적에 맞게 다듬어져 내려온다. 그러므로 검술을 관찰하다 보면 어떤 것을 추구하는지, 그러다 보면 어떤 움직임과 공격이 나오는 건지 대충이나마 그려진다.

하지만 미레아의 검에서는 그런 것을 전혀 읽을 수가 없었다. 검을 쓰는 방법의 변화가 심했다. 움직임에 패턴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없었다. 미레아의 패턴을 종잡을 수 없어서 아리스는 그때그때 대응하기 바빴다.

몇 번의 방어 끝에 아리스는 생각을 바꿨다. 이건 여러 패턴을 엄청나게 섞어 댄 것이다. 대체 몇 가지 검술을 익힌 것인지 셀 수 없었다. 아리스는 헛웃음을 들이키고 싶었지만, 미레아는 그럴 틈조차 주지 않았다.

결국은 주춤거리며 물러나다 바로 앞에 있다고 생각했던 미레아가 별안간 등 뒤에서 검을 찌르며 들어왔다. 미처 피하기도 전에 목에 서늘한 검날이 살짝 닿았다.

“어때. 콧대가 좀 꺾이셨나?”

등 뒤에서 들려오는 밝은 목소리에 아리스는 천천히 양손을 올렸다.

“빈말로도 패배를 인정 못 하겠다고 할 수 없겠는걸. 어쩐지 나 사기당한 것 같아.”

그 말에 아리스의 목에 드리웠던 검날이 거두어졌다. 미레아가 씨익 웃으며 검집에 검을 집어넣었다. 아리스도 검을 검집에 넣으며 억울하단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 그 검술은 뭐야? 나한테 일부러 그랬어?”

시오가 아리스의 어깨를 성의 없이 툭툭 두드리다 또 나쁜 버릇대로 남의 어깨에 팔꿈치를 괴고 말했다.

“뭐, 세상에 고수는 많은 법이지.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는 법이고. 그래도 너무 기죽지 마. 미레아를 상대로 그 정도면 선방한 거야. 미레아에게 검으로 이긴 사람은 거의 없어. 파울로나 가끔 상대되려나.”

미레아가 비치된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말했다.

“아니, 그래도 확실히 루아드 본고장 사람은 다르네. 언제 한번 황실 기사단 검술 좀 가르쳐 줘. 역시 보고 따라 한 거로는 움직임이 엉성해.”

“그걸 따라 했다고?”

“응.”

“어떻게?”

“전에 한번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거 참고했어.”

“한 번 본다고 따라 하는 게 돼?”

“그래서 움직임이 영 별로잖아. 보기만 한 거로 어떻게 다 배우냐?”

“설마 다른 검술도 그런 식으로 배웠어?”

“음…….”

미레아는 새 수건을 아리스에게 던져 주고 구비된 물을 벌컥벌컥 들이켠 다음 대답했다.

“당연히 다른 것들은 직접 배웠지. 마이련 검술은 얼마 전에 너 때문에 잠깐 들른 김에 벼락치기로 며칠 배웠고. 그래서 그 두 개는 네가 더 잘하잖아. 괜히 너 따라 한다고 까불다가 당할 뻔했네.”

아리스가 그 정도까지 밀어붙이지 않았으면 미레아는 계속 그를 따라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역시 숙련도가 달랐다. 아리스는 콧대가 꺾이기는 했지만 그나마 그 말에 위안이 되었다.

“우리 아빠가 전투부 부장이었다고 얘기했었지? 그래서 나는 걸음마를 떼기 전부터 검을 잡을 수 있었는데, 아, 물론 가검이었지만. 내가 검에 소질이 있다고 판단한 아빠가 나를 가르치다 어느 정도 실력이 되니까 더 가르칠 게 없다고 나를 다른 사람에게 떠넘겼어. 그게 누구였더라…… 너무 어릴 때라 기억이 잘 안 나네. 그때 전투부에 있던 사람 중 하나였는데. 그분은 세로킨 말고 다른 나라 검사였던지라 아빠한테 배웠던 검술이랑 전혀 다른 검술을 가르쳐 주셨어. 그러다 그분도 자신은 가르칠 만큼 가르쳤다고 또 다른 분께 떠넘겨졌고,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지. 보면 알겠지만 여기는 각국에서 모인 용병 집단이라 자연스럽게 다른 검술도 종류별로 배울 수 있었어. 내 스승님은 많았다고.”

미레아는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보통은 그렇지 않았다. 한 가지 검술만 익히는데도 한평생이 걸리는 경우가 많은데 미레아는 고작 22살이다. 10대에 이미 두 가지 검술을 익힌 아리스도 천재 소리를 들었지만 이건 급이 달랐다.

그냥 천재도 아니고 그야말로 불세출의 천재. 뛰어난 재능에 환경까지 잘 만나 괴물이 하나 나왔다. 거기에 본인도 검을 즐기고 배움을 기꺼이 여긴 것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

아리스는 몰랐지만 새로운 검법 기술만 보면 눈이 뒤집혀서 대련하자고 집적거리다 처참하게 찍어 누르고 자기가 이겼으니까 검술 가르쳐 달라고 협박하는 건 미레아의 나쁜 버릇이었다. 미레아에게 패배한 사람이 늘어날수록 미레아가 배운 검술 역시 늘어났다.

“그러니까 너도 나한테 알려 줘. 황실 기사단 검술, 멋있더라.”

미레아가 음흉하게 웃으며 아리스를 압박했다.

“미도르! 저 사람 뭐 하는 사람인데 제인스터를 상대로 이렇게 오래 버텼어?”

구경꾼들은 승부가 난 이후 저들끼리 왁자지껄 떠들더니 누군가가 시오에게 물었다.

“회장님 손님!”

“대단한데?”

알고 보니 그들은 미레아 제인스터가 이번엔 또 누구를 꺾어 버리는지 희생자의 얼굴을 구경하러 몰려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과 비슷한 경험을 공유한 아리스에게 동지 의식을 느끼며 애도 어린 시선을 보냈다. 사람들 이목이 쏠리든 말든 미레아는 아리스에게 언제 시간이 비는지 확약을 받으려 했다.

“미레아 제인스터!”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연병장 안에서 포효했다. 미레아는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껴 가장 덩치가 큰 시오의 뒤에 숨으며 새된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아, 왜 또?! 이번엔 왜?!”

저쪽에서 키가 작은 용이 진녹색 용주를 번쩍이며 미레아에게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게 라케드인 것을 알아본 사람들은 그가 이번엔 또 뭐에 기분이 안 좋은지 몰라도 일단 화를 피해 도망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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