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26화 (26/257)

26화.

“그러다 보니까 점심시간이라 네 말대로 점심을 사 먹으러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꽃집이 있어서 솜씨 좋은 정원사를 중개해 달라 부탁해서 고용했지. 잡초 같은 걸 뽑는 건 하겠지만 난 정원 가꾸는 건 하나도 모르니까 전문가를 모셔야지. 미레아, 세상은 돈이 전부는 아니지만 그래도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많아. 그러니까 3시간 만에 정원을 가꾸는 일 같은 것 말이야. 인부를 좀 많이 고용했더니 그게 되더라고. 정원이 작아서 다행이었지 뭐야.”

아리스는 떠벌 떠벌 말하면서 머리통 뒤를 양손으로 받쳤다.

“그리고 그 비용은 네 말대로 세피로스 앞에 달아 뒀지. 내 정신 건강 향상을 위해 지출했다고 말해. 잡초 뽑을 때 네가 봤어야 했는데, 정말 끔찍했다고.”

아리스는 조용히 경청하며 정원을 바라보는 미레아의 턱 아래에 주름이 천천히 잡히는 것을 보고 이쯤 떠들고 화제를 바꾸거나 자신이 자리를 피해야 하는 시점인가 생각했다. 하지만 꾹 다물려 있던 입꼬리는 금방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미레아는 눈을 느리게 깜박이다가 아리스와 시선을 맞췄다. 그러면서 갑자기 간격을 좁히며 훅 치고 들어오는 바람에 아리스가 움찔거렸다.

“고마워.”

미레아가 구김 없는 얼굴로 웃자 아리스는 오히려 당황했다. 솔직히 그녀가 감상에 젖거나 조금은 울지 않을까 싶었다. 실제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럴 것 같은 분위기였고 말이다.

하지만 미레아는 가슴이 뻥 뚫린 것 같았다. 속이 시원했다. 자신의 가슴을 옥죄이던, 정원에서 자라나 뻗어 나온 가시덩굴을 아리스가 잘라 낸 준 것이다. 그러니까 울지도 않았고, 감상에 젖어도 그것이 상실감과 슬픔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미레아는 록산의 하늘과 바다색이 함께 들어 있는 것 같아 시린 것 같으면서도 따듯한 푸른 눈동자를 똑바로 보고 자신의 진심을 담아 말했다.

“정말 고마워.”

아리스는 그 반응에 안도하며 어색하게 웃으면서 변명하듯 말했다.

“나야 잡초 뽑은 것 말고는 남의 돈으로 생색낸 게 전부인데. 그리고 풀 나무가 아직 땅에 자리 잡기 전이라 더 자연스러워지려면 시일이 걸릴 거야.”

“으응, 아니야. 너 아니었으면 이렇게 못 했을 거야. 고작 며칠 사이에 너 때문에 몇 번을 놀라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랑 만나서 다행이야.”

그 직후 미레아가 바로 몸을 돌렸기 때문에 아리스는 그것을 일부러 못 들은 척했다. 다시 정원을 한동안 보던 미레아가 손뼉을 짝 쳤다.

“아, 맞다.”

그리고는 마치 대단한 말이라도 하는 것 같은 얼굴로 아리스에게 말했다.

“나 다녀왔어.”

지나치게 뒤늦은 인사에 아리스는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이며 웃었다.

“어서 오세요.”

제3장 동맹

사격장에 총성이 연달아 울렸다. 시오는 귀마개를 벗으며 과녁을 보고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쩜 저렇게 절망적일 수가…….”

과녁의 정중앙을 전부 비껴가 엉뚱한 곳에만 신나게 총알이 박혀 있었다. 시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리볼버 약실의 탄창을 갈고 있는 아리스에게 물었다.

“사격 안 배웠어?”

“배웠거든.”

“그런데 왜 저 모양이야?”

“총만 다룰 줄 알면 상관없잖아.”

아리스는 아까와는 달리 흐트러진 자세로 방아쇠를 아무렇게나 당겼다. 정자세로 조준하고 쐈을 땐 과녁을 전부 빗겨 나갔던 총알이 5번 연속으로 과녁 정 중앙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박혔다. 총신에서 파란 스파크가 튀다가 사라졌다. 아리스는 보란 듯이 턱을 추켜올렸다.

“방아쇠만 당길 수 있으면 마력으로 총알의 궤도를 수정하면 되니까.”

“하하, 재수 없어.”

시오는 칭찬하는 것 같은 어투로 욕을 했다.

“편법이긴 한데 굳이 쓸 수 있는 걸 쓰면 안 되는 이유도 없고. 그러니 굳이 사격까지 수동으로 배워야 해?”

“아리스, 미레아나 파울로도 검사지만 사격은 평균 이상 수준까지 훈련했어. 다룰 수 있는 무기가 하나라도 더 있으면 좋잖아.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음…….”

아리스는 그 말을 건성으로 흘려들으려다 자신의 계획을 생각해 보고 마음을 바꿔서 재고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리스는 자신이 나서서 마검을 회수하기로 했다. 원정대의 구성원은 세피로스가 이미 생각해 놓은 바가 있었기 때문에 명단이 바로 나왔다.

세피로스는 아주 솔직하고 직관적인 스타일로 이 팀을 ‘클라인 원정대’라 명명하였다. 길게 설명할 것도 없이 루아드 제국의 클라인 지역으로 가는 원정대라는 소리다. 그 촌스러운 작명에 몇몇 사람은 무심코 항의할 뻔했지만, 어차피 극비라 남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할 일이 없는 바람에 자기들끼리만 부르는 명칭 따위는 뭐라 부르든 상관없었기 때문에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아리스가 가명의 성을 ‘클라인셔드’라고 지었을 때 미레아를 포함해 그걸 들은 사람들 모두 속으로 아리스의 정신머리를 걱정했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다.

마검 페니드란이 마수를 봉인해 암흑 지대로 만든 지역 이름이 바로 ‘클라인’이다. 거기에 지금은 사어(死語)가 된 로아메나 중부 고대어의 ‘-셔드’를 붙이면 이런 뜻이다.

클라인을 훔친 자.

은유적으로 그게 틀린 말은 아닌데 자기가 직접 지어 붙이기엔 좀 낯간지럽고 뻔뻔하지 않나 싶은 작명이었다. 아리스는 클라인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온갖 욕이란 욕은 다 먹다 보니까 기왕 그렇게 된 거 차라리 그곳을 자기 땅으로 해 먹겠단 의미로 그리 지어 버린 것이다.

출발은 보름 후. 자세한 건 조만간 회의를 열 것이니 앞으로 쓸 검이나 새로 받아 오라는 세피로스의 말에 지급품을 받으러 시오가 아리스를 기술부 건물로 안내했다. 라일라가 아리스를 보자마자 반색하며 몹시도 개인적인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수작을 부리려 하는 것을 시오가 막아 줬다.

아리스는 아무 대장간에 들어가서 싸구려 검이나 사 와도 상관없었지만, 기왕 세피로스가 호의를 보이는 거 좋은 게 좋은 거다 싶어서 라일라에게 자신이 원하는 검을 맞춰 달라 부탁했다. 주문 제작이다 보니 며칠 걸릴 거라 예상했는데 뜻밖에도 아리스의 주문을 들은 라일라는 마침 그 조건에 맞는 괜찮은 검이 있다면서 바로 가져올 테니 기다려 달라 그랬다.

그래서 남은 시간도 때울 겸 전투부에 구비 된 총기들을 시험 사격해 볼 수 있는 사격장에서 총이나 한 번씩 만져 보고 시오와 노닥거리고 있던 차였다.

“그리고 사격이란 게, 오로지 내 오감과 환경의 미세한 변화를 계산하여 탄환의 궤도를 예측하고 내가 원하는 표적에 적중시켰을 때 쏘는 맛이란 게 있거든.”

자신의 주력 무기에 대한 화제가 나오면 흥분해서 물어보지도 않고 궁금하지도 않은 내용까지 줄줄 늘어트리는 것은 만국 공통이었다. 아리스 역시 자신의 마검 페니드란에 대해 3일 밤낮을 쉬지 않고 떠들 수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시오의 말에 그 화제를 꺼낼 틈이 없었다.

아리스가 시오의 저격 소총 찬가를 귓등으로 들으며 방아쇠울에 손가락을 끼우고 권총을 뱅글뱅글 돌리고 있는데 저 멀리서 라일라가 검 한 자루를 들고 나왔다.

“검기를 쓸 때 검날의 전체적인 균형을 맞추는 것 때문에 시간이 좀 걸렸는데 이건 어때? 네 말대로 마력을 흡수해서 변환시키는 능력이 괜찮아. 시작품으로 만들어 봤는데 용들 정도 되는 마력 운용 능력이 아니면 쓸 일이 없어서 주인이 없었어.”

그 검은 디자인에 큰 정성을 기울이지 않았는지 오로지 검의 기능에만 충실하게 생긴 단순한 외형이었다. 검의 특징을 설명하자면 특징이 없는 게 특징이었다. 하지만 검신도 딱 페니드란과 비슷한 길이라 아리스가 쓰기에 좋았다. 아리스는 검 손잡이를 잡고 빠른 속도로 검을 8자 궤도로 휙휙 돌려 보았다.

“중심이 조금 뒤쪽으로 쏠린 것 같긴 한데 거슬릴 정도는 아니고 쓰다 보면 익숙해지겠지.”

“폼멜 쪽을 손봐 줄까?”

“괜찮아. 사소한 것에 신경 쓰는 것보다 내가 적응하는 게 더 빠를 것 같거든.”

아리스는 총을 쏘던 과녁을 향해 가볍게 검을 휘둘러 보았다. 피잉 하는 파공음과 동시에 과녁이 세로로 두 동강이 났다. 마법이 지나간 경로를 따라 푸른색 스파크가 반짝거리다 사라졌다.

“음, 괜찮네.”

고개를 주억거린 아리스는 검기를 흘려보내서 검날에 푸른빛이 도는 것까지 확인하고는 검집에 집어넣었다. 아직 손에 익지는 않았어도 무게감 자체는 마음에 들었다.

검기를 쓸 수 있는 사람이라 해도 무기가 그 사람의 기운과 맞아야 검기를 자유롭게 운용할 수 있다. 그래서 새 검이 사용자에게 감응하기도 전에 바로 검기를 쓸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 아리스가 보란 듯이 바로 검기를 쓰자 라일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검을 바라보았다.

“아직 검이랑 제대로 공명도 안 했는데 검기가 그 정도까지 나와?”

“장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는 법이야.”

시오와 라일라가 동시에 한쪽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렸다.

“역시 재수 없어.”

아리스가 거만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이다 누군가 달려오는 경쾌한 발소리를 듣고 돌아봤다. 미레아가 잔뜩 상기된 얼굴로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이 인사도 하기 전에 빠르게 말을 꺼냈다.

“나랑 검술 대련해!”

“갑자기?”

“네가 새 검을 맞췄다는 소식을 듣고 왔지. 검에 적응할 겸 나랑 대련하자.”

“하여간 그 핑계 대면서 대련하자고 올 줄 알았다. 소문은 대체 어디서 들었어? 엄청 빠르네.”

라일라가 질렸단 얼굴로 고개를 저었지만 시오는 마침 잘됐다는 태도였다.

“미레아, 네가 이 녀석 콧대 좀 눌러 줘.”

“오, 실력에 자신이 있으신가 보군. 그렇다면 더더욱 검을 맞대 봐야지.”

시오의 부추김에 미레아가 두 자루의 검을 양손에 하나씩 빼 들어 붕붕 휘둘렀다. 그중 하나는 일전에 아리스가 빌려 썼던 검이었다. 미레아의 쌍검은 보통의 양날 검과는 조금 다른 양식인 점이 있었는데 코등이 쪽 칼날의 너비가 비슷한 형태의 다른 검들에 비하면 훨씬 두꺼웠다.

하지만 코등이 바로 앞에서는 양쪽의 폭이 오목하게 갑자기 좁아져 호리병 같은 모양새였다. 그리고 검 끝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삼각형 모양의 검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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