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눈꺼풀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에 잠에서 깼다. 미레아는 잠결에 이불을 끌어안고 몸을 뒤척이다 눈에 익은 커튼을 보고 부스스 일어나 앉았다. 방을 둘러보니 익숙한 곳이다. 예전과 똑같은 아침 풍경이었다.
“어…….”
미레아는 눈을 비비고 그것을 한참 동안 멍하니 보다가 손목에 감기는 낯선 감촉에 왼손을 더듬었다. 꽃줄기를 엮어 만든 팔찌는 너덜거리기는 했어도 용케 아침까지 손목에 붙어 있었다. 미레아는 그것의 연결 부위를 똑 끊어서 눈높이에 맞춰 들어 올렸다가 침대 옆 협탁에 놓인 자명종을 보고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시곗바늘은 오전 9시까지 5분이 남았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냐, 아냐. 이거 오랜만에 와서 시계 안 맞을 거야.
미레아는 빠르게 고개를 저었지만 아무래도 해 높이가 심상치 않았다. 힉 하고 숨을 들이켠 미레아가 우당탕거리면서 방문을 열고 뛰어나왔다.
“늦었다!”
질 좋은 위스키였던지라 숙취가 없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욕실로 뛰어 들어가 칫솔을 물고 다시 급하게 나오는데 시오가 하품하며 한때 세피로스가 썼던 방에서 나왔다.
“선배, 여기서 뭐 해?!”
“나 어제 여기서 잤냐.”
“아무래도 그런 것 같은데 우리 출근 늦었어!”
밑에 층에서 소란이 일자 아리스 역시 늦잠을 자다 깨서 털레털레 계단을 내려왔다.
“어, 일어났어? 저쪽 방에 라일라도 있는데 깨워야 하면 깨워.”
“걔도 있어?”
미레아는 라일라가 잠들어 있는 방문을 쾅쾅쾅 두드리고 답이 없자 문을 열고 들어갔다.
“라일라, 일어나!”
“여기 어디야?”
“우리 집!”
미레아가 흔드는데도 라일라는 눈도 안 떴다.
“아…….”
“‘아’가 아니고 일어나라고! 너 출근 안 해?! 근무 일정 어떻게 되는데?”
“오늘…… 오늘 일해야지.”
“그럼 일어나. 9시 2분 전이야. 우리 늦었어!”
라일라는 돌아누우며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이미 늦은 거 조금은 더 늦어도 괜찮지 않을까.”
“있잖아, 파울로가 늦으면 연병장 돌린다고 전해 주래.”
밖에서 들려온 아리스의 목소리에 미레아가 허둥지둥 라일라를 일으켜 세웠다.
“그 망할 양반이! 그런 말이 있었는데 넌 왜 우리 안 깨웠어?!”
“나도 자고 있었지?”
미레아는 양치한 것만 입가심하고 나왔다. 어제 옷도 갈아입지 않고 그대로 잠든 탓에 전날 입은 옷 위에 활동복만 걸치고 분주하게 뛰어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아리스는 태평하게 손을 흔들었다.
“직장인들 힘내.”
미레아는 그러고 보니 아리스가 집에서 달리 할 일도 없이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침은 어제 먹고 남은 빵 있을 테니까 그거 먹고 점심은 나가서 사 먹어. 비용은 세피로스 앞으로 달아 두고. 도망치는 거 빼고 하고 싶은 거 있으면 그거 해. 그 돈도 세피로스 앞으로 달아 두고!”
그리고 현관을 나서기 전에 뜸을 들이다 말했다.
“그러니까 다, 다녀올게!”
“응.”
아리스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셋은 이미 저 멀리서 뛰고 있었다.
* * *
미레아는 연병장 가장자리에 대자로 누워 정신을 반쯤 놓았다. 그 옆에는 시오도 같은 자세로 죽어 있었다. 봄바람이 따듯했지만 힘들어 죽기 일보 직전이라 그런 것 따위 느낄 여력이 없었다.
“파울로가 길 가다 재수 없게 자전거에 치였으면 좋겠다…….”
“수프에 빠져 죽은 파리 있는 거 모르고 먹었으면.”
파울로에게 악담을 퍼붓던 그들을 멀리서 라케드가 지나가다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세피로스의 부관인 용이었는데 밀짚 색 머리카락을 느슨하게 묶었기 때문에 고개를 돌릴 때마다 머리카락 끝이 달랑거렸다.
“저거 미레아 제인스터 아닌가?”
“맞는 것 같습니다.”
옆에서 동행한 쿤둘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빈’ 특유의 커다란 한 쌍의 뿔과 적갈색과 흰색이 섞인 덥수룩한 수염이 멋진 사람이었다. 그는 전투부 소속의 마법사였는데 주로 현장직보다는 사무직이나 연구직 일을 도맡아 하는 까닭에 오늘도 서류처리 할 것들을 한 아름 들고 돌아다니다 라케드를 만나 동행하던 참이었다.
굳이 쿤둘렌이 확인하지 않아도 저렇게 선명하게 보이는 빨간 머리는 미레아밖에 없었다. 라케드가 빠른 걸음으로 땅에 나뒹굴고 있는 미레아에게 다가갔다.
“미레아 제인스터, 너 왜 여기 있나?”
라케드를 보자마자 미레아가 벌떡 일어나 정자세로 기립했다. 미레아가 이 협회에서 유일하게 무서워하는 사람이 바로 꼬장꼬장하기 그지없는 라케드였다.
용들은 어지간하면 20대나 30대 외형에서 성장이 멈추고 노년기에 급격한 노화가 진행되는 성장 주기를 갖고 있는데 라케드는 완연한 성체임에도 불구하고 유독 더 어려 보였다. 하지만 그와 어울리지 않게 깐깐하고 다소 신경질적이기까지 한 그의 성격 때문에 세피로스조차 자신의 부관을 조금 거북해했다.
그렇기에 미레아가 세피로스의 뒷배만 믿고 뻗대 봤자 그게 쥐뿔도 안 통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래서 평소엔 저 멀리서 라케드의 이마에 붙은 진녹색 용주가 반짝이는 것만 보여도 바로 자리를 피했는데 오늘은 운도 나쁘게 걸렸다.
“라케드 님, 안녕하세요!”
“너 루데키아스는 어쩌고?”
미레아는 자기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는지 속으로 열심히 생각하다가 눈동자를 굴리면서 대답했다.
“집에 있는데요.”
“혼자?”
“네.”
그 대답에 용이 포효했다.
“걜 혼자 두면 어떡해!”
“죄송합니다!”
상황 파악도 하기 전에 미레아는 일단 사과부터 하고 봤다. 구구절절 변명을 덧붙였다가 라케드의 화만 돋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기껏 그놈 옆에 널 붙여 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너 출근해 있는 동안 집 지키고 있으라고 그런 건 줄 알아?! 야, 번견! 그건 네 일이야! 그놈 혼자 있다가 무슨 일 나면 네 탓일 것 같아? 아니! 차라리 네 탓이면 너 하나 조지고 말지! 결국엔 그게 총 책임자인 세피로스 회장님 탓이거든! 그리고 회장님 일은 싫어도 나한테 내려오거든? 그러면 누가 고생한다? 바로 나! 바로 이 몸!”
미레아는 식은땀을 흘리며 묵묵히 라케드의 말을 듣다가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주변을 곁눈질했다. 손가락 까딱할 힘도 없다고 누워 있던 시오는 이미 도망가고 없었다. 한 발 뒤에 서서 수염이나 쓰다듬고 있는 쿤둘렌은 분위기상 라케드의 말에 동조했으면 했지 미레아의 편은 아니었다.
라케드는 지금 이를 갈고 있지만 진짜 갈아 버리고 싶은 건 미레아라는 뜻이 역력하게 올라온 얼굴로 험상궂게 말했다.
“미레아 제인스터, 넌 생각이란 걸 하긴 하냐? 아주 정신머리 나갔지? 기숙 아파트에서 쫓겨날 때 정신머리도 거기 두고 나왔지?”
“시정하겠습니다!”
“알아들었으면 네가 뭘 해야 하는지 이 이상 설명하게 하지 말고 썩 꺼져!”
“네!”
그렇지 않아도 도망가고 싶었는데 알아서 꺼져 달라니 미레아는 감사하며 꺼져 드렸다. 미레아는 전속력으로 뛰어가다 라케드가 보이지 않자 속도를 늦췄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뱅뱅 꼬며 앓는 소리를 내었다.
아리스를…… 혼자 두면 안 되는 거였구나.
라케드가 한 말을 곱씹으며 미레아는 벌벌 떨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당연한 소리인데 세피로스도, 파울로도 그에 대한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아서 저도 모르게 혼자 두고 출근해 버렸다. 그렇다면 자신은 왜 파울로에게 지각한 것을 걸려 연병장을 뺑이 친 것인지 억울해 죽을 것 같았다.
그런 걸로 보아하니 파울로도 그에 대한 다른 말을 라케드나 세피로스에게 전해 듣지 못한 듯싶었다. 그런데 자기가 어떻게 안단 말인가. 미레아는 세피로스에게 아리스가 자신의 처우를 스스로 결정하기 전까지 집에 데리고 있으란 명령만 들었을 뿐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서러웠다.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으면서…….
그보다 꺼지라 해서 꺼지긴 했는데, 일단 집에 가야 하나? 혼자 둔 지 6시간밖에 안 지났는데 어린애도 아니고 설마 그사이 무슨 일이 있겠어?
미레아는 걸음을 완전히 멈추고 손에 얼굴을 묻었다.
……무슨 일 있으면 어떡하지. 하필이면 오늘 왜 바이크를 두고 왔을까. 그냥 가속 술식 달린 워커 신고 집까지 뛸까. 협회 물건 사적으로 반출해서 막 신고 다닌다고 혼날 것 같긴 한데 지금보다 더 혼나겠어?
미레아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움직이는 트램을 타서 자신의 이마를 연달아 때렸다. 겨우 트램에서 내리자마자 또 전속력으로 집으로 달렸다. 미레아는 대문을 박차고 들어가며 외쳤다.
“으아아, 으아! 아리스 있냐! 나 없는 동안 별일 없었지?!”
그러다 미레아는 정원을 보고 입을 쩍 벌렸다. 자기가 여기 왜 왔는지도 까먹을 정도로 정신이 나갔다. 미레아는 눈을 한번 비비고 다시 봤지만 처음 봤던 풍경이 변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짙은 꽃향기에 취할 것 같은 아몬드 나무 아래에 장미 넝쿨이 담장을 따라 뻗어 있고 바다가 보이는 쪽 벽에는 미레아가 가장 좋아하던 수국 나무에 꽃봉오리가 올라와 있었다.
아직 열매를 맺지는 않았지만 푸른 잎을 자랑하는 레몬 나무와 그 앞에서 바람에 살랑거리고 있는 어린 올리브 나무들. 그 틈틈이 예쁜 봄꽃들이 저마다 알록달록한 자태를 뽐내며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정글이라 말해도 손색이 없을 상태였던 정원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변화였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미레아는 정원에 시선을 빼앗겨 현관 옆에 흔들의자를 가져다 놓고 책을 읽고 있던 아리스를 뒤늦게 발견했다.
“이게, 이게 뭐야?”
“거기 잔디가 아직 자리 잡기 전이니까 밟지 말고 이쪽으로 와.”
“정원…… 정원이 어떻게 된 거야?”
“이거?”
아리스가 씨익 웃었다.
“깜짝 놀랐지?”
“당연히 놀라지! 대체 어떻게 한 거야?”
“음, 그래. 들어 봐 봐. 오늘 아침에 너희가 나가고 난 다음에 할 일이 없어서 집 안을 좀 돌아다니다 정원을 봤는데 역시 이건 안 되겠더라고. 정원 상태가 너무 끔찍해서 이대로 두면 영영 꿈자리가 사나울 것 같더라. 물론 나는 며칠이면 떠날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사람이 정이란 게 있잖아. 남의 일이라 해도 이런 걸 보면 신경 쓰일 수밖에 없지 않겠어? 내가 듣던 것만큼 그렇게 피도 눈물도 없이 무서운 사람이 아니에요. 그래서 일단 배가 고파서 샌드위치를 만든 다음 그거 먹으면서 심심풀이로 잡초를 뽑았지. 그건 나 혼자 했어. 잘했지? 사실 뭐가 뭔지 알 수 없어서 좀 중요해 보이는 것과 나무 말고 한해살이풀이다 싶은 건 전부 마법으로 날려 버렸더니 생각보다 금방 되더라고. 내가 그런 건 또 잘하거든. 날려 버리는 거. 잔해는 그냥 저 멀리 던져 버렸어. 그것도 마법으로 했으니까 찾아도 안 보일 거야.”
아리스는 자랑스럽게 코 밑을 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