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나랑 세피로스는 그냥 식객이었고…… 아, 세피로스가 다짜고짜 쳐들어온 것까지 이야기하면 길어지는데 그건 생략하자. 케이드와 레인은 미레아의 부모님이야. 그리고 휴레오는 미레아의 남동생이고.”
“부모님이 돌아가셨다고 그러던데, 그렇다면 동생은…….”
조금 주저하다 꺼낸 아리스의 말이 무엇을 묻는 건지 너무나도 명확했다. 파울로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 셋은 5년 전, 같은 날 세상을 떠났어. 정확하게 말하자면 케이드 씨는 시신을 못 찾았지만…… 정황상 아무래도…….”
“5년 전…… 혹시 3011년 6월 17일…….”
아리스는 칼날을 씹는 것 같은 심정으로 절대 잊을 수 없는 날짜를 더듬었다. 하지만 파울로는 감정을 내비치지 않고 긍정했다.
“그래. 그날.”
아리스는 한동안 침묵했다. 미레아가 아리스를 처음 만난 날 밤에 자신은 아리스에게 호기심을 보일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었다. 그 권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뒤늦게 깨달음이 밀려왔다.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만 놓고 본다면 엄연히 아리스가 가해자고, 미레아는 피해자였다. 피해자가 가해자에 대해 알고 싶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가해자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갈 곳 없는 분노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피해자들이 원하는 일 중 하나였다.
이유를 알 수 없다면 더욱 억울해지는 것이 사람 심리였다. 미레아 역시 그랬다. 미레아는 아리스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며 호기심을 품었다. 그리고 반응으로 보건대, 아리스가 그날 밤 선택했던 일이 미레아의 마음에 어떤 변화를 일으켰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용서하는 방향으로 선택했던 것이었다.
파울로는 아리스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무슨 생각 해?”
“5년 전부터 계속하던 생각이요.”
“그게 무슨 생각인데?”
“생각해 봤자 부질없기 짝이 없는 그런 생각.”
파울로는 목을 가다듬더니 음유시인처럼 말했다.
“옛날, 옛날. 사실은 그리 머지않은 조금 옛날에. 루아드 제국의 대공, ‘마라피네스 리겐우드 비르체 파니드라우’가 황제에게 살해당하자 그 아들인 ‘루데키아스 레민나 류 파니드라우’가 데르카이드의 힘으로 로아메나 대륙에 마수를 불러들여 황제에게 복수하고자 했다. 하지만 황제는 살아남았고, 루데키아스는 그대로 잠적. 그가 불러일으킨 마수는 로아메나 대륙 곳곳을 습격하여 황폐시키고 대다수는 루아드 제국의 서북부 지방에 있는 마검을 따라 밀집하여 암흑 지대를 만들어 다른 생명체의 접근을 차단하였다. 그 일을 계기로 사람들은 루데키아스를 검은 날개의 데르카이드 흑익이라 부르던 것에 ‘최악’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두려워하고 증오했다. 조금 옛날이야기 끝.”
멋들어지게 이야기를 맺은 파울로를 보며 아리스는 영문을 알 수 없어 두 눈을 깜박였다. 파울로는 그 반응을 보고 피식 웃었다.
“뭐, 세상에 알려진 이야기는 대충 이런 사정인데 정작, 이 이야기 중에 당사자 입에서 나온 설명은 없지.”
그리고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내가 대단한 성자라 그 어떠한 잘못도 넓은 아량으로 용서하는 것이 아니야. 메르티어스 황제가 너를 도발했고, 너는 그 함정에 빠진 것이란 건 세피로스의 측근이라면 다 알고 있어. 그러니 너를 탓하고 싶진 않아. 애초에 누구를 탓한다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잖아.”
그는 담뱃재를 털어 내며 말을 이었다.
“오히려 세피로스가 메르티어스를 막지 못했다고 자책했지.”
“세피로스가요?”
아리스가 뜻밖이라는 듯 고개를 들었다.
“그에게는 세계의 균형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거든. 메르티어스가 무슨 일을 벌일 것이란 낌새는 이전부터 있었어. 그래서 예의 주시하고 있었는데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사고를 일으켰지. 하지만 엄연히 그것도 라슈발렌의 실책이다.”
파울로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5년 전에, 나는 일 때문에 로아메나 대륙을 몇 년 떠나 있었거든. 그래서 마수가 록산에도 나타났다는 소식을 내가 알았을 땐 어떻게 손도 써 볼 틈도 없이 이미 다 끝난 상태였지. 뒤늦게 달려와 보니 미레아 혼자 남고 다른 가족들은 타계했지, 미레아는 마음의 상처가 큰지 이 집에 돌아가기 싫다고 하지, 세피로스는 제대로 말도 안 해 주지. 나도 마음을 추스르자마자 아내와 함께 다른 지부로 떠났어. 그러다 보니 어영부영 5년이나 이 집을 방치했는데…….”
파울로는 아리스의 표정을 확인하고는 한숨 쉬었다.
“미레아에겐 그런 집이었는데 하필이면 너를 데리고 5년 만에 돌아온 걸 보면 모르겠어? 저 앤 정말로 네게 악감정이라고는 요만큼도 없어. 그리고 나도 그런 생각이 있었다면 널 죽였으면 죽였지 여기서 같이 술을 마시지도 않았을 테고.”
이 이야기 자체가 미레아에게는 염치없어서 물을 수 없을 질문이었다. 하지만 당사자 중 하나인 파울로는 이야기를 쉽게 꺼냈다.
“그 애가 판단했을 때 괜찮다면 정말 괜찮은 거야.”
거기까지 말한 파울로는 조금 자조 섞인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나는 오랜만에 이 집에 온 데다 술 마셔서 그런가. 죽은 사람들이 좀 보고 싶네.”
그 말을 들으며 아리스는 들고 있던 유리잔의 물을 전부 마셨다. 담배를 다 태운 파울로가 꽁초를 비벼 불씨를 끄고는 끙차 소리를 내면서 일어났다.
“근데 너는 정말 취한 거 맞냐?”
“맞아요.”
“역시 안 취했네.”
파울로는 아리스의 등을 철썩 때렸다.
“늦었는데 들어가서 자라.”
아리스는 한 손을 뒤로 돌려 등을 쓰다듬으면서 파울로를 배웅했다.
“잠자리 바뀌었다고 괜히 잠 설치지 말고. 보면 알겠지만 3층 다락방이 제일 명당자리야. 악몽을 꾸진 않을 거야.”
파울로는 반절 정도 남은 폴 포르디 술병을 흔들며 길을 따라 내려갔다. 아리스는 계단을 소리 없이 오르며 미레아의 방문 쪽으로 시선을 한번 주었다가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침대 위에 엎어지자 악몽을 꾸지 않을 거란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정말 악몽을 꾸지 않을 수 있을까 의문이었다. 술기운이 올라와서 졸린 것이 다행이었다.
그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로 파울로의 말이 맞았는지 눈이 저절로 감기면서 의식이 저 아래로 침잠하였다.
* * *
미레아는 꿈을 꾸었다.
진한 향기를 풍기는 아몬드 꽃이 바로 보이는 창문. 에메랄드 색으로 빛나는 바다. 파도에 밀려온 하얀 물거품 위를 뛰어다니던 나날들.
발바닥에 닿는 뜨거운 모래의 촉감. 한여름 풀벌레 울음소리. 선선한 가을바람에 돛을 올리고 낚싯대를 던져 놓은 요트 위에서 읽던 책. 갓 구운 스콘과 따듯한 코코아를 마시다 깜박 잠이 들면 어느새 창밖에서 하나둘 떨어지던 눈송이.
누군가 낮게 웃는 웃음소리.
기억의 파편들이 두서없이 우수수 쏟아졌다. 그 덕분에 꿈이란 것을 인지한 미레아가 느리게 눈을 뜨니 그 앞에 문 하나가 나타났다. 알록달록한 타일 장식이 있는 나무 문. 문에는 조금 녹이 슨 낡고 커다란 자물쇠가 굳게 걸려 있었다. 자신의 집 대문이었다.
미레아는 주변을 둘러봤다. 문은 있지만, 벽도 천장도 없이 미레아만 존재하는 온통 하얀 공간이었다. 하지만 하늘은 있었다. 하늘에선 눈이 내리고 있었다. 미레아가 얼굴을 들어 텅 빈 하늘을 올려보자 코끝에 눈송이가 내려앉았다가 녹아 흘렀다.
차갑다.
눈송이는 연달아 눈꺼풀과 속눈썹에도 쌓이더니 천천히 녹았다. 마치 눈물처럼 얼굴을 따라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미레아가 그것을 훔치기 전에 등 뒤에서 누군가 커다란 손을 뻗어 그녀의 눈 위를 덮었다.
“나 대신 다른 사람들을 선택했어야지.”
물기 어린 목소리에 미레아의 눈가에서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지금까지 수천, 수백 번을 속에서 곱씹었던 대로 대답했다.
“난 후회 안 해.”
“……그래.”
등 뒤에서 미레아의 눈을 가리고 있던 소년은 손을 거두면서 미레아의 눈가를 따라 흐른 물방울을 훔쳤다.
“그렇다면 좀 더 일찍 돌아오지 그랬어.”
“……사실은 거짓말이야. 후회 중이야.”
“속죄의 의미로 이 집에 오지 않았던 거야?”
“그런 거창한 의미가 아니야.”
“그렇다면?”
“혼자는 무서웠는걸. 아무도 없는 집은…… 보고 싶지 않았어.”
“그렇다 해도 난 돌아갈 수 없어.”
“이곳 집은 너무 넓어. 너무 넓어서 나 혼자 남겨졌다는 느낌이라서 무서워. 휴레오, 나를 혼자 두지 마.”
미레아의 등 뒤에서 휴레오가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누나, 이건 꿈이야. 지금은 곁에 있어 줄 수 있지만 깨어나면…….”
“알아. 그런데 왜 내 꿈에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거야?”
미레아는 뒤를 돌아 동생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휴레오가 그녀의 양어깨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움직일 수 없었다.
“네 얼굴을 보고 싶어.”
“나는 항상 누나 기억 속의 그 얼굴일 거야.”
“그런 건 의미 없어. 내 기억이나 사진 속의 너 말고 진짜 너를 보고 싶어.”
미레아가 고개를 젓자 입김이 흩어졌다. 휴레오는 미레아의 어깨를 문 쪽으로 부드럽게 밀었다.
“밖은 추워. 어서 집에 들어가 봐.”
“어차피 안에는 아무도 없잖아! 너랑 여기 있을 거야! 추워 봤자 꿈인데 뭐 어때.”
그러자 휴레오가 쿡쿡거리며 웃었다.
“그렇지 않아.”
휴레오는 손을 들어 미레아의 얼굴 옆으로 뻗어 문을 가리켰다.
“벌써 잊었어? 누나가 그를 선택했잖아.”
“그?”
미레아의 손에는 열쇠가 들려 있었다.
“자,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야.”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휴레오가 열쇠를 들고 있는 손을 맞잡았다. 미레아는 드디어 휴레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밤갈색 고수머리에 자수정처럼 빛나는 맑은 눈동자 웃는 얼굴을 따라 반달 모양을 그렸다. 그의 말대로 미레아가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있는 그 얼굴이었다.
“이렇게 깨고 싶지 않아.”
휴레오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누나. 누나 입으로도 말했잖아. 괜찮을 거라고. 그러니…….”
미레아는 휴레오가 이끄는 대로 자물쇠에 열쇠를 끼워 맞췄다. 녹슨 자물쇠는 부드럽게 열리더니 가장자리부터 부스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이내 검은 깃털들로 변했고 대문이 열리자 안에서 밀려오는 따듯한 바람에 저 멀리 날아갔다.
“내가 누나를 도와주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야.”
문 안을 바라본 미레아는 밝은 빛에 눈을 감았다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