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23화 (23/257)

23화.

“징그러워. 꺼져. 하지만 앞으로도 존경심을 잃지 말도록.”

“여부가 있겠습니까.”

라일라의 힘찬 대답에 파울로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스는 가자미눈으로 술병을 흘겨봤다.

‘폴 포르디 30년’.

그 맛은 일품이지만 양조장과 양조 기술의 핵심 비법이 몇 년 전 마수의 습격으로 모두 소실된 덕분에 현재는 전설의 위스키로 남았으며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술이었다.

저 독한 위스키 한 병을 오늘 밤 다 마시겠다는 소리는 아니겠지. 그러다 이내 맥주를 먼저 마시고 입가심으로 위스키를 마시겠단 사람들의 말에 아리스는 이 사람들 정말 진심이구나 싶었다. 시체 치우는 일은 많이 해 봐서 익숙하니 아리스에게 큰 문제는 없었다.

흘러넘치도록 맥주를 꽉꽉 눌러 채운 술잔 5개가 짠 하는 소리를 내며 가볍게 맞부딪혔다. 미레아는 언제 툴툴거렸냐는 듯 맥주를 한 번에 꿀꺽꿀꺽 마시더니 ‘크하, 좋다!’ 하고 숨을 내뱉었다. 닭튀김 한 조각을 입안에 넣고 우물거리는 얼굴엔 행복감이 충만했다.

위장이 비어 있을 때 폴 포르디부터 마시면 순식간에 마셔 버릴 거라 예상한 파울로는 다른 음식들을 먹어 어느 정도 위장이 차기 전까진 폴 포르디의 술병을 따지 않겠다 경고했다. 때문에 나머지 셋은 전투적으로 음식물을 해치웠다.

파울로는 어느 한 사람도 소외되지 않게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재주가 좋았다. 덕분에 떠들썩하게 얘기를 나누다 보니 아리스도 조금은 즐거워져서 다른 사람들과 격식 없이 편하게 말을 텄다. 게다가 폴 포르디는 정말로 맛이 좋았기 때문에 넷은 홀짝홀짝 마시면서 연달아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한 잔을 다 비운 미레아는 상기된 표정으로 배시시 웃었다.

“왜 사람들이 폴 포르디, 폴 포르디 했는지 알 것 같아. 듣던 것보다 더 죽인다. 기분도 적당히 알딸딸해서 좋고. 역시 살아 있기 잘했어.”

가볍게 내뱉은 그 말이 아리스는 생경하게 들렸다. 그는 살아 있어서 다행이었던 적이 거의 없었다. 어제가 생일이었다고는 하지만 어릴 때나 챙겼지 그동안 경황이 없어서 챙기지 않은 지도 오래된지라 축하를 받은 기억도 까마득했다.

사실 이런 상황도 다른 사람들이 진심으로 축하하는 중이라고 생각하기보단 반쯤은 인사치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직 적당할 만큼의 신뢰도가 쌓이지도 않았고 만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사이에 생일 축하는 무슨…….

술은 확실히 맛있었지만, 아리스는 술을 맛으로는 마셔도 취하는 것까지 즐기는 부류는 아니었다. 약간 어지럽긴 해도 그게 기분이 좋다는 것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위스키를 목으로 넘기며 연신 맛있다는 감탄사를 내뱉던 셋은 어느 순간 거의 동시에 식탁 위로 엎어졌다. 아리스가 당황해서 손가락 끝으로 미레아를 콕콕 찌르는데 파울로는 음흉하게 웃었다.

“하하하, 내 계획대로. 맥주를 배 터지게 먹여 놨더니 위스키 한 잔이면 끝나는구나. 애송이들.”

파울로가 턱을 쓰다듬었다.

“덕분에 술도 아직 많이 남았고.”

파울로는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술병을 다시 밀봉하다 홀로 꼿꼿하게 앉아 있는 아리스를 훑어보았다.

“너도 엄청나게 마시지 않았어? 왜 이렇게 멀쩡해?”

“멀쩡한 척하는 거지 안 멀쩡해요.”

“취한 사람은 자기가 취했다고 인정 안 하는데 너는 인정하는 걸 보니 안 취했군.”

그렇게 말하는 파울로 역시 만만치 않게 마셨으면서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파울로가 시오와 라일라의 어깨를 번갈아 가며 툭툭 때렸다. 하지만 둘은 꿈쩍하지 않았다.

“죽었군.”

아리스는 이들을 어떻게 하냐는 의미로 파울로를 보자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여기다 버리고 가야지. 내일 아침에 알아서들 일어나라 그래. 늦으면 연병장 돌릴 거니까 네가 할 수 있으면 말 좀 전해 줘.”

“자기가 먹여 놓고 치사하게 혼자만 집에 가고.”

“나도 여기서 하룻밤 신세를 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집에서 마누라가 기다리고 있단 말이야. 그나저나 안 취했으면 좀 도와줄래?”

파울로는 시오를 일으키더니 아리스에게 던져 줬다. 자신은 라일라를 들쳐메고 2층으로 향했다. 파울로는 아무 방문을 열어 라일라를 침대 위에 대충 던져 놓았고 아리스가 부축하고 있던 시오 역시 비슷한 절차를 밟았다.

둘은 다시 1층으로 내려왔다. 홀로 기절해 있는 미레아를 파울로가 번쩍 안아 그녀의 침실로 데려다주는 사이 아리스는 싱크대에 빈 술잔과 그릇들을 던져 놓고 남은 음식물을 한데 모아 놓았다.

파울로는 누가 알려 주지 않아도 미레아의 방 위치를 기억하고 있었다. 마지막 기억과 거의 비슷한 가구 배치에 파울로는 피식 웃고는 미레아를 침대에 살살 내려 주고 이불을 목 위까지 잘 덮어 주었다.

시오와 라일라를 대할 때와 비교하면 편애가 역력했다. 그리고 조용히 돌아 나가려는데 미레아가 그의 셔츠 자락을 붙드는 바람에 멈춰 섰다.

“파울로.”

“왜.”

제법 또렷한 목소리였지만 파울로는 미레아가 완전히 취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미레아는 잠꼬대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자각이 있긴 한 건지 아리송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파울로, 나 이제 정말, 정말 괜찮아.”

원래 파울로와 미레아는 서로 어릴 때부터 반말하며 지내던 사이였지만 미레아가 파울로의 밑으로 들어오면서 위계질서 때문에 그에게 존댓말을 하는 습관을 들였다. 그러다 격식 없는 자리이거나 술이 들어갈 때면 저절로 어릴 때 습관대로 편한 어투가 튀어나왔다.

“그래.”

“왜 왔어.”

“술 마시러.”

“거짓말.”

“아니야.”

“나 괜찮은 거 알지?”

“알아, 알아.”

“진짜로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

“알았어.”

“정말로. 집에 와서 좋아. 우리 집 너무 좋아.”

“그래, 그래.”

“나 괜찮아.”

“다 좋은데 너 내일 일어나서 주정 부린 거 기억나면 머리 쥐어뜯는다.”

“안 그래.”

“퍽이나.”

“카디 언니한테 잘해.”

“당연하지.”

“카디 언니 울리면 내가 죽일 거야.”

“야, 넌 나랑 카스카디아랑 어느 쪽이 더 좋냐?”

“카디.”

“알았다. 집에 가서 네 말 전해 줄게.”

“응, 가서 꼭 전해 줘.”

“그런데 미레아. 네가 내 옷깃을 놔야 내가 갈 수 있어.”

“으음…….”

그 말에 미레아의 손이 느슨해졌다. 파울로는 그녀의 손가락을 하나씩 떼다가 왼쪽 손목에 달랑거리고 있는 팔찌 비슷한 것을 발견했다.

“이건 뭐야?”

그가 미레아 손목에 있는 팔찌를 건들려고 하자 그녀는 술에 거나하게 취한 상태인데도 팔을 번개같이 휘둘러 파울로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만지지 마.”

“이게 뭔데 그렇게 정색하냐.”

“내 거야.”

“그래, 네 거 해.”

술주정뱅이가 소유권을 주장한 물건은 뺏기 힘든 법이다. 파울로는 미레아가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들으며 살며시 방을 나왔다. 발소리를 죽이며 아래층으로 내려오니 아리스가 보이지 않았다.

뒷마당으로 통하는 문 앞에서 인기척이 났기 때문에 어디 있는지 찾을 수고는 필요 없었다. 뒷문에서는 바다가 잘 보였다. 아리스는 문가에 기대서서 그것을 보고 있었다.

“뭐 해?”

파울로의 말에 아리스는 찬물이 담긴 유리컵을 관자놀이에 대고 중얼거렸다.

“좀 어지러워서 찬 바람 쐬고 들어가려고요.”

“그러냐. 너무 늦지 않게 들어가라.”

“파울로야말로 안 가 보세요?”

“갈 거야.”

대답은 그리했지만 파울로는 아리스 옆에 쭈그려 앉아 주머니에서 꺼낸 담배를 한 대 물고는 불을 붙였다. 아까는 둘 다 잘만 떠들어 놓고 잠시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바닷바람이 아리스의 땋은 머리와 파울로의 짧은 꽁지머리를 한참을 흔들었다. 침묵을 먼저 깬 것은 파울로였다.

“너는 어느 방을 쓰기로 했어?”

“3층 다락방이요.”

“뭐야, 내가 쓰던 방이네.”

“쓰던 방?”

“나도 이 집에서 살았거든. 거긴 내가 6년 전까지 쓰던 방.”

아리스는 조금 궁금했던 것이 풀렸다. 어쩐지 파울로가 지나치게 익숙하다 싶을 정도로 집에 녹아난다 싶었다.

“이 집에 사연이 많은가 봐요.”

“이 집에 사연이 많다기보단, 우리에게 사연이 많은 거지.”

파울로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뱉었다.

“나는 원래 전쟁고아인 데다 소년병 출신인데 하루는 공습 때문에 아군은 다 죽고 나만 남았었거든. 당시에 작전에 참여했던 미레아의 아버지가 나 혼자 있는 것을 보고 황당해하더라고. 그도 그럴 게 그때 난 12살밖에 안 됐었으니까. 게다가 내 상관이란 사람은 어린애들을 적진으로 밀어 넣으면서 포로로 잡히면 고문을 당하다 죽을 테니 자결을 하라는 소리나 하던 한심한 놈이었지. 그래서 권총을 내 머리에 대고 쏘려는데 그런 나를 붙잡아서 데려가길래 정말 고문을 당하나 보다 생각이 들어 겁에 질려 있었어. 그런데 이게 웬걸. 엄청 맛있는 밥을 주는 거야.”

아리스는 갑자기 자신의 얘기를 주절주절 풀어놓는 파울로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했다. 술이 들어갔을 때 말이 많아지는 사람은 옆에서 닥치라 그래도 입을 다무는 법이 없었다.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꼼짝없이 붙잡혔다고 판단한 아리스는 그냥 파울로가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게 내버려 두었다.

“그래서 이게 마지막 만찬이라 잘해 주나 보다 생각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었는데 나를 이 집으로 데려오더라고. 나중에 이유를 물었더니 고아원이 믿음직스럽지 못해서 보낼 수 없었대. 그래서 자신의 집에 남는 방이 많으니 사람 하나쯤 늘어도 상관없다 생각했다고.”

파울로는 잠시 과거를 곱씹어 보았다.

“그래서 미레아가 2살일 때부터 이 집에서 같이 살았어. 나도 염치란 게 있어서 일반 아카데미에 입학하자마자 기숙사 생활을 한다고 떠나 있었는데 그래도 방학 때면 꼬박꼬박 이곳으로 돌아왔었고…… 그래서 미레아와는 남매까지는 아니어도 삼촌과 조카의 관계 정도라 할까. 지금은 내가 결혼해서 따로 살지만.”

자기 얘기를 한참 풀어놓던 파울로가 돌연 아리스에게 물었다.

“너 이 집에 침실이 몇 개인지 봤어?”

“3층 빼면 5개요.”

“그래, 원래 그 방마다 다 주인이 있었어. 케이드 제인스터, 레인 마리어드, 미레아 제인스터, 휴레오 제인스터, 세피로스, 그리고 나.”

파울로는 덤덤하게 기억 속에 있던 이름을 꼽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낯선 이름 뒤에 붙은 성씨가 ‘제인스터’인 것을 듣고는 아리스의 가슴 한구석이 섬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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