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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따라 종말까지-22화 (22/257)

22화.

한참을 일하다 보니 해가 지고 슬슬 저녁을 먹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있는데 갑작스러운 손님들이 들이닥쳤다.

현관 초인종 소리를 듣고 의아한 표정으로 문을 연 미레아는 파울로가 술병을 들고 서 있는 것을 보고 다시 문을 닫으려 했다. 하지만 문틈 사이로 술병을 끼워 넣은 파울로가 다급하게 외쳤다.

“야, 야, 야, 잠깐! 명령이다, 열어!”

“세피로스가 보내서 왔잖아요!”

문을 열려는 자와 닫으려는 자 사이에서 힘겨루기가 오갔고 절대적인 물리력의 차이는 파울로의 손을 들어 줬다. 강제로 문이 열리자 파울로의 등 뒤에서 또 다른 얼굴 둘이 빼꼼 튀어나왔다. 시오와 라일라였다. 그 둘은 해사하게 웃으며 미레아에게 손을 흔들고는 파울로를 선두로 집 안으로 들이닥쳤다.

“왜 왔어? 예고도 없이 왜 이렇게 우르르 몰려와?”

못마땅한 목소리로 얼굴을 구기는 미레아에게 시오가 따끈따끈하고 맛있는 냄새가 나는 포장 상자를 안겨 주었다.

“내가 통닭 튀김 사 왔어.”

“필요 없어.”

“맥주도 있어.”

“그러니까 필요 없다고.”

“안녕! 어제 헤어지긴 했지만 그사이 잘 지냈어요?”

미레아의 항의를 무시하고 셋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온 아리스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리스는 자신을 라슈발렌까지 끌고 온 세 사람이 갑자기 들이닥친 것이 또 무슨 일에 휘말리는 게 아닌가 싶어서 여차하면 도망칠 준비를 했다.

“어디 불편한 점은 없고요?”

“저녁은 먹었나?”

부담스러울 정도로 친근하게 묻는 말들에 아리스가 대답하기도 전에 미레아가 그 사이를 가로막고 빽 소리 질렀다.

“세피로스한테 난 괜찮다고 전해! 진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해!”

“회장님이 보낸 거 아니거든?”

라일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파울로는 오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고작 네 문제 때문에 회장이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줄 알아?”

상관이 시키는데 그렇게 안 하는 쪽이 더 문제 아닌가? 아리스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 네 말대로 너한텐 신경 안 쓸 거야.”

“그럼 왜 왔어요?!”

“술 마시러.”

“술을 왜 여기서 마셔? 카디 언니는 허락했어?”

“내 사랑하는 아내께서는 관대하시거든. 내가 없는 쪽이 덜 귀찮다고 좋아해. 그리고 겸사겸사 쟤 환영식도 하고.”

갑자기 저를 걸고넘어지는 통에 아리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네?”

“라슈발렌 협회에 온 걸 환영해요, 루데키아스!”

라일라의 말에 맞춰 시오가 폭죽을 빵 터트렸다.

“그리고 늦었지만, 생일도 축하해요!”

폭죽에서 튀어나와 나풀거리며 머리 위에 내려앉은 알록달록한 종이 술을 치우며 아리스는 한 번 더 황당하단 듯 되물었다.

“뭐? 생일?”

생일이라는 말에 파울로와 아웅다웅하던 미레아가 날짜를 셈해 보다 이마를 탁 쳤다.

“오늘이 3월 13일이면……! 너 어제 생일이었구나!”

그랬다. 아리스의 생일은 3월 12일. 유감스럽게도 라슈발렌에 납치라도 당하듯 온 날에 생일이 껴 있었다.

“그걸 당신들이 어떻게 알아?!”

“네 조사를 하면서 인적 사항을 훑어보다 보니 생년월일 정도는 외웠지.”

미레아가 당연하단 듯 말했다. 그리고 정말로 미안하단 얼굴로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어제는 정신도 없었고, 의식하지 않아서 잊고 있었네. 말하지 그랬어.”

“아니, 사실 나도 까먹고 있었어. 생일 안 챙긴 지 몇 년 돼서…….”

“그러니까 환영식 겸 생일 축하 파티! 같이 일하게 되었으니 무연고지에서 적응하기 편하게 도와줘야지. 앞으로 자주 볼 사이에 서로 돕고 사는 법이라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게 다 무슨 수작인지 모르겠지만, 나가.”

아리스는 역시 도망가자 생각하고 있는데 미레아가 생긋 웃으며 파울로의 말을 끊고 가운뎃손가락을 추켜세웠다. 하지만 파울로 역시 생긋 웃으며 미레아의 손가락을 쥐고 관절의 반대 방향으로 꺾었다.

“닭고기가 싫으면 종류별로 꼬치구이도 사 왔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사실 뭘 좋아할지 알 수 없어서 이것저것 골라 봤거든요. 루아드에서는 생일날 무얼 먹는지 몰라서 최대한 선택지를 많이 마련해 봤어요.”

비명을 지르는 미레아를 뒤로하고 아리스의 양옆으로 시오와 라일라가 붙어서 반쯤은 질질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리스는 끌려가면서 앞으로 이런 식의 참견이 계속된다면 세피로스의 제안은 거절하는 쪽으로 생각을 굳혔다.

“술은 좀 마시나요? 아, 맞다. 어제는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통성명을 안 했네요. 저는 ‘시오 미도르’라고 해요. 미레아의 전투부 선배죠.”

자신을 시오라고 소개한 남자는 키가 정말로 컸고 연한 하늘빛 머리카락에 회색 눈동자가 유들유들해 보이는 인상을 자아내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람은 분홍색 단발머리에 청록색 눈을 가진 사랑스럽게 생긴 여자였다.

“저는 ‘라일라 퍼블킨즈’. 기술부 소속이고요. 당신의 전담 마도 공학자랍니다.”

아리스는 양손을 올려 둘을 떼어 냈다.

“언제부터 제가 전담 마도 공학자씩이나 있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는지 저는 모르겠네요?”

“당신의 마력에 맞춰서 기계를 개량하려면 제가 당신을 실험 연구…… 아니, 당신이 저를 도와줘야 하거든요.”

라일라의 얼굴에 엊그제 본 표정이 아주 살짝 스치고 지나간 것을 본 아리스는 조금 무서워졌다. 이 사람이랑 얽혔다가는 얼씨구나 하고 자신의 마력 뿌리까지 뽑아먹을 게 분명했다.

“제가 그거 한다는 결정을 아직 안 했습니다만…….”

“아직 안 한 거죠. 하지만 며칠 있다가는 할 거예요. 그럼 결정한 거나 마찬가지인데 뭐가 문제예요?”

“제게 거절한다는 선택지도 있다는 걸 알려 드려야 할 것 같군요.”

“그거 장담할 수 있어요? 진짜 거절할 거예요?”

“어느 쪽도 장담할 수 없죠.”

“그럼 저랑 내기할래요? 저는 수락한다 쪽에.”

시오가 아리스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말했다. 아리스가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시오의 워낙 키가 큰 덕에 아리스의 어깨가 그의 팔걸이 역할을 하는 것엔 무리가 없었다.

“그럼 나는…… 거절한다 쪽에.”

라일라는 그리 말하며 못마땅한 얼굴로 시오를 바라보았다.

“너는 수락해야 좋은 거 아니야? 반대쪽에 걸어서 뭐 하게?”

“이 사람 표정 좀 봐. 시오의 그 나쁜 버릇 때문에 지금 자존심 상했잖아. 다른 사람 어깨는 댁의 팔걸이가 아니라 그랬지. 지금 시오 때문에 거절할 것 같단 말이야.”

시오는 뒤늦게 자신의 팔이 어디에 있는지 인식하고는 황급히 사과했다.

“그러니까 빨리 맛있는 술과 음식을 먹여 회유해야지.”

파울로가 한쪽 팔로 미레아의 머리통을 감고 옆구리에 끼우더니 술병을 흔들며 다가왔다. 안에 담긴 액체가 찰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놔! 젠장! 안 놔?!”

미레아는 버둥거리면서 꽥꽥거리다 파울로가 목을 조르자 금방 포기하고 끌려왔다.

“그렇게 보지 마. 이거 먹는다고 큰일 나는 거 아니에요. 냄새 죽이지? 조금 먹어도 괜찮아.”

능청스럽게 말하는 파울로를 보고 아리스는 아무래도 이 자리에 말려드는 걸 피하긴 글렀다고 생각하면서 속으로 욕 한 바가지를 퍼부었다.

파울로는 헤매지 않고 한길에 식당으로 가더니 가져온 술과 음식들을 늘어놓고 먹기 좋게 준비했다. 마치 자기 집이라도 된 듯 거침없는 움직임이었다. 아리스처럼 뻔뻔하다는 소리가 아니라 이 집의 주인처럼 집의 구조와 잡기들이 있는 위치들을 훤히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단 의미였다.

파울로의 주박에서 풀려난 미레아는 헝클어진 머리를 짜증스럽다는 듯 손으로 북북 빗어 내렸다.

“정말 세피가 시켜서 온 게 아니라고?”

“정말이라니까. 그리고 내가 이 집에 오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

그 말에 미레아는 가라앉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마음대로 해요.”

파울로는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아리스를 상석에 앉혔다.

“자, 자, 그러니 루데키아스 환영식 겸 생일 파티…….”

“그냥 술 마시러 온 거면서 그 핑계 좀 그만 대요. 그리고 얘는 자기 본명으로 부르는 거 싫대. 아리스라고 부르래.”

미레아가 툴툴거리며 아무 자리에 대충 앉았다.

“아, 다행이다. 난 그 이름 너무 길어서 발음하다 혀 씹을 것 같다니까.”

시오의 솔직한 평가에 아리스가 피식 웃었다.

“그거 하나만큼은 나랑 같은 생각이군요.”

아리스는 이제 이 상황에 저항하는 것을 포기했다. 사실 며칠 전부터 여러 가지를 하나씩 포기하는 중이었지만 이번엔 정말로 회의감이 들었다. 아리스는 조용한 여생을 살고 싶었다. 귀찮은 건 딱 질색이었다.

남들은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사건, 사고들을 22년 동안 몰아서 겪지 않았던가. 그런 이유로 6개월 동안 아무도 못 찾을 만한 곳에 처박혀 있었던 건데 기어이 끌려 나와 여기서 이러고 있다.

도망가면 잡으러 오고, 숨어 버리면 끄집어내고, 아무것도 안 했는데 세상 모든 나쁜 일은 전부 자기 탓이란 소리만 듣고. 지겨웠다. 이번에도 도망가면 과연 얼마나 조용하게 있을 수 있을까 계산하기도 지겨웠고 어디로 도망가야 할지 생각하는 것도 지겨웠다.

게다가 백부가 황제 자리에 앉아 있는 이상 조용한 생활을 하기도 전에 목과 몸뚱이가 생이별할 것 같았다. 그런 식으로 죽는 건 사양이었다. 숨 쉬는 것도 귀찮지만 죽자니 지금까지 해 온 것이 아까웠다.

그러니 옆에서 자리도 깔아 주겠다 귀찮은 것들을 이 기회에 전부 해치워 버려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그는 이미 전적이 있었다. 자신을 죽여 버리겠다고 덤벼드는 일국을 상대로 전부 베어 버리고 피의 숙청을 한번 해 봤더니 다른 건 상대적으로 쉬워 보였다.

전부 다 환멸이 난다. 그냥 세상 망했으면. 이미 반쯤 망한 것 같긴 한데 더 가열하게 망했으면.

아리스는 술은 아직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반쯤 풀린 초점으로 꼴꼴꼴 소리를 내며 술잔 가득 술을 붓고 있는 풍경을 보았다. 미레아는 맥주잔을 받아 들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참나. 올 거면 좀 더 좋은 거 들고 오든가. 아리스 생일 축하 파티라면서 생맥주도 아닌 거 가지고 생색내긴.”

“폴 포르디 30년.”

파울로가 고급스러운 무늬가 새겨진 술병을 하나 더 식탁에 쿵 하고 올려놓자 미레아의 눈빛이 변했다.

“감사합니다, 리마 대장님!”

미레아의 우렁찬 구호를 뒤따라 시오가 두 손을 모으고 존경심에 가득 찬 눈으로 파울로를 보았다.

“대장님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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