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21화 (21/257)

21화.

2층은 침실과 서재를 포함해 방이 모두 5개고, 3층의 다락방까지 합하면 6개였다. 세피로스에게 둘러댄 핑계이기는 했어도 미레아가 자기 혼자 살기에 너무 넓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혼자서 커다란 식당 하나와 방 6개를 관리하는 것은 손이 너무 많이 갔다.

2층 방문을 하나씩 열어 본 미레아가 나무 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계단을 올라온 아리스가 복도 끝에 난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그는 지붕 위에 삐죽 튀어나온 창문을 보더니 다시 머리를 안으로 집어넣고는 3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찾아내었다.

“다락방이 있네?”

“아, 응. 침실로는 거의 안 쓰지만 일단 비워는 놨는데…….”

“좋아. 나 거기 쓸게.”

선택권을 주기도 전에 소유권을 주장하는 객식구에게 미레아는 관대함을 발휘했다.

“안 될 건 없는데 다른 방들이 더 깨끗해. 제일 큰 방에는 화장실이 딸렸으니까 그 방을 쓰는 게 더 편할걸? 사양 말고 원하는 방을 골라.”

“아니, 난 거길 원해. 신경 쓰지 마. 난 오히려 거기가 제일 잘 맞거든. 이건 데르카이드의 본능 같은 거야. 날개가 있는 것들은 하늘과 가까운 곳을 좋아한다고.”

아리스가 진지하게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태연자약하게 자신을 놀리는 중이란 것을 눈치챈 미레아가 새초롬하게 대꾸했다.

“아까부터 말해 주고 싶었는데, 네 농담 재미없어.”

“저런. 난 재미있는데.”

아리스는 낄낄거리며 도망치듯 3층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그가 그곳을 고른 것에 거창한 이유가 있지는 않았다. 그저 여자와 단둘이 한집에서 살면서 같은 층을 쓰는 것보단 다른 층에 외따로 있는 방을 쓰는 쪽이 아리스의 고리타분한 내면의 양심이 허용하는 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뻔뻔함과 가치관을 지키며 예의를 차리는 것은 별개였다.

다락방은 아예 침실로 사용했던 적이 없지는 않았는지 낡은 침대가 있었고 그 옆에는 작은 옷장이 있었다. 아리스는 침대 위에 벌렁 누웠다. 이러저러한 복잡한 생각이 떠올랐지만 곧 가장 원시적인 욕구가 밀려오자 다시 사그라들었다.

“배고파.”

고작 다과용 쿠키 몇 개 집어먹은 것으로 배가 찰 리 없었다. 그리고 비슷한 순간 미레아 역시 아래층을 뒤지다 이 집에 먹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리스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계단을 내려오자 둘은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

“밥 먹으러 가자.”

“나 밥 사 줘.”

미레아는 뭐 저렇게 뻔뻔하게 요구하는가 싶었지만, 아리스는 어차피 자기 밥값으로 나가는 돈은 세피로스의 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둘은 다시 집을 나섰다. 그렇지 않아도 겸사겸사 장을 볼 필요도 있었다. 아까와는 달리 그들은 바이크 대신 집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있는 정거장에서 트램을 타고 시내로 나갔다.

항구도시인 록산은 사실 별 볼 일 있는 도시는 아니었다. 반도 국가인 세로킨은 국토가 넓지는 않았지만 예부터 전 세계 무역의 주요 경로였기 때문에 여러 유명한 항구가 많았다.

하지만 록산은 개중에서도 규모가 크지 않았기에 항만시설로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었다. 록산이 유명세를 치르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그 작은 도시에 라슈발렌 협회의 본부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록산은 로아메나 대륙의 절반이 오염되거나 부식이 된 이 시점에서, 가까스로 피해를 보지 않은 세로킨에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푸른 바다는 더욱 희귀한 광경이 되었다.

시내 한가운데에 정차한 트램에서 내리자 바다 냄새가 한껏 감돌았다. 바닷가와 맞닿아 있는 번화가는 중앙에 분수대를 기준으로 북쪽으로는 항구가, 동쪽으로는 생필품부터 시작해서 온갖 잡화가 모여 있는 상점가가, 남쪽으로는 식당들이 몰려 있었다.

역에서 몇 발짝 못가 갓 잡아 올려 박력 있게 푸닥거리는 해산물들에 정신을 뺏긴 아리스를 미레아가 식당가로 끌고 갔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미레아에게 록산은 자신의 손바닥 안이나 다름없었다. 당연히 좋은 레스토랑이 어디 있는지 쯤은 훤히 꿰고 있었다.

“먹고 싶은 거 있어?”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까 이 지역 특산물?”

“그럼 해산물.”

미레아는 자신만만하게 해산물 레스토랑 중에서 가장 맛있는 곳을 안내했다. 그 레스토랑의 맛은 돈과 비례했기 때문에 미레아는 이곳에서 식사한 경우가 손에 꼽았다. 하지만 지금은 세피로스라는 좋은 자금줄이 있었기 때문에 부담 없는 한 끼를 하기 아주 좋은 곳이었다.

그들은 레스토랑의 가장 좋은 자리로 안내받은 다음 메뉴판도 보지 않고 오늘의 특선 요리를 주문했다. 요리를 기다리며 아리스가 능숙하게 도수가 낮은 포도주를 서빙 받아 향을 먼저 맡더니 입가심으로 한 모금 마시는 것을 보고 미레아는 그가 말 그대로 ‘왕자님’ 같다고 새삼 생각했다.

식사 예법을 모르지는 않지만 번거롭게 하나하나 따져서 먹는 것보다 맛있는 건 일단 입에 넣는 자신과 비교하고는 지금까지 신기한 놈이라고 생각했던 아리스를 다시 평가했다.

‘엄청 신기한 놈.’

미레아의 시선에 아리스가 눈을 돌려 그녀를 마주 보았다.

“왜?”

“아니, 그냥. 다른 생각 좀 하느라고.”

“신기하다면 대놓고 구경해도 괜찮아. 이해해. 그래도 기왕이면 잘생겼다는 칭찬이라도 해 달라고. 내 얼굴이 나쁘게 생겼다고는 생각 안 해.”

그 말에 찔끔한 미레아가 황급히 변명했다.

“아냐, 아냐. 그런 거 아냐.”

“뭐? 내 얼굴이 별로라고?”

“아니, 그쪽을 말한 게 아니고!”

“그랬구나. 내 얼굴이 별로였구나. 미레아는 눈이 높구나.”

아리스가 보란 듯이 주절주절 한탄하자 미레아는 참다못해 버럭 외쳤다.

“아냐! 잘생겼어! 완전 잘생겼다고!”

“고마워. 너도 예뻐.”

원하는 답변을 얻은 아리스의 맞칭찬에 미레아가 고개를 푹 숙였다. 여러모로 낯간지러워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숨을 죽이고 웃고 있는 아리스를 보자니 아무래도 자신을 놀려 먹는데 재미를 들린 것 같아 미레아는 상대방에게 이를 악물고 한 자 한 자 끊어 말했다.

“네, 농담, 재미, 없다, 그랬지.”

“아, 나랑 농담 취향이 안 맞아서 서운하네.”

놀려 먹을 생각인 건 맞았지만 미레아가 예쁘다고 생각한 것도 사실이었기 때문에 아리스는 적어도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미레아는 질색했어도 그 농담 덕에 아까 울적해 보였던 기분도 좀 풀린 것 같고 말이다.

그러다 아리스는 왜인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마이련에서부터 계속 미레아를 챙겨 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딘가 우울해 보이기에 농담으로 기분을 풀어 주고, 기분이 안 좋아 보여 이것저것 참견하는 건 아리스의 원래 성미에 맞지도 않았는데 지금은 자연스럽게 하고 있었다.

‘지금 챙김 받아야 하는 쪽은 나 아닌가? 나를 먹여 주고 재워 주기로 한쪽은 저쪽인데 왜 신경 써야 하는 상황은 거꾸로 됐지?’

마침 음식이 나와서 망정이었지 아리스는 하마터면 자신의 억울함을 따져 물을 뻔했다. 아리스가 그런 생각을 하며 말없이 그릇을 비우는 사이 미레아는 귀족에 대한 편견을 강화하는 중이었다.

다른 나라 귀족이란 사람들은 예법이랍시고 역시 동화 속 왕자님들이나 쓸 법한 느끼하고 부담스러운 말을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하는 것쯤은 일도 아닌가 보다. 미레아는 급격하게 아리스가 부담스러워졌다.

세로킨은 민주공화국이었다. 귀족이란 신분이 없어진 지 이미 몇 십 년이나 되었기 때문에 미레아는 소위 말하는 신분 높으신 분을 대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적은 경험은 편견을 강화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반쯤은 강제로 얼떨결에 한 말이기는 했어도 아리스는 빈말로도 못난이라고 할 수 없게 잘생긴 게 사실인지라 볼 때마다 잘생겼다는 생각이 절로 들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루아드 사람이고 어머니 쪽은 마이련 사람인 혼혈이라 그런지 분위기 자체도 독특하고. 험한 곳에서 뒹굴다 온 사내놈 주제 피부는 또 매끄럽고 흠집 하나 없었다.

역시 고명하신 핏줄이라 이거지. 그렇게 편견을 강화하다 못해 기정사실로 확정 지으며 미레아는 속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황위 계승 서열 끝자락이다 못해 가문에서조차 존재가 희미해서 자기가 황족이었는지도 까먹고 살던 아리스가 들으면 속 터질 소리였다. 성격은 단순히 아리스 개인의 뻔뻔함 문제였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그랬다. 그의 어머니도 가끔은 자신의 배에서 어떻게 이런 성격이 튀어나왔나 당혹스러워할 정도였다. 거기에 외모는 그럭저럭 호남이라 봐 줄 만한 아버지 얼굴에 절세미녀인 어머니의 유전자가 좀 더 힘을 써서 얻어걸린 것이고 말이다.

둘 다 마음속에서 석연치 않은 부분을 안고 식사를 마친 덕에 조금 걸으며 소화를 시키는 일이 간절했다. 그들은 레스토랑을 나와 상점가로 걸어서 이동했다.

그들은 가장 먼저 옷가게에 들렀다. 아리스의 옷을 사며 미레아는 자신이 고른 쪽이 더 낫다고 생각했고, 아리스는 아리스 나름의 취향이 있던지라 설전이 조금 오갔지만, 해법은 간단했다. 둘 다 사면 되는 문제였다. 어차피 나가는 건 세피로스의 돈이었다. 아낄 필요가 전혀 없었다!

집에 아리스가 입을 만한 옷이 몇 벌 정도 있긴 했어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미레아의 남동생 것이었던 옷은 작았고 아버지가 입었던 옷은 대부분 품이 컸다. 옷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처지에 임시로 입을 수는 있지만, 일상적으로 입기엔 상당히 눈에 거슬렸다.

결국, 아리스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걸칠 것을 전부 사들여야 했다. 대부분 기성품을 사고 따로 필요한 것은 맞췄다. 내친김에 고글도 새로 샀다. 아리스에게 고글은 여러모로 쓸 일이 많았다. 자신의 얼굴을 적당히 가려 줄 수도 있었고, 비행할 때 눈으로 오는 바람을 막아 주기도 했다. 마이련에서 원래 쓰던 고글은 많이 낡아 새것이 필요하던 차였다.

다음으로 생필품과 식료품까지 사자 물건들의 양이 예상보다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도저히 둘이서 들고 갈 수 없어 추가금을 내고 집까지 배송을 시켰다.

쇼핑만으로 진이 다 빠진 그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땐 정글인지 정원인지 알 수 없는 그 공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다른 물건들을 느긋하게 구경하고 돌아오는 사이 사들인 물건들이 그들보다 한발 앞서 집 앞으로 배송이 와 있었다. 그 짐들을 풀고 정리하기도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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