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20화 (20/257)

20화.

“미안, 너무 오랜만이라 열쇠가 헷갈리네. 잠깐…….”

미레아는 한참을 짤랑거리던 열쇠들을 뒤적거리다 무안한 목소리로 웅얼거리며 아리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아리스는 얌전히 기다리고만 있지 않았다. 혼자 두리번거리다 손으로 대문 주변을 훑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자물쇠를 톡 하고 쳤다.

찰칵.

커다란 자물쇠는 아리스의 손이 닿자마자 금속음을 내며 열렸다.

“아, 열렸다.”

아리스가 무심한 목소리로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와 동시에 자잘한 빛의 편린이 집에서 터져 나와 사방으로 흩어졌다. 자물쇠가 풀리자 집 전체에 걸려 있던 보존 마법 역시 풀린 것이다. 미레아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들고 있던 열쇠 꾸러미를 저도 모르게 떨어트렸다.

“어차피 자물쇠를 열 생각이었으니 열쇠로 여나 내가 멋대로 여나 상관없지? 내가 성격이 급해서. 실례하겠습니다.”

아리스는 쓸모없어진 자물쇠를 망설임 없이 던져 버리고 대문을 열더니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어? 잠깐. 어? 야, 아리스, 대체 어떻게 열었어?”

잠시 굳어 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미레아는 허둥지둥 아리스의 뒤를 쫓았다.

“뭐야? 어떻게 한 거야?”

“뭐가?”

“아니, 어떻게 자물쇠를 열었어?”

“그냥 마력으로 열었는데.”

그 말에 미레아는 알고 있던 정보를 취합한 다음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이 집에는 세피로스가 직접 보존 마법과 보안 마법을 걸었고, 다른 마력은 튕겨 나오게 설정했는데 그걸 맞는 열쇠도 없이 열었다고?”

“응.”

“그러니까 어떻게?”

“그렇게 어렵지 않아. 세피로스가 술식을 복잡하게 짜 넣어서 한 부분이 무너져도 다른 부분이 보완할 수 있게 견고하기는 해도 그런 술식은 일정량 이상의 마력이 흐르면 과부하가 걸리기 쉽거든. 그리고 마력을 튕겨 내는 쪽의 힘보다 밀어붙이는 쪽의 힘이 더 세면 어쩔 수 없지 않겠어? 그래서, 조금.”

아리스가 핑거 스냅을 튕기자 딱 소리와 함께 손가락에서 청색 스파크가 튀었다.

“흘려 넣어 줬어.”

그러니까 자신의 마력을 말이다. 미레아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정리하며 중얼거렸다.

“지금 세피의 마력 한계치에 맞춰서 짜 놓은 술식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마력 수치가 넘어섰다는 소리야?”

“바꿔 말하면 그렇지.”

가볍게 대꾸하는 아리스의 말에 미레아의 턱이 절로 아래로 떨어졌다. 데르카이드 중에서도 아리스는 마력 보유량이 역대 최고급으로 특출 나다 듣긴 했지만, 세피로스의 술식에 과부하가 걸릴 정도로 마력을 때려 부을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게다가 술식을 파쇄하는 것도 구조를 분해하는 게 아니고 오로지 순수하게 마력의 양만으로 말이다. 무식하기 짝이 없는 방법이었다.

직접 두 눈으로 보니까 되게 신기한 놈일세. 미레아는 순수하게 감탄하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나저나 이 집을 대체 몇 년이나 비워 둔 거야?”

아리스는 거의 정글이나 다름없는 정원을 보며 허리께를 손으로 짚었다. 미레아는 그제야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알아차렸다.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에 당황해서 정신없이 아리스의 뒤를 급하게 쫓아오는 동안 자신은 대문을 지나 어느새 마당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늘어트린 손을 무성하게 자란 풀잎이 간지럽게 스쳤다. 미레아는 발밑으로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앞을 보았다. 바로 앞에 대문처럼 타일로 꾸민 나무로 된 현관문이 보였다. 미레아는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5년쯤.”

“하긴, 보존 마법을 무생물에는 걸어도 살아 있는 식물에도 걸려면 복잡해지니 이쪽은 손대지 않은 게 이해는 되지만…….”

아리스는 피식 웃었다.

“설마 이걸 너와 나 둘이 전부 정리해야 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 우리 둘이 해야…… 할걸?”

“정말? 너무한 거 아니야? 나는 그냥 객식구니까 빼 줄 순 없어?”

그러면서 현관 쪽으로 몇 걸음 옮기다 미레아가 멍하니 서 있는 것을 보고 다시 되돌아왔다.

“뭐 해, 집주인. 빨리 와.”

아리스는 미레아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 동작은 거의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고 팔을 제대로 붙잡지도 않고 흉내만 내었는데도 미레아는 무력하게 고분고분 당기는 쪽으로 끌려갔다. 그것은 팔을 타고 내려와 손까지 오더니 미레아보다 약간 체온이 높은 손가락이 손을 감싸 왔다. 자세하게 묻지는 않았지만 지금 미레아가 어떤 기분인지는 정도는 안다는 듯이.

아리스는 자라 온 환경과 처한 상황들 덕에 눈치로 치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예민한 사람이었다. 미레아도 그것은 어림잡아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인데 미레아가 지금 어떤 것을 두려워하는 것인지 정확한 것은 모른다 해도 해야 하는 일 앞에서 망설이고 있다는 사실은 모를 수 없었다.

하지만 네가 뭘 아는데. 내 무엇을 알고 이러는 건데.

그래도 손을 뿌리칠 기분은 들지 않았다.

아리스는 손으로 풀잎을 훑으며 정원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대문에서 현관까지 난 길이 식물들에 점령당해 없어진 바람에 거의 허리 높이까지 자란 풀밭을 헤치며 지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리스가 길을 만들어 준 덕에 손을 붙잡혀 뒤따라오는 미레아는 걸리적거리는 방해물 없이 걸을 수 있었다.

대문과는 달리 현관문은 단순히 물리적인 힘으로만 잠겨 있었다. 걸쇠에 평범한 자물쇠만 달려 있다는 소리다. 아리스는 빨리 열라는 듯 얌전히 옆으로 비켜섰는데 주머니를 더듬던 미레아는 대문 앞에서 열쇠 다발을 떨어트린 것을 기억해 냈다.

아리스에게 양해를 구한 후 종종걸음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가 땅에 떨어진 열쇠 다발을 주운 후 미레아는 다시 대문 앞에 섰다. 이제는 미레아의 정원이 된 그곳에 사람이 서 있었다. 기억 속에 있던 그들이 아닌, 새로운 얼굴이 서 있었다.

그의 키는 훌쩍 컸지만, 풀들 또한 질 수 없다는 듯이 어마어마하게 자라나서 썩 괜찮은 광경이 아니었다. 그래도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땋아 내린 검은 머리카락이 한 번씩 들썩였다. 난잡하고 아무렇게나 자랐지만 봄인지라 잡초들 역시 봄꽃을 피워 냈고, 푸르고 여린 이파리는 부드럽게 살랑였다.

아리스는 고작 잠깐 기다리는 것도 못 참고 장난삼아 그것을 뚝뚝 꺾으며 잡꽃 줄기들을 한 줄로 꼬아 팔찌를 만들고 있었다. 정말로 심심풀이였던 듯 어느 정도 길이가 되자 그냥 던져 버리려다 이도 저도 아니게 낮은 담장을 사이에 두고 서서 자신을 보고 있는 미레아에게 손짓했다. 미레아가 다시 문간을 넘어 아리스 앞으로 다가가자 손목을 낚아채더니 제멋대로 꽃팔찌를 묶어 버렸다.

“집주인 마음대로 꽃을 꺾었는데, 선물이야. 이걸로 정원 정리는 빼 주는 거로…… 어때?”

“뭐? 고작 이런 거로?”

아리스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나는 고작 며칠밖에 머무르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이런 노동에 동원되는 건 억울하잖아.”

“이런 건 보통 시장에서 강매하던 상인들이나 쓰던 수법인데. 전직 대공자 전하께서 쓰시기엔 좀 품위 없지 않아?”

“일가친척들 멱따고 다닌 건 뭐 품위 있었나.”

아리스는 저딴 말을 농담이라 생각했지만, 미레아는 그걸 농담으로 받아들여도 되는지 고민스러웠다. 그래서 입을 다물었고 아리스는 그 침묵을 긍정이라고 제멋대로 생각했다.

조금만 힘주면 여린 줄기들이 힘없이 뜯겨 나갈 텐데 미레아는 그것이 망가지지 않게 행동을 조심하며 팔을 내렸다.

현관문까지 열고 겨우 집 안으로 입성한 그들은 문간에서 두리번거렸다. 아리스는 남의 집이라 어색해서 그랬고 미레아는 오랜만에 감회에 젖어서 그랬다. 미레아가 정말로 어색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짜, 짜잔! 어때?”

“집 좋은데? 그래서, 나는 어디서 자면 돼?”

대충 집 구조를 파악한 아리스는 복도를 걸어 들어가 응접실 소파에 자기 집이라도 되는 것처럼 태연하게 털썩 앉았다. 이제 아리스는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괜히 자존심 챙긴답시고 비싸게 굴어 봐야 저나 상대방이나 아쉽긴 마찬가지인데 그럼 철판 좀 깔고 가는 게 뭐가 나쁘겠냐 싶었다.

사실 아리스는 다른 사람들 기준에서 보면 날 때부터 얼굴에 철판이 깔린 상태로 태어난 사람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다른 사람 기준이고. 본인은 자기 자신을 제법 염치 있는 축이라고 평가했다.

지금 그들이 있는 지역은 로아메나 대륙 동쪽 끝에 있는 세로킨 공화국의 록산이란 소도시였다. 소도시기는 해도 라슈발렌 협회의 본부 건물이 있는 곳이라 도시 규모치고는 제법 북적북적한 분위기인 지역이었다.

록산의 전통적인 주택은 보통 1층은 부엌, 식당과 응접실 등으로 사용하고 침실은 2층부터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그 전통 양식에 현대적인 개조를 한 이 주택 역시 기본적인 구조는 비슷했다.

아리스는 소파에 앉아 집을 둘러보다 위화감이 느껴지는 벽을 발견했다. 다른 부분은 세월의 흔적이 어느 정도 있는 데 반해 그 벽은 최근에 만든 것 같은 상태였다. 큰 티는 안 났지만, 그 외에 다른 몇몇 부분 역시 그랬다. 집의 반절은 새로 만들어 보강한 느낌이었다.

그것에 관한 일은 미레아에게 물을 필요도 없이 어떤 상황이었는지 대충 짐작이 가긴 했다. 5년 전에 마수 때문에 부서졌던 것을 다시 복원한 것이었다.

소파 위에 퍼져 있는 아리스를 보자니 미레아는 이제 혼자 감회에 젖어 있는 건 자제하기로 했다. 아리스가 미레아의 눈치를 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자기 기분이 고스란히 간파당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자니 홀딱 벗겨진 기분이라 민망했다.

아리스를 소파에 앉혀 두고 집을 돌아다니며 서랍장과 옷장, 찬장 등 문이 달린 건 일단 전부 열어 본 미레아가 필요한 것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집에 있는 대다수 것들은 좀 낡거나 먼지가 쌓여서 그렇지 정리만 하면 그럭저럭 쓸 수 있는 상태였다. 자신의 짐이야 아직 기숙 아파트에 고스란히 쌓여 있는 것을 가져오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아리스의 옷이 한 벌도 없다는 핑계로 세피로스의 돈을 갈취할 계획이긴 했으나 그에게 맞을 것 같은 깨끗한 옷들도 많이 남아 있었다. 사실 보존 마법 덕분에 정원을 제외하면 집 안은 청소를 크게 할 만한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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