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바이크는 해안 도로를 타고 달렸다. 상쾌한 바닷바람에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고글 덕에 빛과 바람의 방해를 받지 않고 마음껏 바다를 볼 수 있었다. 아리스는 저도 모르게 에메랄드빛 바다를 넋 놓고 바라봤다. 창문 너머로 봤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풍경이었다.
“아직 이런 바다가 남아 있다니 굉장하네. 다른 곳은 마수 때문에 오염된 곳도 많은데…….”
“여기 사람들이 간신히 지켜 낸 바다야.”
아리스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에 미레아가 대답하자 화들짝 놀랐다. 미레아는 달리는 길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세피로스도 그런 말을 했어. 5년 전에 마수에게 직격타를 맞았다고.”
“음, 뭐. 그땐 다른 곳도 엉망이었으니까.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운이 좋았어. 직격타를 맞긴 했지만 당시에 본부에 주둔해 있던 전투부 전력과 일부 용들 덕분에 빠른 대응이 가능했지.”
아리스에게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미레아가 일부러 경쾌하게 말했다.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지, 뭐.”
미레아의 고글에 빛이 반사되어 지금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아리스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것 역시 세피로스도 비슷한 말을 했어.”
“뭐야, 그랬어? 그런데 왜 그런 반응이야. 우리 둘 다 5년 전 그 일이 단순히 너 하나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어쩔 수 없는 사고였지. 거짓말은 아니니까 그냥 좀 믿어라.”
아리스는 턱에 손을 괴고 미레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무슨 질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답해 주는 대신 나도 하나 질문해도 돼?”
“좋아.”
거래가 성사되자 아리스는 미레아에게 현재 그들의 목적지인 ‘집’에 관해 묻고 싶었다. 어째서 집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기숙 아파트에 살았는지, 지금까지 왜 비워 뒀는지, 다른 가족은 없는지 그 밖의 것들이 궁금했다. 하지만 직감적으로 유쾌하지만은 않은 사연이 깊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리스는 가장 궁금한 것은 포기하고 그다음으로 궁금한 것을 물어보려 그랬다. 리비엘로에게 미레아에 관해 물었던 것과 비슷한 질문들 말이다.
미레아 제인스터는 어떤 사람인가.
하지만 그것은 질문하자니 너무 막연했다. 어떤 면에서는 철학적이기까지 했다. 아리스는 구체적으로 무엇부터 물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세 번째로 궁금한 것을 물었다.
“세피로스랑 무슨 사이야?”
“아빠 친구.”
별다른 망설임 없는 답이었지만 좀 이상했다. 그러니까 세피로스에게 인간 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친구?”
“우리 아빠가 전에 전투부 부장이었거든. 그런데 그것과 별개로 그 이전부터 알고 지냈다 들었어. 어쩌다 둘이 친구 먹은 것인지 자세한 것은 아빠도 세피도 이야기해 주지 않아서 잘 몰라.”
“그런 것치곤 지나치게 허물이 없던걸.”
미레아가 소리 내어 웃었다.
“어릴 때부터 지겹게 봐서 그래. 단순히 친구라 하기엔 제법 가까웠거든. 우리는 거의 가족처럼 지냈어. 아니, 가족이었지. 지금의 회장직을 맡기 전, 그 도마뱀은 뻔뻔하게도 자기가 살 집을 알아보지도 않고 록산까지 와서 우리 집에 눌러앉아 살았던 적도 있다고.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는 내 보호자를 자청했었고.”
미레아가 무심코 흘린 말에 아리스의 표정이 굳었다. 하지만 그녀는 재잘재잘 말을 이었다.
“덕분에 과보호까지는 아니지만 내가 하는 일은 이것저것 전부 참견하려 들어서 귀찮아 죽겠다니까. 뭐, 그걸 빌미로 세피의 권력에 편승해서 이것저것 얻어먹고는 있지만. 그래도 나도 나름 자아 결정권이란 게 있는데 말이지.”
미레아는 살짝 고개를 돌려 아리스를 힐끔거렸다.
“대답이 되었어?”
“네가 묻고 싶은 건 뭐야?”
아리스의 말에 미레아는 조금 고민하는 듯 가볍게 앓는 소리를 내더니 진지하게 물었다.
“왜 본명을 싫어해?”
“쓸데없이 길잖아. ‘루데키아스 레민나 류 파니드라우’. 발음하다 한세월 다 가겠다.”
실없는 농담에 미레아가 웃었다. 아리스는 조금 뜸을 들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루아드의 황실은 전통적으로 서리 여신에게 이름을 받아. 루아드 황실과 서리 교단은 오래전부터 유착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루데키아스는 여신께서 지어 주신 이름. 레민나는 황실의 전통에 따라 가문에 주어진 의무를 실은 이름. 그리고 뒤에는 어머니의 성인 ‘류’와 아버지의 성인 ‘파니드라우’가 붙지.”
“아.”
더 깊게 설명하지 않아도 알법하단 반응이 들려왔다. 하지만 아리스는 설명을 멈추지 않았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이유도 있지만, 사실 다른 이유가 더 커. 우리 부모님께서는 나를 주로 애칭으로 불러 주셨거든. 어린 내가 어설픈 발음으로 말할 때 ‘루데키아스’라는 발음을 제대로 못 했다나. 그러다 어눌하게 뭉개는 발음으로 말하는 것을 포기하고 내가 쉽게 발음할 수 있었던 것이 ‘아리스’였었대. 그게 내 애칭이 되었고. 내가 여신의 속삭임을 받은 데르카이드라 낙인찍힌 이후에는 아예 서리 여신에게 받은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어.”
생각보다 말이 길어졌지만, 미레아는 별다른 추임새도 없이 묵묵히 들어 주었다.
“하지만 백부는 나를 애칭으로 부른 적이 한 번도 없어. 항상 본명으로 루데키아스라 꼬박꼬박 불렀지. 아버지와 똑같이 생긴 그 얼굴로 말이야. 자신과 같은 얼굴을 한 쌍둥이 형제에게 총구를 겨눈 그가 생각나서, 그 이름 싫어해.”
그래서 소름이 끼쳤다. 아버지를 떠올릴 때마다 같은 얼굴을 한 그의 끔찍한 기억이 싫어도 함께 강제로 끄집어 올려졌다. 마라피네스와 메르티어스는 일란성 쌍둥이였던지라 그 외형이 지나치게 똑같이 생겼다.
그래서였을까. 가끔은 아주 어릴 적 기억 속의 사람이 아버지인지, 백부인지 헷갈릴 때도 있었다. 마음 놓고 추억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게 진실인지 허상인지 항상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미레아는 그의 말을 다 듣고 나서 한참 있다가 겨우 한마디를 중얼거렸다.
“우리 둘 사이에 공통점이 적어도 하나는 있네.”
상대방에게 궁금했던 것이 우연하게도 서로의 아버지가 얽혀 있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 뜻을 읽은 아리스는 다시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이런 것 말고 다른 부분이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지.”
“그건 차차 알아 가면 되지.”
미레아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는 사이 바이크는 경사가 완만한 언덕길로 접어들었다. 본격적인 주택가인 듯 담벼락 색이 알록달록한 건물들이 띄엄띄엄 있었고, 작은 정원과 베란다마다 색색의 꽃나무가 소담하게 자라 있었다. 아기자기하고 예쁜 동네였다.
미레아에겐 이 동네 자체가 오랜만이었다. 마지막 기억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어 보였다. 그게 어쩐지 안도감을 주었다. 자신이 없었던 사이 변했다면 기분이 이상했을 것 같았다.
미레아는 길을 조금 더 올라가 바다가 정면으로 보이는 집 앞에 바이크를 멈춰 세웠다. 미레아가 아무 설명도 없이 바이크에서 헬멧과 고글을 벗으며 내리자 아리스 역시 따라 내렸다.
마당 입구에는 커다란 아몬드 나무가 있었는데 만개한 꽃에서 진한 향기가 올라왔다. 높지 않은 돌담이 둘린 노란 3층 집은 작은 마당이 있고 지붕은 붉은 기와가 올라가 있었다. 단단한 나무와 알록달록한 타일로 장식된 대문에는 커다란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미레아는 누군가 자신의 위장을 손으로 쥐어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리비엘로에게 괜찮다고 못 박았던 말이 허세가 되지 말아야 할 텐데 솔직히 말하자면 토할 것 같았다. 집 주변을 둘러보던 아리스는 미레아의 얼굴이 조금 하얗게 질린 것을 발견했다.
“음, 그러니까…… 음…… 여기가 우리 집이야.”
미레아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러나 조금 힘겹게 입을 열었다.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당겨 올리고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열쇠 뭉치를 꺼냈다. 손끝이 살짝 떨려서 반대쪽 손으로 덮어 눌렀다.
아냐, 아냐, 아냐. 이렇게 꼴사납게 떨고 있으려고 온 것이 아니잖아. 난 괜찮아. 그저 집에 온 것이 오랜만이라 조금 긴장했을 뿐이야.
괜찮아, 미레아 제인스터. 이제 똑바로 볼 때가 되었잖아.
아, 그래 맞아. 맞는 말이야. 과거의 트라우마 때문에 혼자서는 집에도 못 들어가고 혼자 찌질거리고 있는 거 꼴 보기 싫으니까 자기 집으로나마 들어오라고 세피로스가 농간을 부린 덕분에 기숙 아파트에서 쫓겨나기나 하고. 거기에 고집부리다가 구차하게 세피로스에게 매달리는 것도 싫지 않았던가.
바람을 타고 들려온 즐거운 웃음소리가 귓가를 스친 것 같았다. 눈물 날 정도로 그리운 소리였지만 미레아는 그것이 환청이란 것쯤은 알고 있었다. 저 문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미레아가 기억하고 있던 그 광경은 없다. 그러니까 자신의 추억을 빌미로 현실을 우롱하지 말아 달라 외치고 싶었다.
허나 환청을 만들어 낸 것도 자기 자신, 멋대로 상상하는 것도 자기 자신, 알면서도 미련 못 버리는 것도 자기 자신. 그러니 그것은 전부 자기 자신을 향한 비난이었다.
머저리 같은 미레아 제인스터. 미레아는 결국 육두문자를 입안에서 뇌까렸다.
아, 때려치워, 때려치워. 여기까지 와서 들어갈 용기도 없으면 그냥 지금이라도 세피로스한테 달려가서 사저 하나 내달라 그러든가, 아니면 세피로스 집에 남는 방 하나 달라 그러든가, 그러고 평생 거기 틀어박혀 있든가.
이러저러한 수많은 생각이 불과 몇 초 사이에 빠르게 흘러갔다. 그렇다고 유익한 결론이 나온 것은 아니었다.
가볍게 심호흡을 한 보람도 없이 머리가 멍했다. 열쇠들을 만지작거리던 미레아는 이 많은 열쇠 중 어떤 것이 저 자물쇠의 짝인지 헷갈렸다. 전부 맞는 것 같았지만, 전부 아닌 것도 같았다. 그러다 나중엔 자신이 맞는 열쇠 꾸러미를 갖고 온 것이 맞는지 확신이 전혀 들지 않았다. 무의식이란 녀석이 일부러 열쇠의 모양을 기억에서 지운 것 같았다.
한심해 죽겠네. 죽어라, 미레아 제인스터. 빨리 눈앞에 보이는 바닷물에 뛰어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