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라슈발렌 소속 요원의 인적 사항이 아무 입에서나 술술 나올 리 없잖아.”
“친구라며. 친구로서 말해 보란 소리야.”
“오, 그렇다면 너도 내 친구가 되어야 말해 줄 수 있지 않겠어?”
그 말에 루데키아스가 입을 다물고 다시 정면을 보며 팔짱 꼈다.
“나랑 친구 하는 게 그 정도로 싫은 거니 아니면 그 정도까지 궁금한 건 아니었던 거니?”
“둘 다.”
“그런데 미레아에 대한 건 왜 궁금해?”
리비엘로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의뭉스럽게 웃었다.
“궁금하면 안 돼?”
“세계에서 제일 위험할지도 모르는 사람이 내 친구에게 관심을 가지는데 내가 걱정해야 하는 상황일지도 모르잖아. 대체 왜 그런 관심을 가지실까?”
리비엘로의 말에 루데키아스는 자문했다. 그러게? 왜? 그게 왜 궁금해? 내 코가 석 자인데 남의 일은 상관없잖아? 잠시 그런 생각을 하다 이내 자답했다. 궁금해하면 뭐 어때? 인간은 원래 호기심이 많은 동물이다. 궁금할 수 있지.
게다가 미레아는 자신에게 호기심을 가져 보라는 말까지 했다. 당사자가 그리 권하는데 호기심을 갖는 게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말인가.
“당신과 이렇게 서 있기 어색하고 심심해서?”
루데키아스의 대답에 리비엘로가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네가 직접 알아봐 봐. 미레아는 정말 알기 쉬운 아이니까.”
썩 마음에 드는 대답은 아니라 루데키아스가 미간을 찡그리고 있는데 집무실 문이 엄청난 기세로 열렸다.
“야! 너 우리 집 가는 거로 결정 났어. 가자!”
미레아가 복도로 뛰쳐나오다 나란히 서 있는 둘을 보고 루데키아스와 리비엘로를 번갈아 가며 손가락질했다.
“그사이 둘이 인사한 거야?”
“난 했는데 저쪽은 안 해 주더라.”
“사람이 쪼잔하게…….”
미레아가 한심스럽단 얼굴로 루데키아스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그는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서로 사정은 알겠지만 내 앞에서 싸우지는 말아 주라.”
미레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루데키아스는 침묵했고, 리비엘로는 작게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보다 너희 집?”
“세피로스가 말한 곳이 아니고 다른 곳이야?”
리비엘로와 루데키아스는 갑자기 바뀐 그들의 목적지에 의문을 표했다.
“네가 사는 집 말이야?”
살던 집이라면 조금 전에 자기 입으로 쫓겨났다고 하지 않았던가.
“응, 우리 집. 그러니까 정확하게는 내가 원래 살던 집. 우리 집 제법 괜찮거든? 지금 아무도 안 살아서 우리 둘이 넓게 살 수 있어. 세피로스도 허락했거든. 세피가 마련한 저택보다 우리 집이 여러모로 나도 편하고.”
그 말에 지금까지 루데키아스와 이야기하는 동안 표정 변화가 크지 않았던 리비엘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둘 사이에 끼어들어 미레아의 어깨를 잡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가기 싫다 그러더니 정말 돌아가는 거야?”
“응.”
“왜?”
“왜…… 라니. 우리 집에 내가 못 갈 이유라도……?”
미레아는 애써 리비엘로의 시선을 외면하려 그랬다. 하지만 리비엘로는 미레아의 생각을 읽었는지 못마땅한 얼굴로 루데키아스를 보더니 다시 미레아의 어깨를 꽉 쥐었다.
“너, 설마…….”
“무슨 생각을 하길래 설마라고 그래?”
“그러니까 혼자는 싫다더니 루데키아스를…….”
“아, 그래! 네가 생각하는 그게 맞을 거야! 맞다고! 그런데 그러면 안 돼?”
“안 되는 게 아니고……! 왜 하필 저 사람이야? 나도 있고 하다못해 세피로스 님이나 파울로도 있고……!”
“그럼 안 돼? 저 사람이면 안 되는 이유는 또 뭐야? 세피도 허락했거든?”
강경한 미레아의 말에 리비엘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괜찮겠어? 너무 갑작스럽잖아.”
“괜찮아. 내가 어디 못 갈 데 가는 것도 아니잖아.”
미레아가 일부러 과장되게 하하하 웃었다. 리비엘로는 하고 싶은 말이 많단 얼굴이었지만 그런 미레아의 양손을 모아 잡고 걱정스럽게 말했다.
“네가 그렇다면 알았어. 무슨 일 있을 때 연락하면 바로 달려갈게.”
“내가 앤가. 괜찮다니까. 마음만 고맙게 받겠어.”
미레아가 루데키아스의 앞을 막고 있는 리비엘로를 옆으로 치웠다.
“아무튼, 넌 방금 말한 대로 우리 집에서 지내면 돼. 세피로스는 며칠 정도 생각 정리하면서 쉬라 그랬어. 그거 이외에 할 말은 다 한 모양이던데 그 용은 배웅 같은 거 안 해 주는 성격이라 용무 끝나면 관심도 끊거든. 혹시 너는 아직 전할 말이 남았니? 없으면 나랑 가자.”
그 말에 루데키아스는 미레아의 어깨너머에 있는 세피로스의 집무실 문을 보며 되물었다.
“지금 바로?”
“어…… 사실 내가 집에 안 가 본 지 오래돼서 지금 집 상태가 어떤지 빨리 체크하고 필요한 게 있으면 채워 넣어야 하는데 너 그동안 어디 가서 있을 만한 곳도 없잖아. 아니면 세피랑 차나 더 마시던가.”
그 말에 루데키아스는 재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너 제대로 챙겨 온 개인 소지품도 없지 않아?”
미레아는 히죽거리며 루데키아스의 눈앞에 손바닥만 한 하얀 종이책 같은 것을 팔랑거렸다.
“내가 네가 필요한 물건들 구매할 때 쓰겠다고 세피에게 백지수표를 받아 왔거든. 필요한 게 있으면 얼마든지 말만 하라고. 우리는 이걸로 즐거운 소비생활을 누리면 돼.”
신이 난 미레아와는 달리 루데키아스는 별다른 감흥이 없어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리비엘로만이 의심쩍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회장님이 그걸 순순히 줬다고?”
“얘가 지금 당장 갈아입을 옷조차 하나도 없는데 어쩔 수 없잖아. 옷 사 입히고, 먹을 거 사 먹이고 하는 것도 다 돈인데 억지로 끌고 왔으면 이 정도는 해 줘야 하지. 그지?”
미레아는 루데키아스에게 답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 너는 동의만 하라는 얼굴로 장난스럽게 웃었다.
“뭐, 필요 이상으로 쓰면 월급에서 깐다는 소리 듣긴 했지만, 세피의 말대로 난 정말로 필요한 것들만 살 거야. 필. 요. 한. 것. 만.”
미레아는 콧노래를 흥흥 불렀다.
“리비, 한가하면 너도 같이 갈래?”
리비엘로는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 결 좋은 백금발 머리카락이 움직임을 따라 찰랑거렸다.
“구경 다 했으니까, 괜찮아. 그리고 내가 끼면 불편하잖아?”
“구경?”
리비엘로는 한쪽 눈을 찡그리며 되묻는 루데키아스에게 눈을 곱게 접어 웃어 주었다.
“만나서 반가웠어. 나중에 또 봐.”
그 말을 끝으로 리비엘로는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멀어졌다. 미레아는 어색하게 말했다.
“그럼…… 야, 나 잠깐 내 로커에 들려서 열쇠 챙기고 올게. 겸사겸사 머리도 좀 어떻게 해 보고. 제대로 안 말렸더니 완전 난리 났네.”
미레아가 아직도 눅눅한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매만지며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루데키아스는 그 뒤를 쫓으며 못마땅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너 왜 아까부터 나를 야, 야, 거리면서 불러?”
“어?”
“내 호칭이 왜 그 모양이냔 소리야. 말이 짧은 건 둘째 치고.”
그 지적에 미레아는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머리카락을 뱅글뱅글 꼬며 되물었다.
“어…… 아니, 반말은 그쪽이 먼저 쓰셨고요, 존대를 원하시면 그쪽이 먼저 정중해지시든가. 혹시 황족의 대우를 원해? 근데 너는 다른 나라 황족이지 우리나라랑은 상관없잖아. 나는 너의 백성이 아니라고. 그리고 내가 너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솔직히 모르겠거든. 너 본명으로 부르는 거 싫어하잖아. 그래서 최대한 피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그렇게 불렀던 건데 그럼 뭐라고 불러?”
그 말에 구겨져 있던 루데키아스의 미간이 펴졌다. 자신이 지나치게 신경질적으로 경고했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그…… 렇네.”
“그렇다고 흑익이라고 부를 수도 없잖아. 네가 여기 있다는 건 세피의 최측근 아니면 기밀이란 말이야. 동네방네 네가 흑익이라고 떠들고 다니면 큰일 나. 이건 어차피 본명으로 불러도 똑같은 문제고.”
그 질문에 루데키아스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말했다.
“전처럼 아리스라고 불러. 아리스 클라인셔드.”
“그 가명 계속 쓰게? 괜찮겠어?”
“상관없어. 어차피 대외적으로 이 이름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거든.”
“아니, 그게, 그러니까…… 성이 ‘클라인셔드’라고?”
“그래.”
“그거 혹시 뜻이…….”
“네가 생각하는 그 뜻이 맞을걸.”
“‘클라인을 훔친 자’라는 뜻을 성으로 삼는 놈이 어디 있어?”
미레아는 제정신이냔 얼굴로 대답한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상대방은 뻔뻔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클라인은 원래 대공령이었고, 원래대로라면 내가 물려받을 계획이었으니까 틀린 말은 아니잖아.”
그러더니 루데키아스는, 아니, 아리스는 싱긋 웃으며 허리를 정중하게 굽혔다.
“그러니 자기소개를 다시 하지. 내 이름은 아리스 클라인셔드. 만나서 반가워, 미레아 제인스터 군. 부디 과거의 내 무례는 잊고 앞으로 잘 지냈으면 좋겠어.”
미레아는 재미있다는 듯 깔깔 웃더니 아리스가 했던 것처럼 허리를 굽혔다.
“좋아, 그 사과 받아 주겠어. 이쪽이야말로 잘 부탁해.”
시기적절하게 태양을 가리고 있던 구름이 흘러가면서 햇살이 창을 통해 쏟아져 내렸다. 별것 아닌 장면이었지만 아리스는 그것이 제법 극적인 연출이라고 생각했다. 상대방의 감람석 같은 눈동자가 햇살을 받아 너울거리는 물결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 덕인지 자신을 향한 한 점의 악의도 찾아볼 수 없는 그 얼굴에 가슴이 뛰었다.
* * *
미레아는 정문에 아리스를 세워 두고 잠시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그는 미레아를 기다리며 멍하니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라슈발렌의 정복을 입은 이들과 이곳의 주민들이 부지런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삭막한 곳을 전전하며 지냈더니 우르르 지나다니는 행인들이 새삼 신기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라도 있지 않을까 내심 불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슬슬 지루해지려고 할 때 아리스의 귀에 시끄러운 경적이 들려왔다.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머리를 간신히 가지런하게 만들어 낮게 묶은 미레아가 사이드카가 딸린 바이크를 끌고 나타났다.
“야, 타!”
미레아는 아리스에게 헬멧과 고글을 던져 주었다. 그리고 자신도 헬멧과 고글을 쓰고는 바이크의 시동을 걸었다. 부타다다 거리며 엔진이 돌아갔다.
“우리 집이 멀지는 않아도 걸을 만한 거리는 아니거든. 트램을 타도 되지만, 기왕이면 오붓하게 둘이 가는 쪽이 너도 좋지?”
아리스가 사이드카에 자리를 잡고 앉자 바이크가 순식간에 속도를 올려 달려 나갔다. 북적거리는 큰길을 지나 옆에 난 좁은 길로 빠지니 바다가 나왔다. 세피로스의 집무실에서 봤던 그 바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