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엑?”
미레아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꺾였다. 루데키아스 역시 입을 딱 벌리고 세피로스를 노려봤다.
“전 누군가가 돌봐 줄 필요가 없는데요?! 그리고 제가 여기 계속 있겠다고 결정 난 것도 아니잖습니까!”
“네가 생각할 시간을 달라 그랬잖나. 그동안만이라 해도 여기에 머물러야 할 것 아닌가. 며칠이 되었든 좋으니 얌전히 지내. 그리고 네 옆에 내 사람을 붙여 줘야 할 명분이야 많으니 현실을 받아들여.”
루데키아스가 추가로 항의하기 전에 미레아가 먼저 선수 쳤다.
“저보고 혼자 이 사람을 지키고 있으란 소리예요? 얘가 저를 죽이고 도주하면요?”
어찌 보면 엉뚱한 소리처럼 들리나 제삼자의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생각하자면 제법 가능성 큰 지적이었다. 하지만 당사자를 바로 앞에 두고 그런 질문을 하니 루데키아스는 당황했다. 그리고 사실 루데키아스는 그 부분보다 다 큰 외간 남녀 둘이 한집에 지내는 쪽이 더 불만이었다. 그는 생각보다 고지식한 가치관의 소유자였다.
“그럼 번견 자격 없는 거니까 그냥 죽어. 난 쓸모없는 번견은 필요 없다.”
놀랄 만큼 냉정한 세피로스의 말에 미레아는 흐느껴 우는 시늉을 했다.
“번견 서러워 죽겠네.”
“……안 죽여.”
루데키아스는 변명을 입안에서 웅얼거렸다. 미레아가 제대로 들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세피로스는 귀찮다는 듯 미레아에게 손을 휘적거렸다. 루데키아스를 대할 때와는 사뭇 엉성한 분위기였다.
“아무튼, 그리되었으니 기숙 아파트는 포기해.”
“에에이…….”
“미레아 제인스터.”
“네.”
“까라면 까.”
“…….”
미레아는 입술을 한 댓 발 내밀었다.
“대답.”
“네.”
“좋아. 내 용건은 이것으로 끝이니 둘이 가서 볼일 봐. 라케드에게 가면 루데키아스가 지낼 집 열쇠를 줄 거다. 루데키아스는 당분간 쉬면서 천천히 생각해 보아라. 아무래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나.”
빠르게 축객령이 내렸다. 미레아와 루데키아스는 서로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다 세피로스에게 묵례를 하고 집무실을 나섰다. 하지만 집무실의 문고리를 돌리기도 전에 미레아가 다시 뒤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아니, 근데.”
“왜?”
미레아는 세피로스를 불퉁한 표정으로 보다가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그리고 잠깐 말이 없는 것 같더니 루데키아스에게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파니드라우 대공자 전하, 밖에서 아주 잠깐만 기다려 줄 수 있을까요? 세피로스 회장과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런데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루데키아스는 미레아와 세피로스를 번갈아 보고 말했다. 둘 사이에는 제삼자가 끼어들 수 없는 그들만의 불편한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루데키아스는 한쪽 눈썹을 위로 올리며 말했다.
“기다리는 건 상관없지만 그사이 내가 도망가면 어쩌려고 이러시나.”
세피로스가 입술을 당겨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해 보고 싶으면 해 보라는 태도였다.
“다시 찾을 때 저 없을지도 몰라요.”
반쯤 진담이 섞인 루데키아스의 말에 세피로스는 대답 대신 손을 휘휘 내저었다. 문이 닫히며 찰칵거리는 소리를 내자 미레아가 따지듯 말했다.
“솔직히 지금 세피로스 속셈이 너무 뻔하지 않아요?”
“속셈?”
“기숙 아파트에서 쫓겨나자마자 타이밍 좋게 기다렸다는 듯이 이런 일이나 주니까 그렇죠. 지금 미리 짜고 저한테 이러는 거 아니에요?”
“맞아.”
세피로스는 선선히 시인했다. 미레아는 울화통을 터트렸다.
“그럼 지금은 그렇다 치는데, 이다음은 어떡하실 건데요?”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세피로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되물었다.
“그건 내가 네게 해야 하는 질문 같군. 너야말로 이다음에 어떡할 계획이지?”
미레아는 머뭇거리다 눈을 내리깔았다.
“기숙 아파트에 들어갈 수 없으면 다른 집을 구해야죠.”
“그래, 그렇다면 그렇게 해.”
세피로스가 깔끔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미레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뾰족하게 말했다.
“설마 다른 집도 이번처럼…….”
“아무리 나라 그래도 그건 힘들지.”
세피로스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나는 네 고집을 꺾을 자신이 없으니까.”
미레아는 짧게 하, 하고 웃더니 못마땅하다는 듯 입술을 잘근거리며 씹었다. 세피로스는 온화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미레아 제인스터. 이 이상 과거로부터 도망치는 것은 그만둬. 그 집을 그 상태로 버려두는 건 너와 우리의 과거에 대한 예의가 아니야.”
그 말에 미레아의 얼굴이 굳었다. 그 표정을 본 세피로스는 작게 한숨 쉬었다.
“그곳이 싫다면 우리 집으로 들어오든가. 좁아터진 기숙 아파트에서 혼자 틀어박혀 있지 말고.”
세피로스의 말을 묵묵히 듣던 미레아는 입술을 꾹 맞다물었다가 어렵기 운을 뗐다.
“저는 도망친 게 아니에요. 세피로스의 말대로 제가 과거로부터 도망쳤다면 여기 있지도 않았겠죠. 제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건 단지…….”
“단지, 뭐.”
“혼자 살기 너무 넓어요.”
상당히 중의적인 표현이었지만 세피로스는 그 안에 담긴 뜻을 전부 이해했다.
“아직 저 혼자 그 큰 집을 감당할 수 없어요. 아무튼, 그러니까 시간을 더 주면…….”
거기까지 말한 미레아가 별안간 우뚝 굳더니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생각에 잠겼다. 세피로스는 별안간 혼자서 생각에 잠긴 상대방을 의아하게 봤다. 잠시 눈동자를 굴리던 미레아가 갑자기 손바닥을 부딪치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 그러면 되겠다!”
미레아는 상쾌하단 듯 세피로스에게 웃으며 물었다.
“저 하나만 허락해 주세요.”
세피로스는 일단 거절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미레아의 뒤이은 말은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그거 허락해 주면 집에 돌아갈게요.”
* * *
집무실을 나온 루데키아스가 마주친 것은 백금색의 머리를 길게 기르고 초콜릿색 피부를 가진 여인이었다. 그녀는 일부러 기다리고 있던 것인지 벽에 기대고 서 있다가 루데키아스를 보고 금색 눈동자를 반짝였다.
“안녕.”
여자는 생글거리며 인사말을 건넸다. 하지만 루데키아스는 상대방을 빤히 응시하며 물었다.
“당신에게서 신성력이 느껴져. 서리 교단의 신녀지?”
“맞아. 역시 잘도 알아맞히네.”
리비엘로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내 이름은 ‘리비엘로 람’. 만나서 반가워, 루데키아스 레민나 류 파니드라우.”
루데키아스는 리비엘로가 인사를 하며 내민 손을 한번 힐끔 보기만 했을 뿐 무시했다. 리비엘로는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거두었다.
“우리 측 못난이들이 당신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는 전해 들었어. 내가 말단 신녀에 불과해 화가 풀릴 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대신 사과할게.”
“생각보다 내 행적에 대한 소문이 빠르군.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 정도는 그다지 비밀도 아닌가 봐?”
“그렇지 않아. 네 신변에 관한 내용을 아는 사람은 협회 내에서도 몇 사람 되지 않아. 나는 거기 운 좋게 들어갔을 뿐.”
“어차피 서리 교단 쪽이 내 행방을 알고 있는 것쯤은 고려했지만 이렇게 신녀를 붙여 둘 줄은 몰랐는걸.”
“음, 내가 서리 여신의 신녀이긴 하지만 난 교단 측 의사와 상관없이 여기 있어.”
“무슨 의미지?”
“너처럼 나도 교단 쪽에서 미움 받는 처지거든. 나도 그쪽을 썩 좋아하지는 않고. 하지만 나는 그들과 다르다, 고 주장하고 싶다는 의미는 아니야. 그저 이해관계가 서리 교단보다는 세피로스 회장과 더 잘 맞아떨어졌을 뿐이지. 내가 서리 여신을 섬기는 몸이란 건 변함없어.”
“그렇다 해도 이상한걸. 신녀라면 서리 여신이 나에게 내린 속삭임을 알 텐데.”
그 말에 리비엘로는 의미 모를 미소를 지었다.
“어머나, 루데키아스. 서리 여신은 당신을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게 아니야. 그러니 서리 여신의 뜻에 따르는 내가 당신을 싫어하거나 미워할 리 없잖아.”
그 말에 루데키아스가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그렇게 한참을 웃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래. 올해 들은 우스갯소리 중에 가장 재미있는 소리였어.”
리비엘로는 여전히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서운하다는 기색을 내비쳤다.
“정말인데. 뭣하면 나랑 내기해 볼래?”
“대체 무슨 꿍꿍이로 내게 접근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당신과 친하게 지내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어.”
“꿍꿍이라니. 앞으로 자주 볼 사이인데 그때마다 서로 얼굴 붉힐 필요는 없잖아.”
“그렇게 자주 볼 것 같지 않은데.”
“어머나, 내 말은 정말 하나도 안 믿으려고 그러는구나?”
“당연한 거 아니야? 지금까지 나를 죽이겠다고 덤벼든 성기사가 몇 명이었는지 까먹을 정도인데. 서리 여신이 정말로 나를 싫어하지 않다면, 그 대단하신 48대 성녀님께서 서리 여신 가라사대 쟤가 종말을 가져올 것이지만 그래도 서로 사이좋게 지내라는 말까지 덧붙였으면 내 인생이 조금은 평탄하지 않았을까?”
적의로 가득 찬 목소리에 리비엘로는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그러게. 왜 그러지 않았나 몰라.”
루데키아스는 리비엘로가 기댔던 벽에 자신도 팔짱을 끼고 기대섰다. 둘 사이에 어색하기 그지없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혹시 내게 다른 볼일이 더 있어?”
리비엘로는 능청스럽게 고개를 살짝 저었다.
“나는 친구 기다리는 중이야.”
“친구?”
“지금 회장님 집무실 안에 있는 사람 말이야.”
“미레아 제인스터?”
루데키아스는 리비엘로를 살짝 돌아봤다.
“말 나온 김에 묻자. 쟨 뭐야?”
“뭐냐니. 무얼 묻고 싶은 건지 모르겠는걸.”
뜻밖의 질문에 리비엘로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루데키아스는 뚱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뭐라도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