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16화 (16/257)

16화.

“제시한 것 중 가장 현실적이고 호불호가 적으며 객관적인 지표로 가치를 환산하기 좋네요.”

루데키아스는 조금 빈정거렸다.

“지금까지 말씀하신 것들이 무리 없이 실현되려면 전제 조건이 전부 황제의 목을 친다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 같은 건 제 착각인가요?”

“네 말대로 무리 없이, ‘쉽게’ 하려면 그렇게 되는군.”

“그런데 황제의 목을 치라는 것이 아니고 치고 싶으면 기회를 마련해 주겠다는 것을 보니 진짜 부탁하고 싶은 것은 그게 아닌가 보네요.”

루데키아스는 과자를 하나 더 입에 넣었다.

“그래서, 정말로 제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뭔지 슬슬 말해 주시면 안 될까요?”

세피로스는 찻잔을 깨끗하게 비운 다음 여전히 평온한 태도로 답했다.

“내가 내건 것들에 비하면 그리 거창한 부탁까지는 아니다. 지금은 마수들 때문에 암흑 지대로 변한 클라인 지역으로 가서 마검 페니드란을 회수해 오거라.”

세피로스의 말에 과자를 우물거리던 움직임이 멈췄다. 루데키아스는 입안의 것을 목 안으로 밀어 넘기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황제가 페니드란을 회수하겠다 그랬다면서요.”

“그래.”

“저는 그거 말리라고 저를 부른 줄 알았는데요.”

“황제보다 먼저 가서 회수해 와.”

루데키아스는 천장을 한번 올려다보았다가 다시 세피로스를 보고 무례하게 삿대질을 했다.

“아까 제가 분명히 그거 회수하면 어떤 꼴 날지 안 봐도 뻔하다고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요.”

하지만 세피로스는 작게 웃으며 되물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데?”

루데키아스는 굳이 그걸 자신의 입으로 설명해야 하는지 정말로 의문이 들었기 때문에 바보 같은 기분이었다.

“마수들 우글우글한 지역 한가운데에 제 마력 박박 긁어모아서 만든 마검을 땅에 박아 놓은 덕에 영소 고갈이 일어나지 않았고 땅이 그 이상 부식되는 것도 막은 상태로 겨우 유지되고 있잖습니까. 그런데 그걸 뽑아 봐요. 빨아먹을 영소가 없어졌는데 배고픈 마수들이 다른 땅 찾아 뛰쳐나오겠죠.”

“그럴 가능성이 크긴 하지.”

“그리고 그 땅은 이미 오염되었기 때문에 마검이 없으면 부식이 진행될 수밖에 없어요. 그나마 땅을 살릴 기회도 놓친다고요.”

마검 페니드란.

그것은 아리스가 5년 전까지 사용하던 검이었다. 그에게는 처음 잡아 본 진검이기도 했다. 페니드란이 원래부터 마검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원래 최고의 장인이 만들었단 점만 제외하면 다분히 평범한 검이었지만 주인이 데르카이드란 점이 검을 평범하지 않게 만들었다. 아리스가 검을 사용하면서 검기에 검이 감응되는 동안 아리스의 마력 역시 함께 흡수했다. 사실 그것은 아리스가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사용하다 보니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페니드란은 그렇게 마검이란 수식어가 붙게 되었다. 마검 페니드란은 마력을 내뿜어 사용자가 다른 마법을 부리지 않아도 검이 스스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고 마치 마석처럼 주인의 마력을 증폭시켰다.

하지만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페니드란은 자신의 주인에게 충성심이 강한 검이었고 아무에게나 자신의 힘을 빌려주지 않았다. 사람들은 루데키아스가 사용하던 검이라는 것만으로 그것을 꺼림칙하게 여겼다.

그런 마검 페니드란은 마수가 모여든 클라인 지역을 봉인하기 충분한 힘이 있었다.

“사람들은 반대로 생각해. 마검이 마수들이 모여 있는 땅을 봉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검 때문에 마수가 모여들었다고 생각하지. 그러니 검을 회수하고, 마수를 토벌하고, 국토를 되찾는다. 그게 황제의 목적이다.”

세피로스의 말대로 루아드 제국 사람들은 그런 이유로 루데키아스를 싫어했다.

“그거 미친 짓이라고 제가 말했잖습니까. 세피로스 님도 성공하지 못할 거로 생각한다면서요.”

“그자는 믿는 구석이 있으니 강행하는 거야. 텔라인의 대(對)마수부대 정예 요원들과 합동작전을 펼치기로 했다는군.”

루데키아스는 쓰게 웃었다. 텔라인은 오로지 마수 사냥을 위해 뭉친 용병 부대다. 그러니 그들 역시 크든 작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데르카이드에게 썩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 특히, 루데키아스에게 말이다. 그들과는 몇 번의 마찰을 겪은 과거가 있었다.

“저 하나 죽이겠다고 날뛰는 놈들끼리 죽이 잘 맞나 보군요.”

“그렇다 해서 내가 예측한 결과가 달라질 것은 없겠지만.”

“제가 가면 뭐가 달라진답니까?”

“네가 마이련에서 땅이 정화되면서 마수가 소멸한 것을 목격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그때 그 기계가 네게 공개되면 안 됐는데…….”

세피로스가 속으로 미레아를 욕하며 말끝을 흐리자 루데키아스는 당시의 일을 회상했다. 신성력과 마력을 이용해 광범위 결계 술식을 전개하고 마수를 일망타진하는 것뿐만이 아니고 오염된 땅까지 정화하는, 두 눈으로 봤지만, 아직도 믿을 수 없는 신기한 광경을 말이다.

“마력 촉매 신성 어쩌고 그거요?”

“그걸 사용할 생각이지.”

“세피로스 님, 그 마을과 숲은 코딱지만 한 곳이었고요, 마검이 봉인한 지역은 못 해도 그 땅의 수백 배 이상은 된다고요.”

“네 마력을 박박 긁어모아서 만든 마검이 있잖나. 그 마력을 쓰면 증폭되는 신성력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어. 그 지역 전체를 봉인하고 있던 마력이다. 그러니 마력은 충분해.”

그 말에 루데키아스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세피로스가 하는 말의 절반 이상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두통이 올 것 같았다.

“좋아요. 그렇다 칩시다. 그럼 마검이 있는 곳까지 어떻게 가는데요.”

“잘.”

심하게 간단하기 짝이 없는 대답에 짜증이 솟구쳤다.

“대체 작전이란 게 있기는 합니까?”

“자네가 합류했으니 지금부터 세워 보도록 하지. 말했잖아. 더 천천히 불러들일 계획이었는데 앞당겼다고. 덕분에 작전을 세울 시간이 없었다.”

“저 아직 하겠단 소리 안 했는데요.”

“내키지 않는다면 거절해도 좋다.”

루데키아스는 의심 가득한 얼굴로 되물었다.

“정말요?”

“나는 상관이 없는데 네가 아쉽겠지. 세계를 구한 영웅이 되지는 못해도 종말을 가져올 것이란 속삭임을 덮을 수는 있지 않겠나. 루아드 황실에서 그 사실을 아는 자는 황제를 제외한다면 네가 전부 죽였고, 서리 교단의 입막음을 할 수 있는 것은 나밖에 없으니 이 일만 잘 풀리면 네 소원대로 귀찮은 일에 휘말리지는 않겠지. 물론 그 밖에 속삭임을 알고 있는 자들이 몇몇 있긴 하지만 그들은 지금 신경 쓸 필요 없다. 일이 마무리되면 내가 준 돈이나 들고 인적 없고 경치 좋은 곳에서 여생이나 즐기라고.”

“하…….”

세피로스의 말에 자신이 혹하고 있다는 사실에 루데키아스는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바로 대답하지 않고 눈을 가늘게 뜨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세피로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피식 웃었고 그 반응에 루데키아스는 자존심이 더 상했다. 그때, 누군가 집무실 문을 노크했다. 세피로스는 그 소리만 듣고도 누구인지 짐작이 가 바로 대답했다.

“들어와.”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상대방은 성미 급하게 문을 반쯤 열고 있었다.

“제가 기숙 아파트에서 쫓겨났는데요!”

그러면서 인사도 없이 대뜸 하는 소리가 자신이 쫓겨났다며 항의하는 내용이었다. 세피로스는 그다음 이어질 말의 내용은 안 들어도 될 것 같아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잘랐다.

“안 돼.”

“왜요?”

“원칙이 그러한데 안 되는 게 당연하잖아?”

“그 원칙에 예외를 달라고 이렇게 온 거잖아요.”

“그러니까 안 돼.”

“그러니까 왜요?”

“원칙이라 그랬잖나.”

세피로스와 입씨름 중인 상대방은 씻은 후 제대로 말리지도 않았는지 머리카락에선 아직도 물이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숱이 많은 데다 곱슬머리이기까지 해서 말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텐데 드라이기로 뜨거운 바람을 쐬지도 않고 수건으로만 대충 말린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그 원칙 신나게 무시하면서 다녔는데 한 번만 더 그러면 어디가 덧나요?”

“기숙 아파트 자리가 부족해서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미레아는 거추장스러운 붉은 머리카락을 이마 위로 쓸어 넘기며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다 루데키아스와 눈이 마주쳤다. 상관에게 허물없이 대하다 못해 막말하는 것은 둘째 치고 정복은커녕 사복 위에 활동복 재킷만 대충 걸쳤지, 머리카락은 제대로 말리지도 않았지, 옆에 자기가 있는 건 신경 쓰지도 않지. 루데키아스는 미레아의 꼴을 보고 있자니 기가 막혔다.

미레아는 자기 할 말만 하기 바빠서 루데키아스를 뒤늦게 발견하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어, 너 아직 있었어? 미안, 있는 줄 몰랐다. 뽀송해졌네? 아니, 세피로스도 사람을 부를 거면 좀 나중에 부를 것이지 난 또 둘이 할 얘기는 다 끝난 줄 알았지. 아무튼, 정말 미안. 내가 지금 살던 집에서 쫓겨나 경황이 없어서…….”

거기 있었냐면서 뒤늦게 인사하는 상대방에게 적당한 인사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뽀송해졌다는 말을 또 뭐냔 말이다. 그 표현대로 루데키아스는 세피로스를 만나기 전에 씻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헝클어졌던 긴 머리도 다시 깔끔하게 땋아 단정한 차림으로 나타났지만 왜 똑같이 씻은 상대방 꼴은 침대 위에서 대충 구르다 집 앞 구멍가게에 나온 것 같은 행색이냔 말이다. 사실 미레아는 침대 근처에도 못 가 보고 쫓겨났지만, 루데키아스가 알 리 없었다.

미레아는 루데키아스의 앞에 놓인 찻잔을 보고 그와 표정으로 무언의 대화를 나누었다.

먹었냐?

한 모금.

저런.

미레아가 동정의 눈빛을 보내는 사이 세피로스는 말을 이었다.

“말했잖나. 원칙이 그러하다고. 그리고 네겐 그 방이 필요 없어. 다시 내준다 해도 당분간은 갈 일이 없을걸?”

“네? 또 뭘 시키려고요?”

세피로스는 루데키아스를 턱짓했다.

“당분간 이 녀석 옆에 붙어 있어. 아무래도 혼자 둘 순 없지 않은가. 사저를 하나 내줄 테니 둘이 그곳에서 지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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