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15화 (15/257)

15화.

루데키아스가 두 눈을 홉뜨고 탁자를 쾅 내리쳤다.

“인질이 아니라면서요?”

“상황이 안정될 때까지는 본인의 상황을 당분간 함구해 달라는 그쪽 요청도 있었다.”

“아니, 우리 어머니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제가 모르면 어떡합니까?”

“류은현은 자기 아들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던데.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지. 아들이라는 놈이 2년 전에 잠적해 버렸으니.”

루데키아스는 적당히 대꾸할 만한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어쩔 수 없이 대꾸했다.

“용족의 땅에 계신다니, 어머니의 안전은 보장되었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죠?”

“당분간은.”

“그럼 됐어요.”

루데키아스는 여기서 입을 닦으려다 말을 이었다.

“어머니에 대한 것은 그렇다 치고 그 밖에 제게 무얼 해 주실 건가요?”

“마치 내게 돈이라도 맡겨 둔 것처럼 말하는군.”

세피로스가 당돌한 말에 어이없다는 듯 말했지만, 루데키아스는 당연하다는 듯 검지를 까닥였다.

“지금까지 저를 내버려 두다 뒤늦게 불러들이셨으면 지금은 제 이용 가치가 생겼다는 말이잖아요. 그러면 제게 최소한의 성의 정도는 보이실 거로 생각합니다. 이렇게 다짜고짜 붙잡아서 차로 고문을 한다면 제가 회장님이 원하는 대로 잘도 움직이겠습니다. 협력할지 아닐지 결정은 제 의사 아닌가요. 그러니 거래를 할 거면 확실히 하고 넘어가야죠. 제게 무엇을 해 주실 수 있죠?”

세피로스는 작게 웃었다.

“우선, 서리 교단 쪽 일은 서로 함구하기로 합의를 봤다. 그러니 자네의 신병 문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어.”

“쩨쩨하게 겨우 그런 거 가지고 생색내지 마세요. 어차피 그게 라슈발렌에 이득이니까 당연한 일이잖습니까.”

“본인과 관련된 일이니 궁금해하지 않을까 싶어 말해 준 것이다. 네가 원하는 대로 최소한의 성의 표시를 보이기는 할 거다만, 선택권을 자네에게 넘기면 상황에 따라 협력하지 않을 생각인가?”

“선택권 안 줄 거잖아요. 루아드 황제가 마검 페니드란을 회수하겠다는데 저는 손 놓고 구경이나 하라고 부른 것은 아닐 거 아닙니까. 그러니 거래 조건이라도 들어 놔야죠. 나중에 딴소리 못 하게. 기왕 이용당할 거, 최대한 뜯어먹을 수 있는 만큼 뜯어먹어야 억울하지라도 않지.”

세피로스는 찻잔을 내려놓고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나는 당연히 실패할 것을 예상하지만, 황제가 만약에 마검 페니드란의 회수에 실패한다면 그때야말로 사람들은 예언의 일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하겠지.”

“그렇겠죠.”

“네게 그렇게 달가운 상황은 아닐 거 아닌가.”

“당연하죠.”

“그런 일들을 무마시키는 것만으론 만족하지 못한다는 소리인가?”

“상황이 귀찮아지면 세계라도 멸망시키죠, 뭐. 그럼 귀찮게 구는 사람도 없겠네요. 낮잠 자는 걸 방해할 만한 것도 없을 테고. 말하면서 생각해 보니까 그쪽이 지금보다 더 괜찮은 것 같은데요? 말 나온 김에 여기서 해 볼까요? 예언의 날이 오늘일 수도 있잖아요.”

“이런, 헛소리는 자네가 하는군.”

세피로스가 피식 웃었다. 루데키아스는 별 괴상한 것을 다 본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마치 할 수 있으면 해 보라는 식으로 깔보는 태도인데 오히려 잔뜩 삐뚤어졌던 마음이 조금 풀렸다.

세피로스는 루데키아스에게 내린 예언을 신경 쓰지 않는 사람 중 하나였다. 믿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그가 세계의 안녕을 위해 설립된 단체의 수장인 것을 생각하면 그의 태도는 참으로 이상했다.

“나와 거래를 하겠다면, 좋다. 내가 도울 수 있는 몇 가지 일들이 있지.”

세피로스는 손가락 하나를 꼽았다.

“첫째로 류은현의 안전은 보장하지. 원한다면 그녀와 함께 지낼 수 있도록 해 주겠다. 앞에서 내가 말했지만, 전자는 이미 어느 정도 해결되었지.”

“어머니는 저와 같이 있지 않은 쪽이 좋으실걸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세피로스는 턱을 까닥거렸다.

“그래도 연락 정도는 하는 게 좋을 거야. 중간에서 정보가 새지는 않을 테니 걱정은 말고.”

“상황 봐서요.”

“아무튼, 원래 주제로 돌아오자면 두 번째로 네 신분 세탁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인제 와서 그럴 거면 5년 전에 해 주시지 그랬습니까. 지금 루아드 황제 자리를 꿰차고 앉은 이상 메르티어스가 저를 쉽게 포기할 것 같지는 않은데.”

“아, 마침 거기에 대한 것이 내 세 번째 조건과 연관이 있지. 네 말대로 지금까지는 메르티어스의 간섭 때문에 그게 어려웠지만, 상황이 변할 수 있을 것 같거든.”

세피로스는 가벼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가 메르티어스의 목을 칠 수 있게 만들어 주겠다.”

루데키아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래서 처음엔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눈을 끔벅이다가 서서히 입을 벌렸다.

“……예?”

“최근 멧셈이 루아드에서 독립해 자치권을 되찾으면서 제국주의에 반발한 휘하 식민지국들의 독립 운동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거기에 황실의 혈통이 불안하다 보니 제국 내에서도 왕정 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세우려는 움직임도 있지. 제국은 지금 여러모로 불안정한 상태야. 그 야욕 많은 메르티어스가 가만히 있겠나. 그러니 루아드 국토의 13%가량을 부식시키고 지금도 오염 지역을 확대하고 있는 마검 페니드란을 회수하겠다는 공표를 내서 자신의 지지율을 끌어올 생각에 무리수를 둔 것이다.”

루데키아스는 천천히 머리를 내저었다.

“그게 제가 메르티어스 황제의 목을 치는 것과 무슨 관계가…… 그보다, 페니드란을 회수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안 봐도 뻔한데 굳이 감행하겠다고요?”

“말했잖나. 그는 지금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생각이다. 자신과 같은 파니드라우 황실의 피를 나눈 일족을 모두 죽인 자 아닌가. 그 정도 일을 감행할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자네가 더 잘 알지 않나.”

“정확하게 따지자면 그 황족의 대부분은 제가 베어 죽였지만요.”

루데키아스는 세피로스의 말을 정정해 주며 냉소했다. 그의 말대로 메르티어스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최전방에 서서 황실 혈족의 목을 차례대로 날려버린 것이 15살의 자신이었다. 루데키아스가 흑익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도 그즈음이었다. 고작 15살의 나이에 혈족의 피를 뒤집어쓰고 백부를 황제로 만든 사상 최악의 데르카이드 흑익.

종말을 가져다줄 이에 대한 서리 여신의 속삭임은 교단에서 기밀로 붙여졌지만, 교단과 긴밀한 관계에 있던 루아드 황실은 검은 날개를 가진 데르카이드로 태어난 루데키아스를 치명적인 위험 요소로 간주했다.

선대 황제가 루데키아스의 목숨을 요구했을 때 차선책이란 것을 생각할 수 없었다. 당장 자신과 식구들의 목숨이 위험했기 때문이었다. 그 과정에서 루데키아스의 사촌 동생이 희생되었다. 피를 나누었지만, 사촌 동생을 권력의 희생자로 만든 혈족이 증오스러웠기 때문에 루데키아스는 메르티어스의 편에 섰다. 메르티어스를 황제로 추대하여 반란을 주도했던 것은 메르티어스의 쌍둥이 동생인 마라피네스, 루데키아스의 아버지였다.

평소 야욕이 있었지만, 세력이 크지 않았던 메르티어스는 반란을 일으키며 자식이 권력에 희생당했다는 명분이 생겼다. 그에 맞춰 마라피네스는 거창한 야망보다 그들의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

그렇기 때문에 마라피네스는 그 이상의 욕심을 내지 않고 황제의 관을 메르티어스에게 넘길 수 있었다. 직접 황제가 되는 것보다 메르티어스의 권력욕을 채워 주면서 그의 밑에 있는 쪽이 더 안전하리라 판단했다.

그렇게 메르티어스는 루아드 제국의 황제가 되었고, 마라피네스는 대공이 되어 클라인의 영지를 하사받았다. 루데키아스는 자연스럽게 대공자가 되었다.

하지만 메르티어스는 황제가 된 후 마라피네스를 죽였다. 루데키아스 역시 죽이려 했다. 선대 황제처럼 그가 서리 여신의 속삭임을 받은 흑익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새 황제는 불안 요소를 전부 없애고 싶어 했다.

마라피네스는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한 형제에게 배신당했다.

“메르티어스는 겁쟁이예요. 황제가 되기 전에 피 묻히는 일은 전부 제게 떠넘기고 고귀한 척했지만 정작 황제의 관을 쓰니 어떻던가요? 무서우니까 자신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던 동생도 죽여 버렸잖아요. 그리고 그의 검이 되어 준 저도 죽이려 그랬고요. 메르티어스가 황제가 된 지 10년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이런 꼴이면 그 정도 그릇밖에 되지 않았단 소리죠.”

루데키아스는 세피로스가 권했던 과자를 집어 입에 넣었다. 구미가 당겼던 것은 아니다. 그저 입안이 썼기 때문에 다디단 것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역시 잘못된 선택을 하셨던 것이지요.”

“페니드란을 회수하겠단 것도 같은 맥락일세. 흑익의 힘으로 황제가 된 것도 반발하는 세력을 전부 죽여서 공포정치를 하던 것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고. 그 오명을 벗겠다면서 너를 없애려 했지만, 그마저도 실패했으니.”

“그래서 저보고 복수라도 하라는 소리세요?”

“네 말대로 전부 귀찮아서 세상을 멸망시킬 바에 황제의 목을 치는 쪽이 덜 번거롭지 않겠나.”

루데키아스는 코웃음을 쳤다.

“그러면 새로운 녀석이 저를 죽이겠다며 또 덤비겠지요. 기왕이면 하는 김에 일망타진해야지, 내버려 두면 두 배는 더 번거롭다고요.”

“루데키아스, 제국은 조만간 그 운명을 다한다. 공화정이 들어서고 새로운 국가가 되겠지.”

“혁명군과 손이라도 잡으란 소리인가요?”

“그건 아니지만, 복수를 원한다면 손쉬운 기회를 줄 수 있다는 소리다.”

“이 이상 정치 싸움에 휘말리는 건 딱 질색인데.”

루데키아스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말을 이었다.

“아니, 굳이 그런 기회가 있다면 마다하지는 않겠는데 일단 보류하고…… 그보다 사람 목을 치느니 마느니 하는 소리를 그렇게 쉽게 해도 돼요? 라슈발렌 회장이란 사람이?”

세피로스는 차를 한잔 더 따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목표는 이 세계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니 그것에 반하는 것은 해결해야 하지 않겠나. 물론, 죽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겠지만 지금 다른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니.”

인간미라고는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그 담담한 태도에 루데키아스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현재 이 세계의 불균형을 담당하는 가장 큰 축은 그 누구도 아니고 바로 루데키아스였다. 그런데 대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기에 이런 식으로 놔두고 있는지 도통 속을 알 수 없으니 더 무서웠다.

“그리고 큰 금액은 아니지만, 네가 사는 데 지장 없을 정도의 재산 정도는 마련해 줄 수 있지. 평생 거취와 생활에 문제없을 정도로 도움을 주겠네.”

그러니까 돈을 대 주겠단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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