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원래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이었다. 이 세계는 탄생과 함께 종말을 향하고 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인간이 탄생과 함께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이 세계가 망하는 건 원인이야 어쨌든 특정한 누구의 잘못이라 할 수 없다고 루데키아스는 생각했다.
그리 생각하자니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그도 그럴게, 사람들이 말하길 이 세계의 종말은 원인이 따로 있다고 한다. 그러니 그 원인을 잡아 없애면 종말이 비껴 갈 것이라 사람들은 굳게 믿고 있었다.
당장 세계가 망한다는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러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말하는 그 종말의 원인이 바로 루데키아스라고 하니 본인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그런 짓을 해 봤자 루데키아스가 얻는 이익도 없는데 무엇 하러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게다가 앞서 서술했듯, 이 세계는 애초에 망하고 있었다. 현 상황에서 낙관적으로 생각할 수는 있지만 언젠가는 끝이 있을 세계다. 그게 지금이든 아니면 훗날이 되었든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망하고 있는데 거기에 굳이 손을 보탤 필요가 있냐는 말이다.
그러니 억울해 죽을 수밖에.
루데키아스 레민나 류 파니드라우.
이 세계에 종말을 가져올 사상 최악의 데르카이드, 흑익(黑翼).
지금은 그런 수식어 따위가 붙어 버렸지만, 원래의 루데키아스는 세계의 종말을 고하기는커녕 머리 아프고 귀찮은 일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게 아리스가 대충 15살쯤 했던 생각이었다.
* * *
아리스는 결코 호의적인 의미라고는 할 수 없는 미소를 머금고 세피로스를 올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어 말했다.
“루아드 제국 황제가 미친 짓을 한다기에 궁금해서 와 보긴 했는데…….”
제법 나긋나긋한 목소리였다.
“뭐, 그것과는 별개로 솔직히 왜 저를 찾았는지는 모르겠네요. 붙잡아서 감시하겠다 했으면 그건 얼마든지 예상한 일이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내용까지 나긋나긋하진 않았다. 인사를 바란 것이 아니었어도 상당히 무례한 언사였지만 세피로스는 화를 내기는커녕 쿡쿡거리며 웃었다.
“많이 컸구나, 루데키아스.”
그리 말하며 세피로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깨 위에서 길이를 친 은발 머리가 햇살을 받아 우아하게 빛났다. 그의 호박색 눈과 같은 빛의 용주가 이마에서 반짝였다. 300살가량이면 용들 사이에선 어린 축이지만 세피로스가 라슈발렌 협회 회장 자리에 앉은 지 벌써 10년이 지났다.
“5년만인가?”
“벌써 그렇게 되었던가요.”
아리스, 정확하게는 루데키아스는 자신의 앞에 다가온 키가 큰 용에게 비뚜름하게 미소 지어 보였다. 세피로스는 그 특유의 분위기가 있어서 어지간한 사람들이라면 한풀 꺾이기 마련인데 루데키아스는 그와 독대를 하는데도 주눅 들지 않았다.
세피로스의 기억에 의하면 예전부터 그런 녀석이긴 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주변 환경이 바뀌다 보니 다소 냉소적으로 변했어도 어디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누구를 대하여도 반듯했던 그 천성은 남아 있었다.
“사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너를 시간을 좀 더 두고 천천히 불러들이고 싶었다. 어차피 네가 틀어박혀 있던 곳은 전부터 알고 있었거든. 그런데 서리 교단 움직임이 수상쩍지 뭔가. 이쪽도 눈속임용 미끼로 물자를 동시다발적으로 풀면서 그중 하나를 의심스럽지 않게 교단의 물자에 붙여 보내느라 고생 좀 했다.”
“나를 사냥하려 했단 그놈들은 본교 소속 기사단도 아닌데 굳이 그렇게까지 물밑 작업을 할 만한 상대는 아니었다고 봅니다.”
“네가 어떻게 나올지 예상 가기도 했고 이쪽도 보는 눈이 많아서. 그리고 헛수고는 아니었지 않나. 그러면 됐지.”
세피로스가 적당히 햇살이 내리쬐는 응접탁자로 직접 안내하며 루데키아스에게 앉으라고 손짓을 했다. 루데키아스는 세피로스에게 시선을 떼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보다 조금 허탈한 시선으로 세피로스가 자리를 권한 의자를 바라보았다.
지금이라도 튈까?
루데키아스는 자신의 뒤통수 쪽에 있는 출입문으로 신경을 옮겼다. 아니다. 문은 너무 정면인 것 같다. 그렇다면 창문? 높은 천장을 따라 길게 난 커다란 창문은 깨트리면 아주 예쁘게 깨질 것 같았다. 깨지는 소리도 시원하겠지.
창문 밖으로는 짙푸른 바다가 있었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루데키아스가 단순히 풍경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세피로스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웃었다.
루데키아스는 어쩔 수 없이 미적거리면서 의자에 앉았다. 맞은편에 앉은 세피로스는 마법으로 주전자의 물을 데웠다. 그리고 찻잎을 우리며 함께 내온 과일 말랭이와 과자도 들라고 루데키아스의 앞으로 접시를 밀어 주었다. 루데키아스는 그 비언어적인 소통을 거부하고 삐딱하게 말했다.
“주변에 차 끓여 줄 사람도 없나요? 회장씩이나 돼서 차를 직접 우려요?”
그 하찮은 반항에 세피로스는 피식 웃었다. 참으로 귀엽기 그지없었다.
“애석하게도 내 입맛에 맞게 차를 우릴 줄 아는 녀석이 협회에 없어.”
세피로스는 우아한 동작으로 차를 따라 루데키아스의 앞에 놨다.
“네 입에도 맞았으면 좋겠군.”
그리 말하니 루데키아스는 얼마나 대단하신 입맛인가 싶어 한 모금 입을 축였다. 그리고 토할 뻔했다. 찻물을 입 밖으로 뿜지 않게 반사적으로 입을 틀어막은 바람에 찻물이 코로 역류했다.
“음, 이번에야말로 취향이 비슷한 사람을 만나지 않을까 싶어 조금 기대했는데…….”
세피로스는 고통 속에서 코를 훌쩍이는 루데키아스를 보며 여상히 말했다.
“자네 입맛에도 별로인가 보군. 나 이외에 이 차를 좋아하는 사람을 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격한 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나도 상처란 걸 받는단 말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몫을 잔에 따라 홀짝이기 시작했다. 루데키아스는 일부러 괴롭히려고 그런 것이 아니고서야 저딴 걸 차라고 홀짝이는 쪽 혀가 어떻게 된 거라고 주장하고 싶었다. 용들의 입맛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유별난가 싶었지만 하는 말을 들어 보니 같은 용들에게서도 외면 받는 맛인 것이 분명했다.
루데키아스는 세피로스가 차를 우리기 위해 마법으로 끓여 놓은 물을 다시 마법으로 차게 식혀 들이켰다. 덕분에 좀 진정이 되자 역시 창문을 깨고 튀자 마음먹었다.
“어린 인간은 역시 단 걸 좋아하나?”
그리 말하며 다른 찻잎 통을 만지작거리면서 무언가를 더 제조하려는 세피로스를 루데키아스가 가로막았다.
“앞으로 당신이 주는 건 아무것도 안 마시고, 안 먹을 거니까 쓸데없는 짓 하지 마세요. 그리고 단 걸 좋아할 정도로 어리지도 않고요.”
“자네가 지금 몇 살이지?”
“22살입니…… 젠장.”
300살 먹은 용은 호박색 눈동자가 눈꺼풀에 반쯤 가려지게 웃으며 갓 태어난 새끼용을 바라보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 어린 친구. 어리다는 소리는 들을 수 있을 때 많이 들어 두는 게 좋지. 그리고 22살이면 인간 나이로도 어린 것이 맞다. 정신연령과 관계없이 말이지.”
세피로스는 아까 루데키아스가 눈길도 주지 않던 과자를 다시 들이밀었다.
“내 주변의 어린 인간들…… 그러니까, 네 또래 비슷한 인간들이 대부분 단 걸 좋아하는 것도 사실이지. 물론 내 지인들 한정이기는 하나. 나는 단 과자를 좋아하는 것은 부끄러운 취향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걸 왜 부끄럽다고 생각하는지 이해가 잘 안 되는군.”
그건 당신의 입맛으로 봤을 때 맛에 대한 취향 존중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기 때문이라는 말이 루데키아스의 목구멍 바로 위까지 올라왔다 다시 내려갔다.
“제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물어보려고 여기까지 부른 것이 아니잖아요? 이제 본론으로 넘어가면 안 될까요. 슬슬 제 인내심이 바닥나려 하는데요.”
“루데키아스.”
“…….”
세피로스의 부름에 그는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5년 동안 너를 잡을 수 없어서 손 놓고 있었던 것이 아니야.”
“압니다.”
“그러니 도망칠 생각은 처음부터 안 하는 쪽이 정신 건강에 좋을 거다.”
루데키아스는 작게 혀를 찼지만, 창문에서 시선을 거두지는 않았다.
“……그런 생각 중인 것은 아닌데요.”
루데키아스는 수면 위에 잘게 부서지는 햇살을 보며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늘도 구름 한 점 없이 파랗고, 바다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선명한 에메랄드 빛이었다. 그 어떤 사진이나 그림도 이 풍경을 그대로 옮기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몇 년 동안 부식 중인 땅만 보다 이런 곳을 보니 낯설어서요. 로아메나 대륙으로 돌아오니 좋은 점이 한 가지 있기는 있군요. 마이련은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는데 적도를 넘어왔더니 여기는 다시 따듯한 봄이니 말이에요. 봄 바다가 이렇게까지 예쁘다는 것을 잊고 있었거든요.”
그 말에 세피로스도 창밖으로 시선을 한번 던지고는 차를 들이켰다.
“자네 말이 맞아. 록산의 바다는 내가 본 바다 중에 가장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지. 나도 이곳의 바다를 좋아해.”
“5년 전에 피해를 거의 안 받았나 봐요.”
루데키아스의 말에 세피로스는 빙그레 웃었다.
“그래. 다행히도 말이지. 그래도 5년 전에는 이곳도 앞날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했다. 이 지역은 마수의 공격에 거의 직격타를 받았으니 말일세.”
세피로스가 창밖을 보며 턱짓을 한 작은 산은 우측 절반이 사라진 상태 그대로였다.
“운이 좋았어.”
“…….”
“죄책감을 느끼라고 한 말은 아닐세. 그냥 그랬다는 말이지.”
“저도 그런 거 아니에요.”
세피로스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바다 구경을 충분히 했으면 원하는 대로 슬슬 본론으로 돌아가도록 하지.”
“저는 아무것도 안 할 거예요.”
루데키아스는 소파에 등을 깊숙이 기대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내가 무슨 얘기를 할 줄 알고 벌써 안 한다 그러나?”
“뻔하잖아요. 황제를 말려라. 아니면 황제를 막아라.”
“둘 다 아닌데.”
“그래요? 그래도 뭐가 되었든 안 해요. 저는 지금 만사가 다 귀찮거든요.”
“아, 그래?”
세피로스는 찻잔을 내려다 놓고 말했다.
“류은현이 안부를 전해 달라던데.”
그 말에 루데키아스의 목소리가 절로 꺾였다.
“네?! 제 어머니요?!”
“그래.”
“어머니를 만났어요?”
“만났다기보단, 류은현은 지금 용족의 땅에 의탁하고 있다네.”
“어쩌다가요? 어머니가 왜 당신 쪽에 있어요?!”
“인질 같은 것은 아니니 그렇게 보지 말고. 네가 반년 동안 마이련의 촌구석에 처박혀 있는 사이 류가의 세진 땅이 오염과 부식이 급속도로 진행되어서 땅을 포기해야 했다. 그렇게 된 김에 내 쪽에서 새 거처를 제공하여 그리되었지.”
그 말에 루데키아스는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올렸다.
“그렇다면 지금 정확하게 어디 계시는데요?”
“그냥은 안 알려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