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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따라 종말까지-13화 (13/257)

13화.

미레아가 머쓱한 얼굴로 머리카락을 뱅글뱅글 꼬았다. 리비엘로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자신의 친우를 한심하게 바라봤다.

“너 그거 지금까지 세피로스 님의 권력을 너무 당연하다는 듯 남용한 벌이야.”

“지금 당장 회장 집무실로 쳐들어가서 떼쓰면서 드러누우면 해결해 주려나.”

“그렇지 않아도 너 찾던데? 일이 있어서 잠깐 본부 건물 들렀었는데 나한테 파울로가 네 행방을 묻더라고. 세피로스 님이 부르니까 귀환하면 바로 집무실로 오라고 전하라 그랬는데 전달이 안 된 상태로 길이 엇갈렸나 봐.”

“아, 그래?”

세피로스를 만날 수 있는 빌미를 궁리할 필요가 없어진 덕에 미레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세피로스 님이 이런 일 하나하나 신경 쓸 순 없잖아.”

미레아는 차선책이라도 마련하겠다며 리비엘로의 어깨를 꽉 쥐었다.

“너희 집에 방 하나 안 남냐.”

“우리 신전에 의탁하고 싶은 거면 개종해.”

“난 종교에 얽매이는 건 별로라…….”

미레아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렇게 기숙 아파트에 남고 싶으면 입주 조건에 맞게 상황을 바꿔 봐. 대체 바뀐 기숙 아파트 조항이 뭔데 네가 열외가 된 거야?”

리비엘로의 물음에 미레아는 어물거리다 입을 열었다.

“록산 내에 자기 명의의 집이 있는 사람이 제외 대상 1순위…….”

“…….”

“그렇다고 내가 우리 집을 팔순…….”

없겠지. 리비엘로는 점점 흐려지는 미레아의 뒷말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이마를 짚었다.

“미레아, 이왕 이렇게 된 거…….”

리비엘로가 운을 떼기가 무섭게 미레아가 그녀의 입을 막으며 선수 쳤다.

“사랑하는 내 친구, 리비엘로 람.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은데, 내가 너를 사랑하는 만큼 너도 나를 사랑한다면 그 이상은 말하지 말아 주었으면 해.”

단호한 대답에 리비엘로는 눈썹을 늘어트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미레아는 작게 한숨을 쉬며 화제를 바꿨다.

“그나저나 세피로스가 나를 찾는다고? 왜?”

당장 짐을 옮겨 놓을 곳도 마땅치 않다 보니 미레아는 복도에 짐들을 내버려 두고 승강기 앞에 가서 하강 버튼을 눌렀다.

“나는 모르지. 말만 전했을 뿐이야.”

리비엘로도 미레아를 따라 승강기에 올라탔다. 펜스로 된 문이 닫히고 승강기의 톱니가 철컥거리는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그럴 거면 전화를 하지…… 아, 어차피 집 전화는 못 받았겠구나. 세피로스는 지금쯤 아마 루데키아스랑 얘기하고 있을 텐데. 내가 거길 왜 껴?”

리비엘로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게 단순히 말만 전하러 온 분위기는 아니라 미레아는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따라오려고?”

“궁금하잖아. 그 유명한 흑익이라고. 그런 어마어마한 여신의 속삭임을 받은 사람 얼굴 정도는 이번 기회에 실물로 봐 둬야지.”

리비엘로가 입꼬리를 올리며 가볍게 말했으나 그녀의 금색 눈동자는 고요했다. 그 말에 덩달아 미레아의 표정 역시 멋쩍게 굳었다.

“아아…… 난 또 뭐라고. 사람을 너무 구경거리 취급하진 마.”

“나는 그 사람에게 그래도 돼.”

리비엘로의 당당한 태도에 미레아가 힘없이 웃었다.

“그래도.”

“네가 이렇게 그 사람 걱정을 다 하다니, 그사이 친해지기라도 했나 봐.”

“응.”

미레아가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자 리비엘로는 오히려 의심이 짙어진 얼굴로 되물었다.

“정말? 친해졌다고?”

“그러니까…… 요 정도?”

미레아는 엄지와 검지 사이에 종이 한 장이 들어갈 정도로만 살짝 벌려 보였다.

“…….”

“아니, 표정이 왜 그래? 조금이긴 해도 진짜 친해졌다니까? 포옹도 할 정도로 친해졌다고.”

“포옹은 또 언제 한 건데?”

“아, 그렇게 질투하지 마. 나는 우리 리비엘로가 세상에서 제일 좋으니까.”

미레아는 능청스럽게 두 팔을 벌려 리비엘로를 꽉 끌어안았다.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음이 터져 나왔다.

때맞춰 1층에 도착한 승강기에서 땡 하는 경쾌한 종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 * *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 오늘날 마수라고 부르는 괴물들이 갑자기 나타났다. 그것들은 처음에는 단순한 형태로 시작했다. 최초로 발견된 마수는 마치 단세포 생명체 같은 모양이었으며, 크기도 아주 작았기 때문에 그렇게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사람들은 그저 특이하게 생긴 것이 나타났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몇 달 동안 관찰한 바에 따르면 그것들은 토지와 대기에서 내뿜는 자연 상태의 영소를 먹고 자라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영소는 생명체라면 응당 몸에 지닌 혼의 최소 구성단위이다. 자아를 구성하고, 생명체가 생명을 갖게 만드는 힘. 누군가는 영혼이라고도 부르고 누군가는 의지라고도 부르는 힘. 그 때문에 정신계 물질이라 부르기도 한다.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 세계는 영소와 같은 정신계 물질로 가득 차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땅과 대기에 많은 생명이 넘쳐나는 라슈온이란 행성은, 자연의 순환을 만들고 생명의 원천을 제공하는 또 다른 거대한 생명체이니 말이다.

마수들은 고작 몇 년 사이에 영소를 에너지원으로 섭취하며 빠르게 진화했고, 개체 수를 늘렸다. 그렇게 마수는 바다로, 초원으로, 숲으로, 산림으로, 하늘로 퍼져 나갔다.

늘어난 마수들은 자연 상태에 존재하는 소량의 영소만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그들은 순도 높은 영소나 다름없는 살아 숨 쉬는 생명체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었다. 그뿐 아니라 정신계 물질이 고갈된 땅은 오염되고, 결국엔 부식됐다. 생명체가 살기는커녕 다가갈 수도 없는 곳이 되어 버렸다. 마수들이 라슈온이란 행성을 먹어 치우고 있었다.

그렇게 라슈온 행성에 원래부터 살던 이들과 마수와의 사투가 시작되었다. 절망적이었지만 사람들은 그들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싸웠다. 그것이 18년 동안 이어진 마수 대전이었다. 끝없는 살육에 지친 이들에게 18년은 잔혹하게 긴 시간이었다.

하지만 희망이 나타났다. 새하얀 날개가 등에 돋아난 용사가 탄생한 것이었다. 그는 인간의 몸을 하고 있었지만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방대하게 흘러넘치는 마력을 갖고 있었고 몸 밖으로 방출된 마력의 여파는 등 뒤에 하얀 날개를 만들어 내었다. 그는 훗날 ‘최초의 데르카이드 백익(白翼) 니콜라우스’라 불리게 되었다.

니콜라우스를 시작으로 세계 곳곳에 날개가 달린 인간들이 하나, 둘 태어나기 시작했다. 그들 역시 니콜라우스와 마찬가지로 방대한 마력을 지니고 있었고 그 힘은 결코 평범한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니콜라우스는 자신의 힘을 이용하여 날개를 가진 다른 이들과 함께 마수와 대등한 힘으로 사람들의 선두에 서서 싸웠다.

마침내 전쟁은 사그라들었고, 사람들은 자신의 땅을 되찾았다. 마수들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으나 남은 개체들은 이전처럼 이 세계의 것들의 절멸 위기를 당장 가져올 정도의 영향력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으로 사람들은 서리 여신의 가호가 돌아왔다 믿었고 니콜라우스는 자취를 감추었다. 그것이 테나력 2906년의 이야기이다.

그렇게 약 100년. 어느 쪽도 굽히지 않는 아슬아슬한 상태가 이어지고 있었다. 한차례 고비를 넘겼다 해도 양쪽에서 팽팽하게 줄을 당기고 있는 것 같은 상황이었다. 힘의 균형이 깨지는 즉시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져 버리는 그런 위태로운 상태로 사람들은 용케 100년이나 버텼다.

마수와 비슷한 시기에 나타난 날개가 있는 인간, 오늘날 데르카이드라 불리는 존재는 마수 대전에서 큰 공을 세웠지만, 세계의 정세가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되레 사람들에게 불안을 안겨 주었다. 그 이유는 어처구니없게도 데르카이드가 마수를 끌어들이는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영소를 끌어와 다른 물리적인 힘으로 구현시키는 것을 마법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때 소모되는 정신계 물질은 마력이라 한다. 보통 생명체 몸에 있는 마력은 대부분 생명을 유지하는 데 쓰이기 때문에 다른 힘으로 변환시키기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누구나 마력을 갖고 있지만, 누구나 마법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마력을 증폭시키는 촉매, 매개, 보조구가 없으면 인간은 마법을 쓸 수 없다, 라는 것이 100년 전까지 학계의 정설이었다.

하지만 데르카이드는 달랐다. 분명히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그들은 그 어떤 도구도 없이 자유자재로 마력을 다루었으며, 자신의 마력을 마음껏 끌어다 써도 아무런 위험부담이 없었다.

데르카이드가 마법을 쓸 때는 등 뒤로 날개가 돋아난다. 그것이 마력을 사용하는 것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정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지만, 마력을 변환시킬 때 일종의 연쇄작용으로 일어나는 신체 변형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영소로 가득 찬 데르카이드는 마수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자연스럽게 마수를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다. 영소를 먹어 치우는 마수와 마력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데르카이드. 그 둘의 상관관계가 없다고 치기엔 여러모로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았다. 데르카이드를 배척하는 분위기가 조성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100년 동안 세계는 혼란스러웠고, 하루하루가 투쟁이었으며 위태위태한 상태였다. 그런 역사를 되짚어 본 후 루데키아스는 아무래도 이 세상이 망한 것 같다고 결론 내렸다. 당장 망했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재 세상은 착실하게 망해 가는 중이고 이대로라면 세계 종말이라 부를 수 있는 시점까지는 별다른 무리 없이 진행될 것이었다.

망해 가고 있다는 증거는 너무나도 명확하지 않던가. 100년간 이어진 사람들의 불안, 폭동, 성장세가 둔화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날뛰고 있는 마수들. 이게 망조이지 별것이 망조이겠는가. 평화는 너무나도 아슬아슬한 상태로 유지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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