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12화 (12/257)

12화.

이 시점에서 긴말은 필요 없었다. 아리스가 비공정 앞에 다다랐을 때 라슈발렌 사람들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그를 비공정 안으로 밀어 넣기 바빴다. 이러다 갑자기 마음을 바꾸면 큰일이다 싶어 우선 비공정 안에 태우고 가두었다.

그들이 무슨 생각인지 너무나도 뻔히 보여서 아리스는 비공정 좌석에 앉아서 안전띠를 차고 모든 것을 내려놓은 얼굴로 앉았다. 양옆으론 파울로와 시오가 앉고 미레아는 맞은편에 앉았다. 아무리 봐도 도망 못 가게 연행해 가는 분위기였다.

모두 자리에 앉기 무섭게 라일라가 비공정의 시동을 켰다. 엔진이 돌아가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 파울로는 안전띠를 차며 아리스에게 말했다.

“서리 교단 쪽은 신경 쓰지 마. ‘데르카이드 사냥’을 하던 게 공개적으로 발각되면 골치 아프니까 저쪽도 네 행보에 대해선 당분간 입 다물고 있을 거야. 그리고 마을 주민들이 이주하는 것도 그들이 돕기로 했어.”

아무래도 약점 잡은 김에 알차게 협박하고 왔나 보다. 아리스는 느긋하게 팔로 뒷머리를 괴며 물었다.

“그럼 나는 이제 이대로 세피로스 회장 앞까지 끌려가면 되는 거야?”

“이 비공정으로 일곱별의 바다를 건너는 건 무리라 아이나 지부를 거쳐서 갈 거야.”

라일라가 대답했다.

“트럭은 버렸어. 지금은 필요도 없고 당장 쓰기엔 고물이 됐던데. 마을 사람들 보고 알아서 고쳐 쓰라 그랬어.”

“그렇구나.”

비공정 조종을 하는 라일라를 제외한 인원의 시선이 전부 제게 와 박히는 것을 느끼며 아리스는 천천히 하품했다.

“이렇게 된 이상 나 어디 안 가니까 다들 긴장 풀고…… 나는 좀 잘게요.”

정말로 피로가 쏟아졌기 때문에 아리스는 느리게 눈을 깜박이다 스르륵 감았다. 눈을 감기 직전에 마수의 숲이 희미하게 황금빛을 띤 주술로 덮여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잘 자.”

미레아가 속삭였다. 아리스는 진짜 잠이 들진 않았지만, 누군가 잘 자란 인사를 해 주는 건 오랜만이었다.

제2장 라슈발렌 협회

이 세계에 종말을 가져올 자가 나타났다.

인간의 태를 빌려 태어나 하늘을 향해 뻗는 검은 날개를 두려워하라.

그 날갯짓마다 세계는 종말에 가까워질 것이니.

테나력 2989년, 서리 여신의 속삭임을 48대 성녀가 받아 인간들에게 전하였다.

* * *

미레아가 갈색 병에 든 액체를 코를 막고 오만상 쓰며 들이켰다. 액체가 혀에 닿는 시간을 최대한 단축하면서 얼른 삼켰지만, 위에서부터 식도를 타고 지독한 냄새가 역류했다. 미레아는 그것을 토하지 않기 위해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욱욱거리며 애써야 했다. 간신히 속이 진정되었지만 역시 냄새가 입안으로 올라와서 미레아는 입을 쩝쩝 다셨다.

“라라미드 선생님, 이거 맛 좀 개선해 주면 어디가 덧나요?”

“그거 말이 피로 회복제이지 수명 당겨쓰는 약이나 다름없어서 많이 마시지 말라고 일부러 맛없게 만드는 거야. 하루에 두 병 이상은 못 먹게.”

라라미드는 미레아의 팔에 난 총상을 치료하다 고개를 들고 타박했다. 라라미드는 400살가량 되는 젊은 용이었다. 그는 검은 피부에 검은 머리카락을 여러 갈래로 땋아 드레드 머리로 만들고 하나로 묶었다. 인간과 달리 귀가 길었고 이마에 박혀 반짝거리는 손톱만 한 용주는 눈동자 색과 똑같은 주홍색이었다.

“에이. 여기는 수명 선불로 쓰는 사람투성이인데 그럼 어때요. 그리고 이거 같은 걸 한 병 더 못 먹는 게 문제가 아니고 다른 음식도 못 먹을 정도로 식욕이 뚝 떨어지는 게 더 문제예요.”

미레아는 다치지 않은 반대쪽 손을 입 앞에 대고 입김을 하하 불어 냄새를 확인했다. 그러자 다시 토할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스친 거라 다행인데 이번에도 안 죽고 살아온 게 신기하네.”

라라미드는 붕대를 단단히 감아 마무리하고 흉터투성이인 팔을 찰싹 때렸다. 미레아는 검지를 까딱거렸다. 손가락을 까닥거릴 때마다 씻은 후 아직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원래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 거래요.”

“누가 그런 헛소리를 해?”

“세피로스가요.”

“세피로스가 또 이상한 걸 가르쳤어.”

한마디도 안 진다며 투덜거린 라라미드는 약 봉투를 미레아의 품에 안겨 주었다.

“약이나 잘 먹고 내일도 드레싱 하러 와.”

“이 정도면 혼자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냥 와라.”

“네.”

험악해지는 라라미드의 얼굴에 미레아는 순한 양처럼 대답했다. 그녀는 목에 두르고 있던 수건으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마저 털어 내며 일어났다.

“그리고 시간 나면 한숨 푹 자면서 수액을 맞아. 내 드링크는 그만 마시고. 너는 항상 자신을 혹사하면서 무리를 하니까 몸을 좀 아끼란 말이다.”

“바빠서요.”

미레아는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라라미드의 진료실을 나섰다. 닫힌 문 너머에서 희미하게 앓는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렸다.

“머리도 바싹 말리고 다녀! 아직 쌀쌀해서 감기 걸려! 저거, 저거, 듣는 시늉도 안 하는 것 좀 봐라!”

라라미드는 치료한 흔적들을 정리하며 혀를 쯧쯧 찼다.

미레아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걷는 동안 수건으로 머리를 말렸는데 숱이 많아서 금방 마르지 않았다. 이참에 귀찮은데 잘라 버릴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미레아가 현재 사는 곳은 라슈발렌 협회의 대원들에게 지급되는 기숙 아파트로, 월세가 싸고 본부 건물 바로 옆에 있어서 많은 사람이 이용하고 있었다. 승강기를 타고 15층에 다다라 내리자마자 보인 것은 낯선 사람 둘이 자신의 방 안을 오가며 무언가를 열심히 작업 중인 광경이었다.

곧이어 미레아는 그들이 자신의 개인 물품을 방 밖으로 나르는 중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굳은 얼굴로 그들에게 이리저리 지시를 내리고 있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는 미레아에게 익숙한 얼굴이었다. 기숙 아파트 건물 관리인이었다.

“지금 뭐 하는 거죠?”

딱딱한 목소리로 묻는 미레아에게 관리인은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제가 분명히 2주라고 말씀드렸는데요.”

“2주라니요?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모르겠는데요?”

발뺌하는 미레아에게 관리인이 울컥해서 버럭 했다.

“퇴거 요청이 적어도 3달 전부터 들어갔는데 지금까지 눌러앉아 놓고, 최후통첩으로 2주의 시간을 주었더니 방을 뺄 생각이 전혀 없잖습니까?!”

“그러니까 지금 제 짐을 옮기는 거예요? 방 빼라고?”

“네.”

“지금요? 이대로?!”

미레아의 절망에 가까운 비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관리인이 말을 이었다.

“저는 참을 만큼 참았습니다! 이 동네는 집값도 싼 편이 아닌 데다, 기숙사 방이 모자란다는 항의가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당분간 증축할 예산도 없는데 집 없는 사람을 위해 집 있으신 분은 나가 주세요!”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경우 없이 다짜고짜 남의 물건에 손을 대면 어떡해요?! 적어도 하루 전이라도 말을 해 주시지!”

“그렇지 않아도 제가 어제 마지막 확인 차 들렀을 때 안 계시던데요?”

자리에 없던 사람 잘못이라는 말에 미레아가 땍땍거렸다.

“아니, 같은 라슈발렌 협회 사람이면서 전투부 바쁜 거 뻔히 안 보여요? 제가 놀러 갔던 것도 아니고 임무 수행한다고 부재중이었던 건데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죠?! 오늘 아침에 임무에서 귀가하자마자 다친 것부터 치료하고 바로 온 건데 이러는 법이 어디 있어요? 제가 더 늦게 왔으면 저는 잠긴 문 앞에서 덩그러니 놓인 제 개인 용품들만 보고 있어야 했단 말이네요? 내가 없으면 그냥 문 앞에 공문이라도 붙여 주던가……!”

“직접 서명을 받아야 했기에 그랬습니다. 앞으로 전달사항을 공지하는 방법에 대해서 제인스터 씨 의견을 참조하도록 하지요.”

관리인이 펜과 퇴거 확인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미레아는 피곤 때문에 날이 설대로 선 상태라 히스테릭하게 외쳤다.

“서명 안 해! 못 해!”

“반항하셔 봤자 강제 퇴거 조치는 취소되지 않습니다.”

“내가 누군지 알아? 어? 나 미레아 제인스터야! 어?!”

“네, 성함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근데 그래서요?”

“내가 저 윗선에 말만 하면……!”

“그 윗선에서 가차 없이 쫓아내라던데요.”

“아아악!”

그 말에 미레아는 반항하는 것을 멈추고 눈물을 머금은 얼굴로 관리인이 내민 펜을 건네받았다.

“배신했겠다! 나를 배신했겠다! 세피로스!”

그리고는 신경질적으로 종이 위에 서명을 휘갈겼다. 도도한 표정으로 턱을 치켜든 관리인이 떠나고 남은 자리에는 미레아의 짐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다른 방 사람들이 미레아의 짐을 피해 좁은 복도 벽에 몸을 붙이고 지나가는 것을 보며 미레아는 난처한 얼굴로 마른세수하였다.

당장 이 짐들을 싸 들고 갈 곳이 없었다. 마땅한 대책이 떠오르지 않아 미레아는 자포자기하고 자신의 짐 사이에 껴 있는 쿠션을 베고 옆으로 누웠다. 땅바닥에서 자는 건 익숙해서 불편하지 않았다.

“뭐니, 이거?”

미레아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금색 눈동자를 보고는 언제 울적했냐는 듯 활짝 웃으며 손을 뻗었다.

“리비!”

“다쳤다더니 얼굴은 괜찮아 보이는데 다른 건 안 괜찮아 보이네.”

리비엘로는 복도에 한가득 나뒹굴고 있는 미레아의 짐을 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옅은 초콜릿색 피부가 드러난 어깨 위에 엉덩이까지 오는 백금발 머리카락이 사라락 흘러내렸다. 한쪽 눈을 가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미레아에게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니?”

미레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껏 불쌍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 쫓겨났어.”

“왜?”

“기숙사 배정 우선순위 규정이 바뀌었는데 내가 거기 해당 항목에서 열외라.”

“그게 하루아침에 바뀌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짐 챙길 시간도 안 줬니?”

“사실은 줬는데…….”

“줬는데?”

“난 안 쫓겨날 줄 알고 짐 안 챙기고 있었지. 진짜 쫓아낼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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