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내가 그런 것들을 고려해서 네 개별 행동을 허락하긴 했는데, 그게 저 순환기를 써도 된다는 소리는 아니었거든? 저게 알려지면 저놈 하나 숨긴다고 될 문제가 아니란 말이다! 사용 허가도 안 냈고, 순환기랑 공명할 바깥쪽 마도 기구들은 조율 전이라 가져가 봤자 쓸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면서……!”
“아, 그거 제가 쓰라고 들려 보낸 거예요.”
라일라가 끼어들자 파울로는 배신당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하지만 라일라는 더없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럴 것 같았거든요. 딱 제가 원하는 상황이었지 뭐예요. 덕분에 데이터도 엄청나게 얻었고. 수고했어, 미레아. 그리고 단순한 순환기가 아니고, ‘마력 촉매 신성력 연쇄 반응 광범위 술식 순환기’라고 제대로 불러 주세요.”
파울로는 머리를 싸매었다. 아리스는 파울로를 향해 몸을 틀었다. 넷은 그와 동시에 무기를 아리스에게 겨누었다. 그러든 말든 아리스는 이 중 가장 윗사람인 파울로에게 침착하게 말했다.
“이봐, 저 신전에 정신을 잃은 신녀 하나랑 성기사들의 사령관이 하나 있는데 그자는 내가 죽였어.”
“그 사람을 왜 죽여?!”
미레아가 분개하자 아리스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쩔 수 없었어. 사령관은 내 날개를 봤어. 하지만, 다른 녀석들은 상처만 좀 입은 정도고. 아까 공중에 있을 땐 땅에서는 어두워서 내 날개가 잘 보이지 않았을 거야.”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파울로는 자신의 검을 내리면서 주변을 둘러보고 혀를 찼다.
“마을 사람들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군.”
그 말대로 마을 주민들이 여기저기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나와 있었다. 밤사이 이어진 총성에, 폭발에, 마수의 숲은 느닷없이 광범위 신성 술식에 덮였고,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어떻게 돌아갔든 성기사들이 움직인 시점에서 조용히 덮고 가기엔 글렀으니 이 녀석에게 너무 뭐라고 하지 마.”
아리스가 자신을 두둔하는 말에 미레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신들보다 더 뒤가 구린 짓을 한 것은 저쪽이니 아마 협박이나 협상을 하면 말이 통하긴 할 거야. 신녀와 사망자를 제외하면 성기사는 19명이야. 저쪽은 맡길 테니 사태를 수습해 봐. 마을 사람들 쪽은 내가 대충 설명할게.”
“어차피 그럴 생각이긴 한데 왜 우리한테 명령이세요?”
평대도 하대도 존대도 아닌 이상한 어투로 파울로가 아리스에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싫으면 말고.”
파울로는 작게 한숨 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둘 게 있는데, 저 숲은 우리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70% 정도가 정화되어 당분간 마수가 생기지 않을 거야. 그래도 다시 오염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고 일부는 정화가 되지 않은 부분도 있어. 그러니 숲이 다시 오염되기 전에 마을 사람들이 이곳을 떠나는 것이 좋을 거라고 마을 사람들에게 말해 줘. 일시적이라 해도 대피할 시간이 부족하지는 않을 거다.”
“대체 어떻게…… 라고 묻고 싶지만, 미레아도 제대로 된 설명을 안 해 줬는데 당신이라고 해서 자세한 설명을 해 줄 생각은 없겠지?”
“잘 아네.”
아리스는 잠시 턱을 괴고 생각을 정리했다. 사람들에게 이 기회에 마을을 버리고 대피하라 전하고 자신은 어디로 갈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그딴 고민은 할 필요 없다는 듯 파울로가 미레아에게 말했다.
“넌 루데키아스와 행동해. 그 이후에는 비공정에서 대기. 물론, 루데키아스도 함께. 라일라, 술식 안정도 확인하고 순환기 회수해. 시오는 나와 간다.”
“잠깐, 아까부터 말하지만 나는 당신들과 동행할 생각이 없는데?”
이 일을 수습하는 걸 도와는 주겠지만 우리의 인연은 이것으로 끝냈으면 좋겠다는 말에 시오가 미레아를 흘겨봤다.
“그러게 저 사람한테 미리 설명 좀 해 주지 그랬냐. 자신만만하게 먼저 가더니.”
하지만 파울로는 의외로 별거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지. 루아드 제국에서 마검 페니드란을 회수할 거라 공표했어.”
그 말에 방금까지만 해도 뻗대던 아리스가 눈을 크게 떴다.
“그게 무슨…….”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간신히 정리하고 힘겹게 운을 떼는 아리스의 말을 끊고 파울로는 등을 돌렸다.
“그 이상은 협회 본부로 가서 회장이랑 자세하게 이야기하는 게 어때? 그것 말고도 이것저것 궁금한 게 많을걸?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잘 생각해 봐.”
파울로는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손을 팔랑거리며 신전 쪽으로 발을 옮겼다. 시오가 쓴웃음을 짓고는 저격 소총을 어깨에 비스듬하게 걸치고 뒤따랐다. 아리스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내 마력 촉매 신성력 연쇄 반응 광범위 술식 순환기는 어디에 있어?”
라일라의 질문에 미레아의 등이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저기, 라일라.”
“응.”
“일단 내가 몰고 온 트럭에 실려 있긴 할 텐데 사실 그게…… 좀…… 살짝 부서져 있을 수도 있어. 내가 그러니까…… 조금 과격하게 강제 가동했거든?”
“어떻게 했길래?”
“어…….”
미레아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다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실직고했다.
“메뉴얼대로 하면 신성력이랑 마력을 순환기에 제때 충전시키기 어려울 것 같아서 그냥 영소 흡수시키는 그 장치에서 바로 저기서 저기로…… 쐈어.”
라일라는 미레아가 가리킨 허공을 한 번 보았다가, 미레아가 말한 트럭을 한 번 번갈아 보고는 신음을 흘렸다.
“안 돼…….”
“미안.”
“내 한 달 철야가…….”
“술식이 제대로 작동한 것으로 보면 많이 부서지지는 않았을 거야. 아마도?”
“또 한 달 동안 재작업…….”
“데이터 뽑아 줬잖아. 그러라고 나 준 거 아니야?”
“내 작업물…….”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다르다고 자기가 넙죽 들려 보내 놓고 막상 슬픈 소식을 들으니 급격하게 기운이 빠진 라일라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것 말고도 루데키아스가 마력으로 어떻게 했는지 알면 되게 좋아할걸?”
미레아의 변명에 라일라는 퀭해진 눈가를 손으로 쓸고는 희미하게 웃었다.
“좋아, 그걸로 봐준다.”
당연하게 자신을 팔아넘기는 미레아를 보고 있자니 아리스는 어이가 없었다.
“자, 우리는 어서 마을 사람들에게 상황을 전하자. 물론 뺄 건 빼고, 조금 날조를 섞어서.”
이어지는 잔소리를 듣기 전에 미레아는 얼른 달아나며 아리스의 등을 떠밀었다. 아리스와 걸으며 미레아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완전한 입막음은 힘들 것 같은데.”
“내가 데르카이드였다는걸 숨겨 봤자 이만큼 소란이 있었는데 이미 알고 있을 거야. 그럴 바에 툭 터놓고 내가 교단을 포함해 리젤 신녀와 마찰이 있었고 이 이상 마을에 폐를 끼칠 수 없으니 떠난다고 해야지.”
“데르카이드였단 것까지는 말해도 네가 그 흑익, ‘루데키아스’란 건 우리 쪽에서 비밀에 부치고 싶은데.”
“그렇다면 나야 환영이지. 그보다 저 숲에 관한 쪽이…….”
“그건 서리 교단 쪽 공으로 돌려.”
“하긴 하나라도 더 빚을 지어 놔야 저쪽과 교섭하기 쉽겠군. 그래도 그걸로 괜찮겠어?”
“상관없어. 고작 이런 일은 우리 쪽에서 잃을 것도 없지만 얻을 것도 없어. 지금은 너만 무사하면 돼.”
그 말에 아리스가 울컥해서 미레아를 돌아봤다.
“너 나한테 거짓말을 했어. 내게 나쁜 얘기가 아니라더니 완전 나쁜 얘기인 걸?”
“그런가?”
“그래!”
“하지만 내 생각에는 이건 네 누명을 벗을 기회가 아닐까 싶은데. 파울로가, 아, 아까 그 금발 머리 말하는 거야. 내 대장이거든. 아무튼, 이 이상 자세한 건 회장이랑 대화해 보라 그랬잖아? 분명 나쁘지 않을 거라고 봐.”
그 말에 아리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미레아를 바라보다 다시 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다.
“페니드란을 회수하겠다니 황제가 미친 게 분명해.”
“그래서 보고만 있을 거야?”
“…….”
“루데키아스, 너는…….”
미레아가 다른 이야기를 더 꺼내기도 전에 아리스의 본명을 부르자 그는 저도 모르게 날카로운 어투로 미레아의 말을 잘랐다.
“차라리 흑익이라고 불러.”
“그럼 아리스라고 부를게.”
미레아는 자신의 앞에 있는 남자의 어깨가 조금 처지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보니 이 이상으로 이러저러한 말을 보탤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리스는 미레아와 대충 상의한 대로 밖에 나와 있는 마을 사람들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아리스는 그렇지 않아도 반쯤 헛간 같던 집이 수류탄이 터지는 바람에 더 이상 헛간으로도 보이지 않는 자신의 임시 거처로 돌아갔다.
마력을 개방하면서 등 뒤로 날개가 나오는 바람에 줄곧 상의를 벗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아리스가 아무리 험하게 굴렀다 해도 새벽 날씨가 추운 건 추운 거다. 겨우 멀쩡한 옷 한 벌만 챙긴 아리스는 바로 촌장을 찾아가 마을 주민들을 데리고 떠날 것을 제안했다.
“만약 마수의 숲이 전과 같은 상태가 된다면 올해를 넘기지 못하고 전부 아사합니다.”
아리스의 단호한 말에 촌장의 주름이 깊어졌다. 하지만 아리스는 정보를 준 것 이상 관여하지 않았다. 곧 마을 회의가 이어질 것이고 결정은 그들의 몫이다. 자신들 말고 당신은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는 촌장의 질문에 아리스는 냉정하게 말했다.
“저는 여기까지예요. 오늘 떠납니다.”
촌장은 차마 그를 잡지 못했다. 그저 몸조심하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하지만 아리스는 그마저도 길게 듣지 않고 자리를 떴다. 무언가에 깊게 관여하는 것은 질색이었다.
그때까지 미레아와 아리스는 별다른 사담을 나누지 않고 서로 침묵하고 있었다. 일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소형 비공정으로 돌아가기 전에 미레아는 아리스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아리스의 시선이 비공정 쪽으로 향한 것을 보고는 슬쩍 물었다.
“혹시 따로 챙길 짐은?”
“없어.”
“그럼…….”
“저쪽도 이야기가 끝난 것 같은데.”
아리스가 신전 쪽을 턱짓했다. 미레아와 아리스에게 실컷 당한 기사들이 빌빌거리면서 리젤을 부축하고 있었다. 그리고 흰 천으로 덮은 루캄의 시신도 있었다. 그들을 내버려 두고 파울로는 비공정 쪽으로 움직이다 멀리서도 눈에 확 띄는 미레아의 빨간 머리를 보고 빨리 오라며 팔을 휘둘렀다.
“갈까?”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