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10화 (10/257)

10화.

“마력이 넘쳐나는 녀석이 고작 그거 조금 끌어다 썼다고 쩨쩨하게 그러긴. 그리고 이건…… 뭐, 보는 대로…….”

당당하게 나오다 갑자기 말을 흐리는 미레아의 시선을 따라 아리스가 고개를 들었다. 숲이 정화되고 술식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성력을 뒤집어쓴 마수들은 소멸하거나 저마다 도망가고 있었다.

아리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것을 멀거니 보았다. 아리스가 봤을 때는 꼭…… 마력이 신성력을 증폭하고 증폭된 신성력은 또 마력을 증폭하고, 끝없는 연쇄작용의 굴레였다.

숲에는 마력 술식이 몇 군데 설치되어 있었다. 그것이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일종의 길을 만들자 신성력은 그것을 타고 흘러 흩어지지 않고 응축되었다. 게다가 증폭된 신성력은 마수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고 마력은 마수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결계를 쳐서 묶어 놓고 있었다.

이게, 가능해?

아리스가 알고 있는 한 이런 주술식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아니, 이게 원래는 기밀이긴 한데…… 이렇게 막…… 남들 앞에서 보여 주고 그러면 안 되는데 어쩔 수 없었으니까, 뭐. 그렇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이고 무엇에 대한 동의를 구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아리스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돼……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설명하자면 숲이 정화되고 땅이 원래대로 돌아가고 마수들은 땅이 정화된 덕분에 신성력에 지져지거나 밀려나고…… 오염되어 비정상적이던 영소를 회복하고…… 그런 상황이지.”

“아니. 마수나 오염 둘 중 하나라도 남아 있으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거야.”

한번 오염된 숲이 다시 원래대로 정화되었다는 소리는 지금까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그런 것이 가능했다면 지금까지 속수무책으로 땅이 오염되고 마수가 판을 치는 것을 손 놓고 보고만 있지 않았을 것이다.

마수는 땅을 오염시킨다. 그리고 오염된 땅은 마수를 끌어들인다. 그것은 끊임없는 악순환을 반복해 오염된 땅에는 마수가 있고, 마수가 있는 곳에는 오염된 땅이 있기 마련이었다.

“술식을 따라 흐르는 마력이 신성력을 계속 붙잡아 증폭시켜서 마수를 녹여 버리고 있어.”

미레아의 말대로였다. 공급원이 끊긴 신성력은 단순한 결계 주술식으로 묶인 것이 아니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해?”

아리스의 질문에 미레아는 더는 답해 줄 수 없다는 듯 입을 꽉 다물었다. 노골적으로 시선을 피하는 눈동자가 불안하게 요동쳤다.

“그러니까 아까도 말했듯 원래는 기밀…… 인데…… 우리 측에서 비밀리에 진행 중이던 마도공학 연구 과제의 산물이야.”

미레아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사이 박쥐처럼 생긴 마수가 신성력을 피하려다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기척을 재빨리 눈치챈 아리스는 시큰둥한 얼굴로 손만 가볍게 들으려고 했는데 마수의 한쪽 날개가 터지듯 나가떨어졌다. 그러더니 이내 머리에 총알이 박혔다. 그것은 뇌간과 함께 핵을 부수었다.

둘은 재가 되어 사라지는 마수를 보고는 총탄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초소형 비공정이 저 멀리 떠 있었다. 기껏해야 사람을 네다섯 명 정도만 수용 가능한 기체였다. 비공정 밖으로 상체를 아슬아슬하게 뺀 사람이 저격 소총을 이쪽으로 겨누고 있었다. 방금의 사격은 그의 솜씨였다.

“미레아 제인스터의 모습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흑익 역시 확인했습니다.”

라일라는 비공정 조종석 뒤쪽에 있는 파울로에게 자신의 눈에 들어온 것을 보고했다.

“우리 집 똥강아지가 외간 남자 품에 안겨 있는데요? 예상대로 흑익이랑 같이 있는 건 맞는데 둘이 되게 친해 보이는데요, 대장.”

미레아와 아리스에게 덤벼들려고 했던 마수를 쏴 맞춘 시오는 저격 소총의 조준경을 통해 둘의 상태를 보고 미간을 찡그렸다. 하지만 파울로는 미레아보다 그 아래 거미줄같이 긴밀하게 연결된 신성력과 마력의 흐름을 보고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이를 갈았다.

“저 녀석은 대체 뭐 하고 있던 거야? 이 자식이 누구 멋대로 순환기를 작동시켜?”

파울로의 속이 터지든 말든 알 바 아닌지 미레아는 공중에 떠서 무언가를 고래고래 외치고 있었다. 파울로는 미레아를 망원경으로 들여다봤다. 입 모양을 보니 욕인 것 같아 그는 싸늘하게 식은 미소로 시오에게 말했다.

“저놈도 쏴서 떨어트려.”

“그보다 대공자 전하께서 우리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데요. 죽고 싶지 않으면 그쪽을 먼저 쏴야 하지 않을까요.”

파울로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결 좋은 금발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비공정 엔진 소리에 묻혀 미레아의 목소리는 그들에게 들리지 않았지만, 그녀는 열심히 소리쳤다.

“늦어! 늦었다고! 뭐 하다 지금 와?! 나 혼자 피똥 싸게 돌아다니게 두더니 상황 종료되니까 뒤늦게 어슬렁거리면서 나타나아악?!”

미레아는 뒷말을 내뱉다 혀를 씹었다. 아리스가 반쯤은 떨어지는 속도로 땅에 내려앉은 덕분이었다. 그리고 미레아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녀는 운이 없게 딱딱한 바위에 부닥쳐 얼얼한 엉덩이를 문지르며 멀어져 가는 아리스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어디 가?”

“도망.”

미레아는 부리나케 아리스를 쫓아갔다.

“내가 얘기라도 들어 보라 그랬잖아!”

“곤란한 상황에서 서로 도와준 거로 됐잖아?”

“그러니까 나쁜 얘기가 아니라고.”

입씨름하는 그들의 앞을 비공정이 착륙하며 가로막았다. 아리스는 바람에 섞여 날아오는 흙먼지에 눈을 찌푸렸다. 기체가 땅에 닿기도 전에 금발 머리를 한 남자가 성미 급하게 뛰어내리더니 그대로 미레아에게 직행했다.

“악!”

미레아는 검 자루가 내리친 자신의 정수리를 부여잡았다. 파울로의 검은 양손으로 들어야 하는 대검이었다. 그 무게가 실린 검집을 가차 없이 휘두른 파울로가 두 눈을 홉떴다.

“너 이 자식…….”

“파울로, 그 검으로 사람 패면 죽어요!”

“진짜로 죽이고 싶은데 넌 잠깐 기다려.”

아리스는 자신을 포위한 세 사람을 보았다. 한 명은 아까 본 대로 저격용 저격 소총을 가진 하늘색 머리카락의 청년이었고, 다른 하나는 연한 분홍빛 단발머리를 한 작은 체구의 여자였다. 미레아가 파울로라고 부른 남자는 분위기상 그들의 리더로 보였는데 금발 벽안의 미남이었다.

그 셋은 돌발 상황에도 바로 움직일 수 있도록 온 신경을 긴장한 것이 아리스에게도 느껴졌다. 그런 분위기다 보니 아리스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루데키아스 레민나 류 파니드라우.”

그런 이름으로 불리자 아리스는 대놓고 표정을 구겼다. 파울로는 미레아를 손가락을 가리키며 물었다.

“우선, 저 녀석과 이야기가 어디까지 됐는지 알려 주었으면 하는데.”

아리스는 미레아와 다른 셋을 번갈아 보고 입을 열었다.

“당신들이 라슈발렌 협회 사람들이고, 목적은 나를 데려가려는 것.”

“…….”

자신의 말을 듣고 이어진 침묵의 의미를 뒤늦게 이해한 아리스가 심드렁하게 덧붙였다.

“끝이야.”

“저 망할 놈이 하나도 설명하지 않았잖아?! 먼저 가겠답시고 한 게 뭐가 있냐?”

파울로가 쏘아보자 미레아는 억울하단 목소리로 맞받아쳤다.

“아니, 그럼 그 상황에서 뭘 어떻게 설명해요?! 교단 녀석들이 밤이 되자마자 신나서 칼침 놓기 시작했는데 그때까지 파울로를 기다릴 순 없잖아요. 게다가, 죽네 사네 하고 있는데 얘를 앉혀 놓고 구구절절 풀어 말해요? 그러게 누가 늦으랬어요? 저 여기 총 맞은 거 안 보여요?”

“그래서 네 말대로 설명할 시간도 없다고 다짜고짜 저 순환기를 작동시켰어?”

“애초에 쓰라고 만든 건데 좀 쓰는 게 어때서요?”

“마도 공학자로서는 시가동 당시보다 기대 이상의 출력이라 데이터를 뽑을 수 있어서 만족스럽긴 한데…….”

두 사람의 언쟁이 배경음으로 들리는데 연분홍 단발머리의 라일라가 이제는 숲 전체로 퍼진 주술식을 보고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청록색으로 빛나는 눈을 곱게 접어 웃으며 아리스를 향해 말했다.

“당신이 데르카이드인 것을 감안해도 말이지요.”

그렇게 말하는 모습이 어쩐지 신나 보였다. 아리스는 자신에게 저 비슷한 시선을 보내는 이들을 많이 봐 왔다. 좋게 말하면 호기심, 노골적으로 말하면 이용 가치가 얼마나 될까 계산하는 태도 말이다. 그런데 이 분홍 머리 여자의 태도는 조금 달랐다. 저건 그러니까…… 잠자리를 뜯어 보고 싶어서 안달 난 어린아이 같은 표정이라 무서웠다.

하늘색 머리의 남자는 아리스와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었지만, 오른팔에 든 소총은 계속 그를 향하고 있었다.

파울로는 이를 갈며 말을 이었다.

“먼저 가서 상황이나 보고 있으라고 보냈더니 내가 순환기랑 같이 없어진 거 보고 쓰러지는 줄 알았다.”

“시간 맞춰 문제없이 잘 기동해서 잘 풀렸으니까 됐잖아요.”

“숲 바깥쪽 작업이 끝났는지 안 끝났는지 어떻게 알고 그랬어? 만약에 우리 쪽에서 문제가 생겨 작업이 지연됐었다면?”

“그런 거 제대로 하라고 파울로가 그 자리에 앉아서 월급 받는 건데 그거 하나 제시간에 못 하면 사표 써야죠.”

미레아의 말에 파울로가 뒷목을 잡았다.

“너를…… 보내는 게…… 아니었어…….”

파울로는 미레아의 목을 조르고 싶단 표정이었지만 그녀는 태연히 말을 이었다.

“당연히 조용히 와서, 조용히 빼돌리는 게 가장 좋기는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다 보니 어쩔 수 없었잖아요. 게다가 여기서 기동력이 가장 좋은 건 누구다? 나! 돌발 상황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건 누구다? 나! 저 순환기를 쓸 수 있는 건 누구다? 나! 여러모로 제가 적임자였으니 파울로의 판단력은 문제없었어요.”

자화자찬하며 선심 쓰듯 파울로를 추켜올리는 듯한 말에 그는 기어이 미레아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었다. 그러자 그녀는 죽는소리를 내면서 변명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마을을 개판으로 만든 것도 교단 녀석들이고, 루데키아스를 죽이려고 한 것도 교단 녀석들인데. 저 멍청한 기사단 놈들이 움직이면 사람 하나 죽고 끝인 게 아니잖아요. 그렇다고 기사단 쪽에서 사망자가 나오는 것도 골치 아프단 말입니다. 하지도 않은 뒷감당을 우리가 떠안는 건 사양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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