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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따라 종말까지-9화 (9/257)

9화.

“꺄아아악!”

리젤이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신성력이나 마력을 정신의 원천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생명체의 정신력, 의지에서 나오는 힘이기 때문이었다. 정신력과 의지가 강할수록 신성력이나 마력은 더욱 강해지고, 다루기 쉬워진다.

아리스는 리젤의 뇌에 직접 자신의 마력을 흘려 넣어 그녀의 정신력을 뒤흔들었다. 일종의 정신력 싸움이었다. 지금까지 갈색이었던 아리스의 눈이 푸른색으로 빛났다. 몸 밖으로 흘러넘친 마력이 자연계의 영소와 맞부딪힐 때마다 푸른 스파크가 일었다.

그때마다 아리스의 머리는 점점 검게 물들었다. 아리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이상 마력을 쓰려면 어쩔 수 없이 외모를 들키게 될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던 아리스는 마력의 출력을 늘렸다. 그와 동시에 아리스의 옷이 찢기면서 그의 등 뒤에서 폭발하듯 검은 날개 한 쌍이 튀어나왔다.

그것을 본 루캄의 눈이 커졌다.

“흐, 흑익(黑翼)!”

그는 어버버거리며 한심한 소리를 내더니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 소리쳤다.

“어떻게 흑익이 여기에……! 대체……! 이게 무슨……! 서리 여신이시여!”

아리스가 푸른 눈동자를 굴려 루캄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꼴좋다는 듯 싱긋 웃었다.

“아니, 여기 데르카이드가 있단 소리를 들었을 때 여러 가능성 중의 하나가 나일 줄 몰랐어? 정말로? 2년 동안 여기저기 떠돌기는 했지만, 마이련 안에서만 움직인 덕분에 내가 마이련에 있다는 건 개나 소나 다 알 정도로 소문이 났을 거라 예상했는데…… 서리 교단은 생각보다 소문이 느린가 봐? 내 날개가 무슨 색인지 궁금하다 그랬지? 자, 어때? 궁금증이 풀렸어? 이래도 나와 계속해 볼 거야?”

아리스는 정신을 잃은 리젤을 아무렇게나 바닥에 쓰러트렸다. 루캄은 반쯤 전의를 잃고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눈앞에 있는 것은 재앙이었다. 자신 혼자, 아니, 이곳에 있는 기사단원 전원이 그에게 덤비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자살 행위. 생각이 그 단어에 다다르자 루캄의 몸이 벌벌 떨렸다. 대체 자신이 누구를 상대하려 그랬는지 뒤늦게 깨닫자 공포감이 엄습해 왔다. 어쭙잖은 선민의식으로 기사단의 선봉에 서던 용맹함 따위는 내다 버린 지 오래였다.

루캄은 5년 전, 흑익이 만들어 낸 사건을 자신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자 중 하나였다. 그에게 흑익은 절대적인 악(惡)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자신의 위치에서는 다다를 수 없는 경지에 있는 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 날개를 본 사람은 당신 하나뿐인데 미레아에게 감사하라고.”

아리스는 호랑이 앞의 쥐처럼 전의를 잃은 루캄에게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당신만 죽이고, 나머지 기사들의 목숨 줄은 붙여 놓을 테니.”

“히, 히익……!”

루캄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다 제대로 된 저항도 못 해 보고 목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그 뒤에 있던 대리석으로 깎아 만든 서리 여신의 하얀 조각상에 루캄의 붉은 피가 튀었다.

리젤의 신성력에 아리스의 마력이 얽혀 들었다. 그와 동시에 결계가 깨지면서 신성력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미레아가 신호를 달라고 했지만, 그것은 날개를 펼칠 때 방출된 마력만으로 충분했다.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폭발적인 힘을 못 알아볼 리 없었다.

아리스는 피가 묻은 대리석 조각상을 한번 흘겨보고 지나쳐 신전 밖으로 빠른 속도로 걸어 나갔다.

예상대로 미레아는 거대한 마력의 폭발을 신호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녀는 동시에 덤벼드는 성기사들을 상대하느라 첨탑 근처에도 못 가고 아직도 낮은 땅 위였다. 아리스는 저래서야 늦었다고 생각했다.

“저 바보가…… 자신만만하더니?”

하지만 미레아는 땅을 박차고 도약하더니 옆에 있던 건물의 지붕을 발판삼아 한 번 더 뛰어올랐다. 그것이 어찌나 빠른 데다 높았는지 움직임을 눈으로 좇기가 어려웠고 미레아의 발이 디딘 곳은 움푹 패어 있었다.

아리스는 미레아의 워커에서 마력이 흩어지는 것을 보고 아마 미리 마력을 모아 술식을 새겨 넣은 마도 기구 장치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미레아는 마력 제어 결계가 깨지면서 마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된 순간 그것을 바로 발동시켰다.

마력의 힘을 빌렸다곤 하지만 저 움직임을 감당하려면 그만큼 빠른 반사 신경과 뛰어난 동체 시력이 있지 않은 한은 어려웠다. 지금까지 자기 하나 믿고 움직이던 행적으로 추측하자면 아리스는 이제 미레아가 그렇게까지 놀랍지는 않았다.

순식간에 날아오른 미레아는 석궁의 기계장치를 제어하고 있던 핀을 뽑았다. 흩어지려 했던 신성력이 장치의 코어로 흡수되었다. 아리스가 두 번째로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신성력뿐만이 아니고 자신의 마력 역시 그 장치에 흡수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신성력에 자신의 마력을 섞는 것으로 결계식을 깨 버렸으니 아리스의 마력 일부는 그 흐름에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얼른 마력을 끊었지만 제법 상당한 양의 마력이 아리스의 몸을 빠져나간 뒤였다.

“자, 그럼 저게 얼마나 잘 작동하는지 볼까?”

미레아는 몸이 추락하기 전에 자신이 타고 온 트럭을 겨냥해서 그 힘을 발사했다. 엄청난 양의 신성력과 마력은 한데 뒤엉켜 트럭에 명중하더니 트럭 주변으로 주술식이 펼쳐졌다. 주술식은 하나가 아니었다. 중심이 된 트럭을 기점으로 중간중간 다른 주술식들이 튀어나왔다. 그리고는 거미줄처럼 연결되더니 마을을 뒤덮고 마수의 숲까지 그 범위를 넓혔다.

“중요한 짐이 있다더니 저거였나.”

아리스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인가 싶어 미간을 찡그렸다가 미레아를 보고 기겁했다. 미레아는 하늘 높은 곳에서 주술식과 마력, 신성력이 뒤섞여 만들어 낸 소용돌이에 휘말려 내동댕이쳐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 아래에는 낙법으로 착지를 할법한 공간이 없었다.

미레아 역시 그것을 깨닫고 얼굴 근육이 굳으려는 찰나, 단단한 것이 자신의 몸을 받쳐 드는 것이 느껴졌다.

“넌 겁이 없어도 왜 그렇게 없어? 무모한 것도 정도가 있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정수리 위에서 아리스의 잔소리가 쏟아내렷다.

“나, 참.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것인지. 넌 목숨이 열 개야?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미레아는 하늘 위에서 자신을 안고 검은 날개를 펼치고 있는 아리스와 땅 아래를 번갈아 가며 보았다. 그리고는 얼른 한쪽 팔을 아리스의 목에 둘러 대롱대롱 매달리고 반대편 손으로는 벌렁거리는 가슴을 움켜쥐고 숨을 몰아쉬었다.

“주, 죽을 뻔했다! 이번엔 진짜 죽을 뻔했다!”

미레아의 몸을 가볍게 받쳐 든 아리스는 기가 막혀서 저도 모르게 또 한 번 잔소리가 나갔다.

“알기는 아냐? 아는 놈이 그래?”

하지만 미레아는 그보다 더 큰 목소리로 기겁하며 아리스의 귀에 대고 소리쳤다.

“아니, 그보다 너 날개! 바보야, 날개 꺼내면 어떡해! 내가 너 정체 숨기려고 이런 짓을 한 건데 이러면 성기사들이 다 본다고!”

“그건 걱정하지 마. 아직 어두워서 제대로 못 볼 거야.”

미레아는 조금 안도한 표정으로 아리스의 얼굴을 보고는 화제를 바꿨다.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네?”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가 미레아의 감람석 같은 눈동자를 쏘아봤다.

“어쩔 수 없잖아. 마력을 외부로 개방하는 바람에 머리카락이랑 눈 색을 바꿨던 것도 풀렸고.”

“역시 그거 마법이었어?”

몸에 직접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마법은 다루기 힘들다. 하물며 그 상태로 오래 유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미레아는 그래서 아리스가 세간에서 말하는 흑익이라는 것을 한 번에 알아챌 수 없었다. 머리카락 색이야 염색한다 치지만 눈동자 색까지 바꿀 줄은 몰랐던 것이었다.

사진을 봐 두었기 때문에 대략적인 외형 특징은 알고 있었지만 5년 사이 소년기를 완전히 벗어나면서 얼굴이 조금 변한 탓도 있었다. 10대 때의 그는 남자답다는 인상보단 예쁘장하게 생긴 소년이었다.

현재 아리스 클라인셔드란 가명을 이용 중인 그는 22살, 검은 머리에 푸른 눈동자인 남성. 그리고 이목구비가 날카롭지 않아 어떻게 보면 소년 같은 인상이지만 마냥 어려 보이는 것이 아니라 제법 성숙한 태가 나는 산뜻한 분위기의 미남이었다.

갈색 머리에 갈색 눈동자, 그리고 평범한 분위기를 풍겼던 자는 원래의 머리카락 색과 눈 색으로 돌아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내숭 떨며 지었던 표정을 걷어 내자 인상이 바뀌었다.

미레아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아리스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저 멀리서 새벽하늘이 밝아 온다 싶더니 산등성이 너머로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 빛을 머금은 아리스의 푸른 눈동자를 보고 미레아는 햇빛이 파도에 잘게 부서지는 바다를 떠올렸다. 바람이 둘의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리며 지나갔다.

아리스는 바로 땅으로 내려가지 않고 날갯짓하며 고도를 유지했다.

“마력으로 머리 색과 눈동자 색을 바꿔서 유지 중이었으니, 그 신녀에게는 외형을 바꾼다고 몸 내부로 마력을 돌리고 있는 것을 들킨 게 아닐까 싶네.”

미레아의 추측에 아리스는 작게 혀를 찼다. 미레아는 그를 바보 취급했다.

“애초에 이름부터 이상하잖아. 가명이면서 그게 뭐야?”

“그럼 망하기 일보 직전인 마을에 가겠다고 검 한 자루 들고 마수의 숲까지 뚫고 들어간 사람은 안 이상해? 애초에 내 외형은 혼혈인 티가 나는지라 그 부분까지 숨기기는 힘들어. 그러니 기왕 수상한 거 조금 더 수상하게 보이는 게 어때서. 이 근방은 내란으로 사연 있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나같이 조금 튀어 봤자 수상한 축에도 못 끼거든. 나무를 숨기려면 숲이지.”

“아, 그러십니까. 소인이 미처 전하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여…….”

아리스는 황급히 미레아의 입을 막았다.

“됐고…… 내게도 설명이나 해 주지 그래? 말도 없이 내 마력까지 끌어다 써? 누구 마음대로? 내 마력과 신성력이…… 이게 대체…….”

아리스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하늘에서 마력과 신성력이 연달아 거미줄처럼 얽히면서 범위를 넓히고 있는 광범위 술식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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