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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따라 종말까지-8화 (8/257)

8화.

미레아가 꺼낸 붕대는 타래가 엉망진창으로 풀렸지만, 아리스가 얼른 그녀의 손에서 그것을 뺏더니 능숙한 손길로 미레아의 오른팔에 붕대를 감았다. 붕대를 감는 동안 미레아는 아리스가 둔기로 사용했던 소총의 탄창을 확인하였다.

“야, 아리스. 너 아까 보니 사격 진짜 못 하더라.”

갑자기 자신을 흉보는 말에 아리스가 고개를 들었다. 미레아는 마른 입술을 혀로 핥으며 엄폐물 맞은편의 기사들의 수와 위치를 확인했다.

“그러니까 내가 총으로 엄호할 테니 네가 신전까지 뚫고 가.”

“너 오른팔은?”

“괜찮아. 나 양손잡이야.”

그 말에 아리스가 또 대책 없이 군다며 혀를 찼다.

“우리 아직 타이밍을 어떻게 맞출지 안정했어.”

“걱정하지 마.”

미레아는 아프기는 하지만 그럭저럭 움직이는 오른팔로 총을 들어 올렸다.

“내가 너한테 맞출게.”

“무슨 수로?”

“수가…… 있어!”

미레아는 근접해 온 기사에게 견제 사격을 하며 아리스의 등을 떠밀었다.

“결계의 주술 식이 해제되는 순간 신호만 하나 줘.”

그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아리스가 달려갔다. 무슨 방법이 있는 건지 깊게 묻지 않은 것은 시간이 없었던 것도 있었지만, 미레아가 대책 없이 행동하는 것에는 마음속 한구석에서 신뢰하는 무엇인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자기 자신이든, 혹은 다른 것이었든 말이다.

미레아는 정말로 어떻게 해서든 수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단순한 믿음이나 신뢰와는 다른 확신이었다. 그래서 아리스는 거리낌 없이 달려 나갈 수 있었다.

미레아가 견제 사격을 하는 사이 아리스는 근접전을 벌였다. 검을 든 아리스의 움직임이 아까와달라졌다. 제일 선두에 있던 기사의 팔이 날아갔다. 근육과 뼈를 끊어 낸 칼날은 푸른빛의 검기가 둘려 있었다.

미레아가 자신의 검기에 감응된 상태라 그랬지만 검은 아리스의 검기에 놀랍도록 빠르게 적응하고 있었다. 자신의 검기에 반응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 것과는 달리 습관적으로 검기를 넣어 검을 휘둘렀을 뿐인데 생각보다 잘 베어 버려서 아리스는 외려 당황했다. 검기를 쓰지 못하니 이 정도 휘두르면 팔 근육 정도는 끊어 놓겠지 싶었더니 아예 몸에서 팔을 떼어내 버렸다. 상대방과 유감이 있는 사이기는 했지만 조금 미안했다.

아리스는 어안이 벙벙해져 빌린 검과 본체와 이별한 채 흙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팔과 그런 팔이 붙어 있던 자리를 붙잡고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고 있는 기사를 번갈아 본 다음에 완전 대박이라 생각하며 원래 목표였던 신전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간혹 이런 경우가 있었다. 기운이 비슷한 사람끼리는 상대방의 기운에 감응된 검에서도 검기를 쓸 수 있는 경우 말이다. 운이 좋게도 이번이 그런 경우였다.

한 사람의 손을 오래 탄 물건은 그 사람의 기운이 스며들기 마련이었다. 검기는 바로 그것의 연장선이었다. 보통의 검과 보통의 인간에게는 물리적인 한계가 있으므로 인간을 베었을 때 뼈에 깨끗한 절단면을 남기기는 그리 쉽지만은 않다.

검기는 검사의 움직임을 보완하고 검의 예리함을 보강하여 일반 물리력을 뛰어넘게 만들어 준다. 그건 일종의 정신계 힘이라 마력과 다르지 않았다. 어느 정도 수준이 되면 마석으로 마력을 증폭시켜 마법을 능숙하게 쓸 수 있는 사람은 많지만, 순수하게 자신의 힘으로 끌어내야 하는 검기를 능숙하게 다루는 사람의 수는 훨씬 적었다.

미레아나 아리스가 검기를 자유자재로 끌어다 쓸 수 있는 것처럼 성기사들 역시 검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아리스가 그들을 절대적으로 압도할 수 있는 것은 아리스의 재능뿐만이 아닌 몇 번이고 목숨을 건 실전 경험이 있던 덕분이었다. 아리스는 마법을 쓸 수 없어도 충분히 훌륭한 검사였고, 훌륭한 살육 기계였다.

어느 정도 뚫어 놓은 길을 따라 달리고 있는 아리스를 확인한 후 미레아는 아슬아슬한 간격으로 제 귀를 스치고 지나가는 창을 피했다. 그리고 견제용 소총을 버리고, 하나 남은 검을 휘둘렀다. 창과 검이 맞부딪히며 불똥이 튀었다. 미레아는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왜 저놈을 감싸는 거지?!”

미레아를 향해 적의 어린 시선을 보내는 상대방은 미레아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눈 적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과 대화할 때는 분명 친절하고 다정했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같은 사람이라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는 당신들이야말로 그만해!”

미레아가 창을 쳐 내었다.

“이런 짓을 해서 얻는 게 뭐야?!”

기다란 창이 미레아의 접근을 막고 그 길이를 이용해 미레아의 간격 깊숙이 들어왔다.

“데르카이드들은 여신의 은총을 받지 못하는 자들이다! 마수를 끌어모으는 자들인데 어찌 막는 거지!”

미레아는 몸을 빙글 돌려 창을 옆으로 흘려보내더니 돌연 발로 창을 옆으로 걷어찼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의 공격에 창을 든 기사가 크게 휘청거렸다. 그 틈을 타고 미레아가 파고들었다.

“고작 마력 좀 마음대로 쓸 수 있다고 지레 겁먹고 화풀이하는 거잖아! 물론 그 힘 덕분에 마수의 좋은 먹잇감이지만 마력을 숨기고 신성력의 보호만 있으면 데르카이드의 존재 따위는 영향 받지 않는다는 것쯤은 당신들도 알 거 아니야?!”

미레아의 검이 기사의 허벅지에 박혔다. 기사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아직 창을 놓지 않은 손을 발로 밟으며 미레아는 짓씹듯 투덜거렸다.

“이런 것 따위, 누가 바랐다고…….”

미레아는 연이어 양쪽에서 날아오는 검들을 몸을 한 바퀴 굴려 피했다. 양손으로 검을 쓰는 것이 익숙한 터라 하나밖에 없으니 좀 불편했다. 미레아는 자신의 검을 빌려 간 아리스가 사라진 자리를 쏘아보며 그가 빨리 일을 마무리 짓길 바랐다.

한편, 그 시각 아리스는 성당 안으로 침입한 상태였다. 순식간에 기사 셋을 쓰러트린 아리스의 앞을 루캄이 막아섰다.

“마력만 믿고 나대는 어중이떠중이들과는 다르군.”

그 말에 아리스의 눈썹이 씰룩였다.

“사람 보는 눈이 형편없네.”

“라슈발렌에서 무슨 속셈으로 따라붙었나 했더니 당신과 한패였군. 뭐, 고작 한 명뿐이긴 하지만.”

루캄의 말에 아리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 나 그 사람이랑은 오늘 처음 본 관계인데. 저쪽에서 일방적으로 나를 돕겠다고 나선 거지 한패라고 할 만한 유대 관계는 없어.”

“상관없다. 어차피 혼자인 몸이니 금방 제압될 것이다.”

하지만 아리스는 미레아가 그렇게 호락호락 제압될 리 없다고 생각했다. 비록 둘 사이에 유대 관계는 없어도 아리스가 그렇게 믿을 만한 신용 정도는 미레아가 충분히 보여 주었다. 아리스는 밖의 일은 신경 끄기로 마음먹었다.

아리스가 루캄의 등 뒤로 굳은 표정을 한 리젤을 힐끔 흘겨보았다. 리젤은 자신의 키만 한 지팡이를 양손으로 꽉 쥐었다. 주술식만 있다면야 자신이 굳이 신성력을 공급하지 않고 끊어도 결계가 유지되니 상관없었지만, 마력 제어 결계는 제법 신성력을 많이 잡아먹는 술식이었다. 그야 신성력으로 마력을 눌러야 하니 마력이 방출되는 만큼 보강이 필요했다.

게다가 의외의 조력자를 얻은 아리스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상황이다 보니 만약의 사태에 대한 대비책이 필요했다. 그래서 리젤은 자신의 신성력을 끊지 않고 술식과 연결하고 있었다. 지팡이는 그 중간 매개체 역할을 했다.

아리스는 여유로운 태도로 혀를 끌끌 찼다.

“대체 어떻게 내가 데르카이드인지 알아차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 이외는 전부 형편없어.”

“전에 당신이 작은 상처를 입었을 때, 제가 신성력으로 치료하는 것을 거부한 적이 있었죠.”

“그거야 외간 남자의 몸에 손을 대려 했으니까.”

“당신의 마력 흐름은 이상해요.”

“그래서?”

“마수의 숲을 고작 검 한 자루만 들고 헤치고 온 것부터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수상하지 않나요.”

“검술 실력이 출중하다면 그럴 수도 있지. 미레아인가 하는 그 녀석도 검만 들고 마수의 숲에서 설치고 다녔다고.”

“당신은 온통 수상한 것 천지인데 의심 안 하는 쪽이 더 이상하잖아요.”

“심증만 있고 물증이 없었잖아. 그저 이상하다는 생각만으로 사람을 죽일 뻔했다고. 왜 이래? 우리는 제법 괜찮은 공생 관계였다고 생각하는데. 리젤 신녀가 지금까지 이 마을에서 버틸 수 있었던 건 내가 주기적으로 마수를 없애 부담을 덜어 줬기 때문 아닌가? 그런데 그 대가가 이런 뒤통수 때리기라니, 실망이야.”

그 말에 리젤은 주춤했지만 루캄이 대신 입을 열었다.

“하지만 결국 리젤 신녀가 옳았다.”

아리스는 조금 자책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뭐, 어차피 시간문제이긴 했지. 생각보다 오래 갔고. 내 정체를 완전히 눈치채지 못한 것만큼은 성공했다고 봐야 하나.”

“네 정체는 이 세계의 불순물이나 다름없는 데르카이드지 않은가!”

아리스는 루캄의 말을 듣는 척도 안 하고는 미레아에게 빌린 검을 둘에게 겨누었다.

“밖에서 저 아가씨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어서 재빨리 끝내 버리고 싶은데. 그냥 항복할래?”

“마력도 제대로 못 쓰면서 검 하나만으로 내게 덤비겠다고?”

아리스는 피식거리며 한숨을 쉬듯 말했다.

“이까짓 거, 사실 술식을 깨 버리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은데 쉬운 지름길을 내버려 두고 굳이 어려운 길로 돌아가야 하니 귀찮아 죽겠네. 애초에 길고 짧은 건 대보지 않아도 알지만.”

조롱조로 이죽거리는 말에 루캄이 발끈해서 예고도 없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아리스는 루캄을 무시하고 그를 피해 곧장 리젤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순식간에 리젤을 제압하고 그녀를 인질로 삼아 루캄을 협박했다.

“얌전히 안 있으면 신녀는 죽어.”

루캄은 식은땀을 흘리며 엉거주춤 검을 내렸다. 자신의 목에 닿은 파리한 빛을 내뿜고 있는 검날의 감촉에 리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저, 저를 죽여도 결계 자체는 유지돼요!”

“그것 때문이 아니고……. 내가 왜 그 여자 말을 들어야 하는지 이해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니까.”

아리스는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그리고는 로드를 한 손으로 잡고 반대쪽 손으로 리젤의 얼굴을 쥐었다. 푸른 빛이 아리스의 손을 감싸더니 스파크를 튀기며 순식간에 전신을 휘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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