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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따라 종말까지-7화 (7/257)

7화.

미레아의 기운에 맞춰서 개조된 검에는 손때가 묻어 있었다. 손잡이만 잡아도 검을 향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서리 교단의 정예 기사를 상대로 잘도 싸우네.”

그 말에 미레아가 비릿하게 웃었다.

“저쪽이 정예면, 나는 최정예야.”

그러더니 아까 짐에서 풀어 둔 석궁 모양의 기계장치를 찾아 들었다.

“가자. 신성력은 신전 중앙에서 나오고 있으니까 그쪽으로 가야 해.”

그렇게 말하며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는 미레아를 쫓아가던 아리스가 무심코 말했다.

“미레아 제인스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미레아가 돌아보았다.

“너는 대체 누구야?”

아리스는 미레아를 바라보았다. 숱이 많고 곱슬곱슬해 꼭 불꽃같다고 착각했던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 그리고 신록 같은 눈동자. 희미한 달빛 아래에서도 그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아리스의 질문에 미레아는 뜻밖의 말이라는 듯 눈동자를 굴리며 조금 고민하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대답했다.

“그냥 미레아 제인스터.”

“뭐?”

“현재 라슈발렌 전투부 특수 기동대 소속 전투 요원. 친구들 사이에서 별명은 사냥개. 지금은 너를 구하러 온 구세주. 하지만 그것을 다 빼면 그냥 미레아 제인스터.”

그러더니 머쓱한 표정으로 볼을 긁적였다.

“별거 아니지?”

방금 10명의 정예 기사를 혼자 때려눕힌 사람이 본인은 평범하다고 주장하기엔 그다지 신빙성이 없었다. 애초에 아리스가 물은 것은 그런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아리스는 황당하단 표정을 숨기지 않았지만, 미레아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보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내가 계획이 있다고 그랬잖아. 좀 들어 봐.”

“내가 죽이지 않는다고 했지 너를 완전히 신용한다는 소리는 아닌데. 전후 사정을 제대로 들은 것은 아니지만 대충 네가 나 때문에 여기 왔다는 건 알겠어. 그런데 라슈발렌이 내게 대체 무슨 볼일이 있어서 그래?”

그 말에 미레아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건 아니지?”

“몰라.”

“알잖아.”

추궁하는 시선에 아리스는 얼굴을 팩 돌렸다.

“나를 데리고 할 수 있는 일이 한둘이 아니잖아. 그중 어떤 게 정답인지 어떻게 알아? 그리고 그것 중 내가 기꺼이 동참할 마음이 들 만한 일이 있을 거란 기대는 요만큼도 안 하거든.”

“내가 세피로스 회장의 명령으로 이 자리에 오긴 했어도 회장이 계획하는 모든 이야기를 알고 있는 게 아니라 섣불리 말을 할 순 없지만…… 그래도 나와 함께 가서 회장의 이야기 정도는 들어 줘. 우리는 네 도움이 필요해서 그래. 정말이야.”

“도움이 아니라 이용이겠지! 아쉬운 것은 내가 아니라 그쪽이고!”

“그래서, 뭐. 지금 이 자리에서 나를 따돌리고 도망이라도 치시겠다?”

“못 할 게 뭐가 있어. 걱정하지 마, 약속대로 죽이지는 않을게.”

미레아는 빈정거리는 어투로 턱을 까닥거렸다.

“라슈발렌은요, 지금까지 그쪽을 그냥 내버려 둔 거지 못 찾아서 그런 게 아니거든요?”

“그건 나도 알아.”

“네가 어디 있든 찾아내는 것쯤은 시간문제일 뿐이지 불가능한 것은 아니란 소리야.”

“…….”

아리스는 지금까지 라슈발렌의 전력과 자신의 전력을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래서 미레아가 하는 주장의 사실 여부를 판가름할 수는 없었지만, 경우의 수를 생각하여 그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미레아는 아리스의 침묵을 긍정이라 여겼는지 선심 쓴다는 식으로 말했다.

“그러니 반항하다 끌려갈래 아니면 나랑 같이 제 발로 갈래?”

“뭔 개소리야.”

아리스가 진심이냐는 표정으로 뇌에 있던 말을 필터링 없이 내뱉었지만, 미레아는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무신경하게 말했다.

“음……. 그 표현은 나한테 크게 모욕적인 표현이 아니야. 내 별명이 사냥개거든. 사냥개가 개소리 좀 하는 게 뭐가 이상해?”

천연덕스러운 그 말에 아리스는 여러모로 대꾸할 기력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한번 문 사냥감은 안 놓쳐.”

아리스가 미레아의 페이스에 휘말리는 바람에 할 말을 잃어 잠시 침묵한 사이 미레아가 다시 재촉하였다.

“아무튼, 나를 따돌리고 싶으면 저놈들 먼저 따돌려야 할 텐데 어차피 이 마을에서 오도 가도 못 하게 된 거, 지금 당장은 내 도움이 있어도 나쁘지 않잖아? 뒷일은 저놈들 먼저 해결한 다음에 생각해 보자고. 그러니까 좀 들어 보란 말이다.”

아리스는 팔짱을 끼고 더 해 보란 식으로 삐딱하게 섰다.

“이 장치는 변방 3m에서 자연 발생한 영소를 흡수하는 역할을 하거든.”

“그걸로 신성력을 흡수해서 결계라도 부수겠다는 거야?”

“아니. 말했듯 아무런 의지가 없는 자연 발생한 영소밖에 흡수 못 해. 지금 결계를 이루고 있는 신성력은 자연 발생한 것도 아니고 인위적으로 끌어낸 힘을 주술식으로 짜 넣어 흩어지지 못하게 조절하고 있는 거잖아.”

“그럼 자연 발생한 영소를 모으고 다니겠다는 소리야? 그거 모아서 결계 깨려면 한 100년 정도 모으면 되겠다. 금방이네.”

“생각보다 성격 되게 급하네. 왜 이렇게 설명을 끝까지 못 들어?”

“급한 상황이잖아. 그냥 결론부터 말해.”

미레아는 입을 삐죽이면서 설명을 이었다.

“저 녀석들의 신성력 결계는 신전이 중심이지. 결계를 이루는 주술식에 신성력을 공급하고 있는 신녀와 그것을 증폭시키는 신전이 있는 한 결계는 계속 유지될 수밖에 없어.”

“간단하네. 신전을 폭발시키자.”

“아니, 잠깐. 사람이 왜 그렇게 극단적이야? 생각해 봐. 신전이 없어지고 결계가 없어지면 이 마을은 마수 소굴이 된단 말이야. 몰라서 이래?”

“그럼 결계를 깨면 안 된다는 소리잖아. 하지만 마력 간섭 결계를 보호 결계 위에 덮은 바람에 이미 저 두 가지 결계는 하나씩만 깰 수 없어. 보호 결계만 남겨 둘 수 없단 말이야. 이 결계를 억지로 깨려면 이 마을은 외부에 노출될 수밖에 없어.”

“이 녀석의 역할이 그거야. 결계가 없어져도 이 마을이 안전할 수 있게 만드는 것.”

아리스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미레아는 영소 흡수기의 태엽을 감으며 말을 이었다.

“이 장치의 이름이 따로 있기는 한데 영소 흡수 전환…… 뭐, 어쩌구 저쩌구…… 거창하니까 이 녀석이라고 부를게. 결계를 구성하는 주술식이 없으면 신성력은 의지를 잃고 흩어져. 그렇게 되면 자연으로 흡수되는데 그사이 신성력은 일시적으로 자연 발생 된 영소와 다를 바가 없어지지. 힘을 붙잡아 두는 의지가 없으니 말이야. 결계의 중심지는 신전의 첨탑 맨 꼭대기이니 신성력의 농도가 가장 높은 곳도 그곳이고, 나는 결계가 풀린 직후 신성력이 흩어지기 전에 이 녀석에게 전부 흡수시킬 거야. 그런 다음에 여기 미리 새겨 둔 결계 주술식을 흡수한 신성력으로 발동시키면 보호 결계 문제는 해결이지. 흡수 범위가 반경 3m밖에 되지 않아 최대한 근접해야 하는데 저 첨탑에 엄폐물이 없어서 그사이 적들에게 허공에서 노출될 수밖에 없긴 한데…… 죽지 않도록 노력해 볼게.”

“아무리 응집되어 있었다지만 신성력이 흩어지는 건 정말 순식간인데 어떻게 하려는 거야?”

“그러니까 그 순간을 잡아야지 어떡해. 결계가 풀리기 전까지 저 위에서 무작정 기다리고 있다가 총 맞기는 싫으니까 타이밍 좀 잘 잡아 줘.”

“아니, 내가 아직도 좀 이해가 안 가서 그러는데 내가 타이밍을 잡아야 해?”

“그야 결계를 부수는 건 당연히 네 역할이니까. 여기 너랑 나 말고 또 있어?”

아리스는 미간을 좁히면서 빈정거렸다.

“나 혼자 결계를 해결 보라고? 아까 말한 대로 신전을 폭발시켜?”

“아니. 네 마력으로.”

“지금 이거 마력 제어 결계라는 건 알지? 마법을 못 쓰는데 무슨 수로?”

미레아는 그 말을 비웃더니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작 마력 제어 결계가 네게 의미가 있어? 그리고 말했잖아. ‘네 마력’으로 라고.”

미레아의 도발에 아리스는 피식 웃었다.

“나를 좀 과대평가하는 것 같은데 대책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뭐, 그건 둘째 치고 나를 움직이게 하는 방법을 생각보다 잘 알고 있는 모양이네. 네 작전대로라면 각자 개별 행동을 해야 하는데 다른 속셈이 있어서 배신하거나 그럴 생각이라면…….”

“내가 배신한다 그래도 네가 어떻게 될 사람이 아니니 네 걱정은 불필요해 보이는걸. 나는 내 쪽이 더 걱정이란 말이야. 저 위는 완전히 총으로 쏴 맞혀 달라는 위치잖아. 한끝이라도 타이밍을 잘못 잡았다간 기계 작동하기도 전에 내가 죽는다고. 이래서 마력 제어 결계를 펼치기 전에 해결하고 싶었던 건데…….”

미레아가 우는소리를 하며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이 상황에서 어느 쪽 위험 부담이 더 크겠어? 네게 손해 보는 말은 아니지?”

“그럼 그 타이밍은 어떻게 맞출 건데?”

“말 잘했어. 지금부터 그걸 궁리해 보자.”

미레아가 아리스에게 얼굴 좀 맞대 보라며 손짓을 할 때였다. 총성이 들리더니 미레아의 오른팔에서 피가 튀었다.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지만, 미레아는 신음 하나 내지 않고 이를 악물며 아리스를 옆으로 밀쳤다.

곧바로 그들이 있던 자리에 연달아 사격이 날아왔다.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 반대 방향으로 몸을 굴린 후 자세를 낮췄다. 소총을 든 성기사를 선두로 다른 기사 대여섯이 그들을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지형을 엄폐물 삼아 숨으니 잠시 숨 돌릴 시간이 생겼다. 미레아는 왼손으로 출혈이 일어나고 있는 오른쪽 팔의 지혈 점을 꾹 눌렀다. 아리스의 얼굴이 심각해지는 것을 보고 미레아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스쳤어.”

그런 것치고는 출혈이 많았다. 미레아는 다리에 달린 주머니 중 구급 물품이 들어 있는 곳을 뒤져 붕대를 꺼냈는데 저쪽에서 무언가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수류탄이었다. 아리스가 있는 방향으로 날아오는 것을 본 미레아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아리스 쪽에서 먼저 몸을 내던져 미레아를 잡아끌었다. 덕분에 폭발에 휘말리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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