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마법을 쓸 수 있는데 왜 숨기고 있었나요?”
“내가 낯을 가려서 내 얘기는 남한테 잘 안 하거든요.”
“맞아요. 저를 포함해서 마을 사람들 모두 당신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적었지요. 제 신성력만으로는 이 마을을 지키기 벅차 마수에게 습격당할 땐 검기를 쓸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으니 지금까지 아리스가 어떤 사람인지 묻지 않았어요. 당신은 비밀이 많아 보였고, 혹여 그 비밀을 마을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이곳을 떠날 수도 있으니 말이에요.”
“바꿔 말하면 지금은 내가 필요 없어지셨다?”
리젤은 대답 대신 생긋 웃었다.
“당신이 마법을 쓸 때 사용하는 증폭 매개체는 어디 있죠?”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아리스는 발뺌했지만, 리젤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
“이런 것까지 설명해야 하나요? 마석이 되었든 다른 것이 되었든, 당신이 마법을 쓸 수 있게 마력을 증폭시키는 매개체 말입니다. 어디 있죠?”
“글쎄?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아리스의 말에 리젤이 코웃음 쳤다.
“왜 설명을 못 해요?”
“약점이 되는 부분을 순순히 말하는 쪽이 바보 아니야?”
“그게 아니겠죠. 증폭 매개체 같은 건 갖고 있지 않으니 대답을 못 하는 게 아니고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그만 되었다, 리젤 신녀. 당신은 물러나 있어.”
리젤 앞으로 거구의 남자가 걸어 나왔다.
“서리 교단의 성기사(聖騎士)단 사령관, 루캄이다.”
“사령관?”
아리스가 중얼거리는 말에는 관심도 없는지 루캄은 근엄한 목소리로 고했다.
“정체를 드러내거라, 교단의 주적이여. 존재 자체만으로도 죄악이며 이 불경하고도 사악한, 마귀보다도 더 추악한 존재, 더러운 데르카이드여. 이 자리에서 너를 벌하겠다.”
아리스는 멀뚱거리면서 그 말을 들어 주다 결국 핫 하고 실소를 흘렸다.
“당사자를 앞에 두고 못 하는 소리가 없군. 당신들 아직도 데르카이드 사냥을 하고 다녀? 그거 라슈발렌은 알아? 마침 동행하셨던데.”
“그 말이라 함은, 데르카이드란 것을 인정하는가?”
자신에게 필요한 부분만 골라 듣는 루캄에게 아리스는 울컥해서 반박했다.
“내가 인정하고 말고가 중요해? 당신들은 애초에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안 들을 거잖아? 예전부터 그랬어! 남의 말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지!”
하지만 그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검을 아리스에게 휘둘렀을 뿐이다. 그들 전부 낮에 봤던 사람들이다. 여신을 모시는 자들이란 것들이 구호물자라는 허울 좋은 핑계로 이런 짓을 하러 들어온 것이다.
데르카이드.
인간은 누구나 서리 여신의 가호 아래 살아간다. 인간들이 자신들의 수호신으로 모시는 서리 여신은 인간들이 풍요롭고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성녀를 통해 여신의 속삭임을 내려 주었다. 인간들은 그것은 이정표 삼아 여신의 조언대로 살아갔다.
하지만, 100년 전, 여신의 신탁에 존재하지 않던 존재들이 나타났다. 그중 하나가 100년 전 갑자기 나타난 괴물, 오늘날 ‘마수’라 부르는 것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비슷한 시기에 나타난 등에 날개가 돋은 인간들이었다. 서리 교단에서는 그들을 ‘불명(不明)’이란 뜻을 담아 ‘데르카이드’라 불렀다.
데르카이드들은 인간이었으나 서리 여신의 제약에 매이지 않고 증폭기나 매개 없이도 강력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위대한 마법사들이었다. 여신의 목소리를 전하는 신탁과 예언의 성녀들조차 그들의 앞날을 예지하지는 못하였다.
인간이면서, 여신의 발아래 있지 않은 존재들. 그 이유로 데르카이드는 그들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서리 교단과 범상치 않은 힘을 가진 자들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배척을 받았다. 데르카이드는 100년간 인간 사회에서는 극히 일부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음지에서 생활하고 있다.
남들과 다른 힘을 가졌다는 것은 그만큼 이용당하기도 쉬웠다. 게다가 데르카이드는 극소수였다. 그들이 아무리 우월한 존재라 해도 다수의 여론과 힘을 거스를 수는 없는 법이었다. 거기에 서리 교단 내에서 극단적인 강경파들은 이런 식으로 데르카이드를 ‘사냥’하기도 했다. 그나마 근래 들어서 자중하나 싶었더니 암암리에 이런 짓을 자행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리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마법 쓰는 것을 자제하긴 해도 이런 곳에서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자신이라고 해서 마수가 들끓는 숲으로 총과 검 하나만 들고 사냥하러 갈 수는 없지 않은가.
리젤에게 탄로 나는 것 정도는 시간문제였지만, 정체를 들킨다 해도 이런 마수의 숲 한가운데에 있는 마을에서 결계를 유지하는 것 이외에 신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리젤이 여기까지 교단의 성기사들을 끌고 들어올 줄은 몰랐다.
“그저 사람 좋은 신녀님인 줄 알았는데.”
아리스는 정성껏 마을의 대소사를 도맡아 일하던 리젤의 행적을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맞아요, 저는 인간들을 돕습니다. 그것이 여신을 모시는 제 사명이니까요. 하지만 당신은 인간이 아니잖아요.”
“나도 인간이야.”
“서리 여신의 발아래에서 벗어나 하늘로 뻗은 당신의 날개는 무슨 색인가요, 데르카이드.”
“나도, 인간이야…….”
“아, 한 가지는 감사하도록 하죠. 지금까지 도움을 요청했지만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며 무시했던 본교에서 제가 당신 이야기를 흘리자 바로 성기사단을 보내 주더군요. 덕분에 저는 이 마을에서 나갈 수 있게 되었답니다.”
리젤은 아리스에게 차가운 시선을 던지며 손을 들었다. 연이어 루캄이 손짓하자 잠시 소강상태였던 기사들과 아리스의 대치가 다시 이어졌다. 아리스는 날카롭게 날아드는 검을 막곤 혀를 찼다. 지금 상태에서 마법을 쓰는 것은 자충수였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날개를 본다면 입막음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가 클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라슈발렌의 요원이 어쩌다 같은 날 이곳에 들어왔는데, 당신 말대로 라슈발렌에 알려지면 곤란하겠지요. 그래서 방해되지 않게 당신과 같이 죽으라고 숲으로 혼자 보냈더니 용케 살아 돌아왔더군요.”
그러니까, 그렇게 따지면 그 여자도 데르카이드가 아닌지 의심해야 하는 거 아닌가. 차별받는 것 같았다. 아리스는 검기를 실은 칼날들을 연달아 쳐 내며 루캄에게 손가락질하였다.
“설명하는 와중에 미안한데 나 질문이 있어. 사령관은 당신 하나야?”
“그렇다. 데르카이드 사냥이니 사령관급인 내가 직접…….”
“아니, 아니. 그게 아니고, 고작 기사단의 사령관 하나에 정예 기사 20명을 끌고 온 거면 상당히 경솔했다 싶어서.”
루캄이 그게 무슨 의미인지 되물으려고 할 때, 깡통같이 생긴 물체가 날카로운 금속음을 내며 굴러왔다.
“?!”
순간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그것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그것은 딸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양옆으로 열리더니 맹렬한 기세로 연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최루가스로 순식간에 한 치 앞을 구별하기는커녕 매운 연기 때문에 모두가 눈물과 콧물 범벅이 되어 당황한 그때 아리스의 팔을 누군가가 낚아채 끌어당겼다.
“이쪽으로 오세요!”
누구인지, 어떤 목적인지는 몰라도 아리스는 일단 이 위기상황을 모면하고자 저항 없이 순순히 그자가 달리는 대로 함께 따라갔다.
“괜찮아요?”
맑은 공기가 있는 곳으로 나온 뒤에도 한참을 더 달린 끝에 아리스는 겨우 그자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미레아, 콜록, 제인스터……?!”
기침과 함께 ‘대체 어떻게?’라고 묻는 아리스에게 미레아는 물통을 건네주었다. 얼굴을 헹궈 낸 아리스는 그제야 시야가 제대로 트였다. 미레아는 낮과 비슷한 차림에 허리춤에는 두 자루의 검을 차고 품 안에는 권총 한 정과 여러 화기를 둘러메고 있었다.
지금 그들이 있는 이곳은 마을 밭두렁 밑으로 추정되는 곳이었다.
“무사한 것 같아 다행이네요. 교단 사람들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서 왠지 이럴 것 같았어요. 그래서 잠복해 있었는데 잘됐네요. 아, 이 상황이 잘됐다는 게 아니고 예감이 맞았다는 쪽을 말한 거예요.”
아리스는 자신을 훑어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미레아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당신 뭐 하는 사람이야?! 무슨 속셈이고?”
“아니, 아까부터 구해 준 사람한테 태도가 참 섭섭하네.”
미레아가 검 끝으로 아리스를 까닥까닥 가리켰다.
“일단 이상한 짓 하려고 구해 준 건 아니니 긴장하지 마시고요. 지금 좀 곤란한 상황 아니에요? 도와줄게요.”
하지만 아리스는 위아래로 가볍게 흔들거리고 있는 미레아의 검을 자신의 검으로 삐딱하게 쳐 내었다.
“네가 왜?”
아리스가 정중한 어투를 집어 던지자 미레아 역시 재빠르게 태도를 바꿔 편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서리 교단 놈들이 데르카이드 사냥하고 있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잖아. 그새 까먹었나 본데, 내가 라슈발렌 소속이거든. 그게 라슈온 지적 생명체 협회의 약어인 건 알지? 그리고 데르카이드도 지적 생명체잖아? 아니야? 만약에 네게 인간에 준하는 지능 같은 게 없으면 그냥 두고.”
“고작 그런 이유로 도와준다고…….”
“고작이라니? 사람이 사람을 도와준다는 게 뭐가 잘못됐어?”
그렇지 않아도 켕기는 게 있던지라 미레아는 뜨끔하며 되물었다. 하지만 아리스는 큰 의미 없이 던진 말이었는지 미레아의 질문을 무시하였다.
“그래서 네가 뭘 해 줄 수 있는데?”
그 말에 미레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둔덕 위로 얼굴을 반만 내밀었다. 최루탄으로 교란한 효과가 떨어졌는지 기사들이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미레아는 다시 아리스의 옆에 쪼그려 앉아 지형을 살폈다.
“내가 퇴로를 뚫어 줄 수 있어.”
“퇴로로는 안 돼. 증인이 남는 건 좋지 않아. 기사들을 몰살시켜야지.”
그 말에 미레아가 크게 한숨 쉬었다.
“내가 이럴 것 같아서 혼자서라도 교단 사람들이랑 억지로 동행해서 온 건데. 꼭 그래야 해? 죽이지 마.”